↑↑ 어승생악의 정상 부근 일본군이 설치한 토치카 큰크리트 /사진= 송기남 위원 |
↑↑ 어승생악의 정상 부근 일본군이 설치한 토치카 큰크리트 /사진= 송기남 위원
일제 강점기 당시 강제노역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곳이 제주도이다. 지금은 관광지라는 이름으로 미화되고 있지만 제주섬을 형성하고 있는 오름에는 마치 벌집처럼 곳곳에 인조 동굴이 존재하고 있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20만 제주도민 중 13세 어린아이부터 70대 노인까지 남, 여 노, 소를 가리지 않고 그 당시 20만 제주도민 중에 절반 이상이 강제노역에 동원했다. 광란의 태평양 전쟁은 1944년 가을부터 1945년 8•15까지 제주도민들을 짐승몰이하듯이 몰아붙였다.
이처럼 한국인의 강제노역 현장인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등재는 사도광산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일제는 일본의 광산은 물론 한국의 광산과 이 나라 곳곳에 진지용 동굴을 구축하면서 선조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송기남 제주 생태환경운동가이면서 K문화타임즈 논설위원으로부터 광란의 일본 태평양 전쟁 당시 제주도민 20만 명 중 절반 이상을 강제노역시킨 죽음의 현장을 돌아본다.
↑↑ 송기남 제주 생태환경운동가/ k문화타임즈 논설위원
[제주생태환경 운동가/ K문화타임즈 논설위원= 송기남 ] 독립 혼성 제108 여단 히라오카 츠토우는 보병 제642대대, 643대대, 644대대, 645대대, 646대대, 647대대 6000명의 병력을 한라산 동쪽 채오름과 안돌오름, 밧돌오름, 거슨샘이 오름 일대에 주둔시켜 제주 동부 산악지대와 동남부 지역을 통솔한다. 결 7호 작전의 총사령부는 1945년 봄 제주시 전농로 제주 농업학교에 임시 주둔하다가 한라산 어승생악 토치카와 진지동굴을 구축해 옮기게 된다.
일본 총독부 조선인 근로자 동원령에는 16세 이상 60세까지라고 했으나 제주도에서는 13세의 어린아이들부터 70대 노인들까지. 남, 여 노, 소를 가리지 않고 그 당시 20만 제주도민 중에 절반 이상이 강제노역에 동원된다. 광란의 태평양 전쟁은 1944년 가을부터 1945년 8,15까지 제주도민들을 짐승몰이하듯이 몰아붙였다.
어승생악 땅굴 파는 일에는 무거운 철근과 모래, 시멘트, 자갈들을 등에다 지고 산꼭대기까지 옮기는 일은 가혹한 고문이었다. 산 아래 능선에서부터 토치카가 있는 정상 부근까지 나선형으로 땅을 파고 계단을 놓아 바깥 부분을 잔디로 덮어 위장하게 했다. 이런 생지옥에서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워도 산 아래는 무장한 군인들이 겹겹이 깔려있어 탈출 하고 싶어도 틈새가 없었다.
↑↑ 일본군 훙성 108 여단 주둔지 일대 거슨샘오름 북쪽 능선 샘물터,일본군이 이용했던 곳 /사진 = 송기남 위원 |
↑↑ 일본군 훙성 108 여단 주둔지 일대 거슨샘오름 북쪽 능선 샘물터,일본군이 이용했던 곳 /사진 = 송기남 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