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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기획/ 한국인 강제노역 현장 사도광산• 최대 피해지역은 제주섬, 도민 20만 명 중 절반 이상 죽음의 강제 노역

김경홍 기자 siin0122@hanmail.net 기자 입력 2022.02.01 22:42 수정 2022.02.01 22:49

일본 정부 사도광산 유네스크 등재 추천 결정
일제 강점기 강제노역 최대 피해 지역은 제주도⇥ 13세 어린이부터 70세 노인까지, 20만 제주도민 중 절반 이상 죽음의 강제노역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일제 강점기 한국인 강제 노역의 아픔 짓밟는 행위
오늘의 한국인⇥죽음의 강 건너야 했던 선조들의 아픈 역사 잊지 말아야

↑↑ 어승생악의 정상 부근 일본군이 설치한 토치카 큰크리트 /사진= 송기남 위원


[k문화타임즈 = 김경홍 기자] 세월이 가도 아픔은 남는 법이다. 한국인에게는 잊을 수 아픔의 현장인 사도광산을 일본 정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천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이 바라는 대로 세계유산 보호와 창의성을 바탕으로 하는 문화발전 기반구축에 활동 목표를 두고 있는 국제연합 전문기구인 유네스코가 일본 사도광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승인할 경우 일제강점기 당시 강제 노역으로 죽어갔던 선조들의 아픔은 치유될 수 없다.
따라서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선조들의 원혼과 아픔이 묻혀있는 사도광산을 유네스코에 등재할 수 없도록 모든 수단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정든 조국과 가족을 뒤로한 채 죽음의 강을 건너야 했던 선조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다.


↑↑ 어승생악의 정상 부근 일본군이 설치한 토치카 큰크리트 /사진= 송기남 위원


일제 강점기 당시 강제노역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곳이 제주도이다. 지금은 관광지라는 이름으로 미화되고 있지만 제주섬을 형성하고 있는 오름에는 마치 벌집처럼 곳곳에 인조 동굴이 존재하고 있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20만 제주도민 중 13세 어린아이부터 70대 노인까지 남, 여 노, 소를 가리지 않고 그 당시 20만 제주도민 중에 절반 이상이 강제노역에 동원했다. 광란의 태평양 전쟁은 1944년 가을부터 1945년 8•15까지 제주도민들을 짐승몰이하듯이 몰아붙였다.

이처럼 한국인의 강제노역 현장인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등재는 사도광산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일제는 일본의 광산은 물론 한국의 광산과 이 나라 곳곳에 진지용 동굴을 구축하면서 선조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송기남 제주 생태환경운동가이면서 K문화타임즈 논설위원으로부터 광란의 일본 태평양 전쟁 당시 제주도민 20만 명 중 절반 이상을 강제노역시킨 죽음의 현장을 돌아본다.


↑↑ 송기남 제주 생태환경운동가/ k문화타임즈 논설위원



[제주생태환경 운동가/ K문화타임즈 논설위원= 송기남 ]
독립 혼성 제108 여단 히라오카 츠토우는 보병 제642대대, 643대대, 644대대, 645대대, 646대대, 647대대 6000명의 병력을 한라산 동쪽 채오름과 안돌오름, 밧돌오름, 거슨샘이 오름 일대에 주둔시켜 제주 동부 산악지대와 동남부 지역을 통솔한다. 결 7호 작전의 총사령부는 1945년 봄 제주시 전농로 제주 농업학교에 임시 주둔하다가 한라산 어승생악 토치카와 진지동굴을 구축해 옮기게 된다.

일본 총독부 조선인 근로자 동원령에는 16세 이상 60세까지라고 했으나 제주도에서는 13세의 어린아이들부터 70대 노인들까지. 남, 여 노, 소를 가리지 않고 그 당시 20만 제주도민 중에 절반 이상이 강제노역에 동원된다. 광란의 태평양 전쟁은 1944년 가을부터 1945년 8,15까지 제주도민들을 짐승몰이하듯이 몰아붙였다.
어승생악 땅굴 파는 일에는 무거운 철근과 모래, 시멘트, 자갈들을 등에다 지고 산꼭대기까지 옮기는 일은 가혹한 고문이었다. 산 아래 능선에서부터 토치카가 있는 정상 부근까지 나선형으로 땅을 파고 계단을 놓아 바깥 부분을 잔디로 덮어 위장하게 했다. 이런 생지옥에서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워도 산 아래는 무장한 군인들이 겹겹이 깔려있어 탈출 하고 싶어도 틈새가 없었다.

