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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동강의 발원지 황지/ 사진 = 강원도 태백시 켑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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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문화타임즈= 김경홍 기자] 거대 양당인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이재명 후보와 윤석열 후보를 대선 주자로 선출했다. 내년 3월 9일 실시하는 제20대 대통령 선거는 19대 대선과 2018년 지방선거를 통해 경북지역에서 기대 이상의 결실을 거둔 민주당이 진을 치느냐, 아니면 퇴각하느냐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아울러 3개월 후인 6일 1일 실시하는 지방선거에서 선전여부를 판가름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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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명 후보(우)와 윤석역 후보/ 사진= 진영별 선대위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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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정치사의 중심지 경북 구미 역대 대선 분석, 20대 대통령 선거 전망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3개 보름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한국 정치권이 요동치고 있다.
여권에서는 검정고시 출신으로 일용직 노동자라는 험난한 길 위에서 검정고시와 대학 진학, 사법고시 패스라는 역경을 극복하고 이 나라 최대 광역단체인 경기도를 책임졌던 이재명 후보를 대선 주자로 결정했다.
양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국민의힘은 9수의 사법고시 출신으로 문재인 정부에서 검찰총장을 지낸 윤석열 후보를 주자로 확정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경기도 지사와 검찰총장을 지낸 두 후보의 대결은 정치사의 아이러니컬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박근혜의 패배시계 바퀴를 14년 전인 2007년으로 돌려보자.
그해 8월 20일 오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대회가 열린 서울 올림픽 체조 경기장에서 구미 K모 국회의원 보좌관의 전화가 다급하게 걸려왔다. 작열하는 여름 햇살을 가로질러 달려온 보좌관의 음성은 힘이 없었다. 순간, 박근혜 후보에게 행운의 여신이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직감이 감지됐다. 결국, 직감은 현실이 돼 있었다.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투표 결과 발표와 함께 당시 이명박 후보에게 패한 박근혜 후보는 “경선 결과에 승복하고 백의종군하겠다”는 단장의 연설문을 짧게 마무리 짓고 하단했으나, 대회장에 진을 치고 있던 박사모는 “여론조사, 경선 무효”를 외치며 눈물을 곱씹었다.
사정은 구미 현지도 매한가지였다. 갈증을 해갈 시켜 주리라던 ‘박근혜의 희망“이 좌절의 후폭풍으로 몰아치자, 친박 정서의 절대 다수 구미 시민들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우연이었을까. 구미에 소재한 삼성전자는 경선대회 하루 뒤인 그해 8월 21일 구미의 또 하나 희망이었던 연구동 사업을 중단한다는 발표를 했다. 구미로선 설상가상의 비보였다.
친박 정서가 절대적이었던 구미의 민심은 2007년 12월 19일 실시된 선거에서 그대로 노정됐다. 이명박 대통령의 연고지인 포항 북구와 포항 남구는 각각 84%와 80%라는 절대적 표심을 이 대통령의 손에 쥐여준 반면 반 친이 정서로 뭉친 구미의 표심은 전통적으로 야성이 강한 의성군의 66.85%에 이은 66.87%만을 쥐어주는 데 그쳤다. 72%의 경북도 평균 득표율에 훨씬 못 미치는 결과였다.
갈등의 골은 MB정권이 들어선 직후 실시된 18대 총선을 거치면서 더욱더 깊게 패이기 시작했다. 친박계 공천 학살로 명명된 17대 총선을 위한 한나라당 후보 공천은 친박 성향이 절대적인 구미 민심을 요동치게 했다. 백의종군하던 정치인 박근혜 전 대표는 “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통탄을 하면서 낙천 후 친박 무소속 혹은 친박연대의 명함을 내밀고 출사표를 던진 자파 후보들에게 “살아서 돌아오라”고 호소했다.
