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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민(전 대구, 구미YMCA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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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김영민(전 대구, 구미YMCA 사무총장)]현대사회, 특히 도시나 시골을 막론하고 대중교통이라면 버스는 반드시 처음 제시되는 용어이고 도구입니다. 그 안에서는 숱한 서민의 삶과 애환 그리고 잊지 못할 추억까지 간직하고 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버스에서 일어나는 일이 우리 사회의 삶을 그대로 투영하고 내일로의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 있어 참고로 삼아 배우고자 합니다. 《버스 44》와 《57번 버스》가 그것입니다.
2001년에 제작된 홍콩의 영화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버스 44(车四十四)로 부산 국제 영화제에 초청되어 알려졌다가 2014년 세월호 침몰 사고를 계기로 주목을 받은 작품입니다.
실화를 근거로 한 이 영화는 이렇습니다. ‘중국의 어느 시골길에서 한 청년이 2시간 가까이 기다려 44번 버스를 탑니다(옛날 장날이 되면 시골길에 버스를 기다렸다가 탔던 우리의 모습을 상상케 합니다). 그런데 버스가 출발하고 난 다음 얼마 가지 않아 승객을 가장하고 승차한 2인조 강도의 습격을 받습니다. 승객들의 금품을 빼앗은 강도들은 젊은 여자인 운전사에게 돈을 빼앗고 급기야 밖으로 끌어내어 성폭행하고......., 다른 승객들은 겁에 질려 아무런 행동도 못 하는데 중도에 탄 청년 하나는 이를 막으려 그들에게 달려들지만, 흉기를 가진 강도들에게 간단히 제압당하고 상처를 입고 쓰러집니다. 그러는 동안 다른 승객들은 방관만 하고 있을 뿐이었지요. 성폭행을 당한 뒤에 차에 돌아온 운전사는 경멸하듯 승객들을 돌아보고, 이때 다친 청년이 돌아와서 버스에 타려는데 그 청년을 타지 못 하게 한 다음 버스를 몰아 떠나버립니다. 청년은 할 수 없이 다음에 오는 차를 중도에 세워(히치하이킹) 목적지를 향해갑니다, 도중에 심한 낭떠러지에서 경찰들이 교통사고 현장을 조사하는 것이 보였지요. 조금 전까지 청년이 탔던 44번 버스가 언덕 밑으로 굴러 운전사와 승객 전원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경찰관들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된 청년은 쓴웃음을 짓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여자 운전자는 자신의 치욕과 그것을 바라만 보고 있는 승객들에게 자신의 목숨을 던져 복수하는 모습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회의 불의나 부정을 보고도 자신의 안위를 위해 입을 다물고 몸을 사리는 현실에 대하여 ‘공멸’이라는 가르침을 주고자 한 작품으로 기억합니다.
또 하나는 ‘두 명의 십대와 그들의 삶을 바꾼 그 날의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57번 버스』(대슈카 슬레이터 저, 김충선 역, 돌베개 | 2021년 09월)라는 제목의 실화를 다른 책입니다. ‘같은 노선의 양 끝, 같은 범죄의 양면―젠더, 인종, 선악의 이분법 너머에 존재하는 진짜 삶과 정의에 관한 이야기’라는 서평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청소년의 성에 대한 정체성, 특히 우리 사회의 성 소수자에 대한 몰인식과 이분법으로만 해석하는 성에 대한 구분에 대해 매우 적극적이면서 반드시 만연해지고 또 꼭 겪어야 할 사실을 앞서 내용을 보여줍니다.
이 역시 실화로 미국 오클랜드를 가로지르는 18킬로미터를 운행하는 이 버스는 이웃하지만,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지역을 다니면서 두 명의 십 대 청소년의 동선을 8분 동안 겹친 내용을 통해서 그들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57번 버스’가 아니었다면 이야기의 주인공인 사샤와 리처드는 평생 마주칠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둘 다 미국에서 가장 다채로운 도시 중 하나인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 사는 고등학생이었지만,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지요. 사샤는 백인으로써, 에이젠더(어는 성별에도 속하지않음), 그레이 큐피오섹슈얼(대체로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지만 성적 관계에는 관심이 있음), 콰이로멘틱(연애 감정과 플라토닉 러브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함)이며 엄격한 채식주의자이면서 중산층 거주 구역에 살면서 소규모 사립학교에 다녔습니다. 아스퍼거 증후군 증상이 있어 어릴 때부터 언어 등에서 매우 탁월했으며 친구 사멘샤와 앤드류(트랜스젠더)와의 교분을 통해서 자신이 남과 여 2개의 구분이 아닌 제3의 성에 대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문제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한 명 흑인 소년 리처드는 범죄가 만연한 동네에서 대규모 공립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 두 청소년의 이동 경로는 매일 겨우 몇 분 겹칠 뿐이었다. 2013년 11월 4일 월요일 오후 5시경, 방과 후 57번 버스 안에서 리처드와 친구들이 저지른 무모하고 치기다운 잘못(차 안에서 잠이 든 샤샤의 치마에 불을 지른 사건) 때문에 다리에 심각한 화상을 입었고, 리처드는 종신형을 받을지도 모를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 끔찍한 사건에 모든 언론과 대중이 주목하면서 두 사람도 별안간 관심의 초점이 된다는 내용으로 사건은 전개됩니다.
특히 성 소수자 문제에 대한 미국의 지금 모습, 흑백 갈등으로 인한 가난한 청소년들의 치기 어린 행동 등이 만들어 내는 사회상은 우리는 생각할 수 없는 저 먼 우주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해 줍니다. 여기서 운전자의 역할은 단순히 정해진 길을 운전할 뿐 있는지 이 세상에서 청소년들이 이 세상에 있는 학생의 치마에 불을 질러 화상을 입히든 아니든 오로지 운전만 하는 방관자 스타일입니다.
두 개의 버스 번호가 주는 모습을 오늘 우리에게 대입하고자 합니다. 전자인 영화 <车四十四>는 운전사와 승객 그리고 문제에 대한 대처의 방식에서 사회악에 대한 경각심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The 57 Bus』는 청소년문제, 성 소수자, 등 문제를 보는 형태가 전혀 다를 뿐 아니라 여기서 운전자는 화상을 입은 차 안의 상황을 지켜보는 자(방관자?), 장난으로 불을 지른 흑인 청소년들에 의해 화상을 입은 채 쓰러진 샤샤의 불에 탄 치마를 처리하는 자로 나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새로운 운전자(대통령)를 선발해야 할 시간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이 모두 탈 버스를 운전할 사람을 뽑는 귀한 시간이 착착 다가오는 중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화급한 시간에 우리의 운전사 지망생들(후보자들)이 제시하고 문제라고 하는 일에는 위에서 나타난 일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는 것은 혼자만의 편견입니까? "만일 어떤 미친 운전자가 사람들이 다니는 인도 위로 차를 몰아 질주한다면 목사로서 내 임무는 희생자들의 장례나 치러주고 가족들을 위로하는 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 자동차에 올라타서 그 미친 운전자로부터 핸들을 빼앗아야 할 것이다"라고 한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목사님의 말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즉 절대로 뽑아서는 안 될 사람을 뽑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부연하면 “만일 국민의 아픔에 같이하지 않고 그저 마치 자기 일만을 하는 듯, 운전 이외에 손님이나 버스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방관자 내지는 일어나는 끔찍한 범죄를 그저 있던 일인 것처럼 두고 보는 운전사가 있다면 나는 그 운전자의 핸들을 빼앗아 할 것이라”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우리는 바라보고 바로 택하여 운전대를 맡겨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