↑↑ 일본군 훙성 108 여단 주둔지 일대 거슨샘오름 북쪽 능선 샘물터,일본군이 이용했던 곳 /사진 = 송기남 위원


지옥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 스스로 부상자가 되어 실려 나가는 것 뿐이었다. 어느 노동자는 실수를 가장하여 눈을 질끈 감고서 곡괭이로 자기 발등을 내리찍었다. 발등을 찍은 곡괭이가 발바닥을 뚫고 나오자, 집에 가서 치료받고 다시 오라고 했다고 한다.

1944년 가을부터 미군기가 가끔 제주 상공에 나타나 일본군에게 간헐적인 공습이 있게 된다. 1945년 4월 14일 한림항에서 중국으로 이동을 준비하던 일본군 함대와 수송선이 미군의 폭격에 맞아 침몰하면서 504명이 사망하고 160여 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제주항 상공에서는 미군 전투기와 일본 전투기가 서로 공중전을 하다가 미군기의 폭격을 맞은 일본기가 사라봉 입구까지 비틀거리며 날아가다가 떨어지기도 했다.

 

↑↑ 일본군 훙성 108 여단 주둔지 일대 거슨샘오름 북쪽 능선 샘물터,일본군이 이용했던 곳 /사진 = 송기남 위원



일본군은 제주도에서 일본 본토 방어를 위한 옥쇄 작전을 준비하면서 일부 제주 도내 어린이 노약자와 일본 민간인을 배에 싣고 목포로 가다가 추자도 근해에서 미군의 폭격을 맞아 침몰하면서 노약자와 부녀자 등 257명이 사망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제주도민 조선 본토로 소개 작전은 최소화하게 된다.

일본군이 왜 제주도민을 조선 본토로 소개 작전을 계획했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제주도가 오끼나와에서 처럼 미군이 직접 상륙하여 들어왔을 때 미군에 인질로 잡히게 될 제주도민들이 일본군 비밀 요새로 모든 군사 비밀들이 탄로날것을 대비하여 최소한의 제주도민만을 남겨놓고 소개한 뒤 일본군이 관리하기 쉬운 적은 숫자만을 가지고 최후의 순간까지 인간 방패로 삼아 버티면서 일본 작전을 저지하겠다는 잔인하고 무모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10만 5천 명의 병력이 주둔했던 오끼나와 전투에서 미군에 포위된 일본군들은 땅굴과 계곡에 숨어있던 총검을 겨누어 민간인들을 굴 밖으로 내보내고 굴 안으로 숨어들었다. 민간인들을 총알받이로 내세우며 버티던 그들도 민간인들과 함께 미군의 폭격을 받으며 전멸한다.
결국 오끼나와 전투에 일본군 10만 명과 민간인을 포함하여 24만 명이 죽어 나간다. 바로 이 모습이 제주에서 일어났더라면 얼마나 끔찍했겠는가.

일본의 결 1호 작전은 홋카이도 방면, 결 2호 작전 동북 방면, 결 3호 작전 칸토 방면, 결 4호 작전 동해방면, 결5호 작전 일본 중부방면, 결 6호 작전은 쿠유수유 방면이었다. 그러나 일본 본토에 미군이 집중 공습이 진행되면서 결 7호는 제주에서 날아가 협공을 한다는 계획이었다.
전쟁이 11월 초까지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일본군부는 조선 주둔 17만 명에 명해 1개 사단 병력 1만 명을 선발, 제주 5군에 사령부에 전력을 보강할 것을 1945년 8월 2일에 하달한다.
이때 1만 명의 병력으로 제20사단이 결성되어 대구에 집결, 8월 20일 자로 제주로 이동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린다. 결국 예상보다 빠르게 8월 15일 일본이 항복 선언을 하면서 제20사단 병력은 해산하게 된다.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전쟁에서의 승리는 어느 쪽에도 없는 것이다. 전쟁은 1만 명이 죽는 쪽이나 100만 명이 죽는 쪽이나 모두가 패배자일 뿐이다. 과속차량과 은주운전 차량이 마주 달려 사고를 내고서 한 사람만 사망하거나 두 사람이 반신불수로 살아남거나 최악은 똑같고 이긴 자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과 매한가지다.
일본이 미국을 우리 땅까지 끌어 들어온 이 무모한 전쟁으로 인해 우리의 겨레는 갈라지고 내전을 겪어오면서 우리를 재배한 두 나라에 의해 지금도 목줄을 매어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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