이러한 정치적 격동기 속에서 낙천 후 친박 무소속으로 출사표를 던진 구미을의 김태환 국회의원을 비롯한 친박계의 후보들은 “살아서 돌아가겠습니다”라는 대형 걸게 현수막을 내걸고 정치 현장으로 뛰어들었고, 18명의 친박계 후보들은 한나라당 후보를 파죽지세로 누르면서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친박계 후보에 대한 18대 총선 당시 구미 민심은 우호적이었다. 친박 무소속 후보로 출전한 김태환 국회의원은 한나라당 후보가 득표한 29.3%를 두 배 가량 압도한 59.8%를 득표하면서 ‘국회 입성’의 영예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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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 사진 =기념관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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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좌절, 그리고 화려한 부활 그로부터 5년 후인 2012년 12월 실시한 제18대 대선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51.55%를 획득하면서 48.02%까지 치고 올라온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간발의 차이로 누르며 제1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구미 표심도 큰 힘을 실었다.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66.87%라는 인색한 표심을 던졌던 것과는 달리 구미인의 피가 흐르는 박근혜 후보에게는 80.34%라는 압도적인 지지표를 던졌다.
하지만 결집한 친박 정서는 종착역을 향해 숨 가쁘게 달리고 있었다. 지하에서 회자되어 온 최순실 국정 농단 사실이 천하에 공개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국회는 2016년 12월 9일 박 대통령을 탄핵 가결했고, 3개월 후인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박 대통령을 직에서 파면한다고 결정했다.
▲문재인의 부활제19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 것은 2017년 5월 9일이었다.
이때부터 보수의 심장이면서 친박 정서의 태생지인 구미의 민심은 분산되기 시작했다. 개표 결과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구미 득표율은 21.73%를 기록하면서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또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 48.62%,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 14.82%,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 8.75%, 정의당 심상정 후보 5.17%였다.
구미에서 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득표율 21.73%는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득표율 21.65%에 이은 두 번째 기록이었다.
친박 정서로 상징되어 온 구미의 보수 정서는 그로부터 1년 후 실시한 2018년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장세용 후보를 당선시키면서 진보 정서가 압도하는 상황을 낳았다. 사실상 친박 정서의 와해였다. 당시 후보별 득표율은 민주당 장세용 40.79%, 자유한국당 이양호 38.69%. 바른정당 유능종 7.54%, 무소속 김봉재 9.44%였다.19대 대선을 거치면서 마의 20%의 벽을 넘어선 민주당 표심은 2018년 지방선거에서는 40%의 벽을 넘어섰다. 이어진 21대 총선에서도 구미갑을 민주당 후보들은 31-35%를 득표하면서 30%의 벽을 넘어서는 이변을 연출했다.
따라서 구미에는 최소 20%, 최대 30%의 민주당 표심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따라서 제20대통령 선거의 승패는 진보가 구미에서 23%의 득표율을 상회하느냐, 하회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전망을 가능하게 한다. 역대 대선이 이를 증거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구미는 어떤 과정을 거쳐 보수의 심장으로 자리를 굳혔으며, 진보 표심은 어떤 과정을 거쳐 둥지를 틀었나전국 팔도 출신들이 모여들어 삶의 둥지를 틀고 있는 구미시의 진보 표심은 10%에서 출발해 30%에 육박하는 진취적 성향을 보여왔다. 특히 진보 표심이 75%를 상회하는 친박 표심의 벽을 뚫고 20%에 이어 30%에 육박하기까지는 지난한 세월을 거쳐야 했다.
그만큼 구미가 낳은 박정희 대통령의 정서가 세월과 무관하게 상당한 흡인력을 보이고 있다고 풀이해야 옳을 듯싶다.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패하자, 절대다수의 구미 시민들이 집단적 우울 증세를 보인 것도 그 근간에는 갈망하는 박정희 정서가 딸 박근혜 전 대표를 통해 발전적으로 진화되기를 바랐던 탓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미에 친박 정서가 굳건하게 자리를 잡기까지는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 박정희 대통령과 역대 대선 그리고 경북도와 구미 민심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3년간의 미 군정기를 종료한 1947년 7월 20일 비로소 제1대 대통령 선거가 국회에서 선출하는 간선방식을 통해 실시됐다. 당시 대한독촉당 이승만 (74세), 무소속 김구(68세), 무소속 안재홍(66세) 후보 등 3파전으로 전개된 선거에서는 와싱턴대와 하버드대 출신으로 미국통인 이승만 후보가 당선됐다.
이어 1952년 8월 5일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는 직선 방식을 도입했다. 당시 선거에는 모스크바 공산대 출신의 무소속 조봉암(54세), 자유당 이승만(78세),구한말 과거에 급제한 선비 출신의 무소속 이시영(84세), 미국 남가주대 고등과 의과를 수료한 미국통의 무소속 신흥우(68세) 후보 등이 출전하면서 다자구도로 선거가 치러졌고, 결국 이승만 후보가 당선되면서 결국 재선 대통령이 됐다.
이어 4년 후인 1956년 5월 15일 실시한 제3대 대통령 선거에는 농림부 장관 출신의 무소속 조봉암(58세), 국회의장과 임정 내무부장, 자유 신문사 사장 출신의 민주당 신익희 (61세), 자유당 이승만(82세) 대통령이 출사표를 던졌다, 이를 통해 이승만은 3선 대통령에 당선되는 영예를 안았다.
권력은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우러나는 생선과 같은 법이다. 그러나 현명한 이는 맛에 매료되지만, 상황이 악화하면 씹던 고기(권력) 내뱉는 법이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이러한 정치계의 관례를 거슬렀다. 이승만의 장기집권 음모에 반발한 고려대생을 비롯한 청년들은 이승만 타도를 외치면서 들불처럼 타올랐고, 3선의 이승만은 망명객의 신세가 되어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와 함께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제4대 대통령 선거는 국회에서 선출하는 간선방식으로 치러졌다.
민주당 윤보선, 김창숙, 변영태, 백낙준, 허정, 김도연 등이 후보로 나선 선거에서는 이순신 장군과 동향인 충남 아산태생으로서 에든버러대학교를 졸업한 서울시장 출신의 윤보선 후보가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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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대통령/ 사진 -기념관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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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등장5.16 군사 쿠데타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윤 대통령은 이어 실시된 5대, 6대 대선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대결을 벌였으나 번번이 실패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1979년 신민당 총재 상임고문, 1970년 국민당 총재 등을 거치면서 정치권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또 한국 정치사의 고질병인 계파 간 정쟁이 낳은 희생양의 표본이기도 했다.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민주당의 신구파 간 갈등 속에서 속앓이를 해야 했고, 결국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이 주축이 된 군부에 의해 하야하는 운명을 맞아야 했다.
구미 출신 박정희 대통령이 44세의 나이로 한국 정치사에 최초로 명함을 내민 것은 1961년 6월 국가 최고 재건 회의 의장으로서였다. 이어 대통령의 직에 오른 것은 2년 후인 1963년 10월 15일 제5대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면서였다.
그해 치러진 선거에는 7대1의 치열한 경쟁률을 보였다. 신흥당 장이석(60세), 육군 참모총장과 국방장관 출신의 자유민주당 송요찬(45세), 국가 최고 재건 회의 의장 출신의 민주공화당 박정희(46세), 건설신문사 사장 출신의 추풍회 오재영(44세), 대통령 출신의 윤보선(66세), 국무총리 서리 출신의 국민의당 허정(67세), 국무총리 출신의 정민회 변영태(70세) 등 기라성 같은 후보들이 나선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윤보선 후보가 득표한 454만 표보다 16만 표가 많은 470만 표를 득표하면서 진땀을 흘린 끝에 당선됐다.
당시 선거에서는 지역갈등 양상은 드러나지 않았다. 경북도(대구 포함) 165만 표 중 박정희 대통령이 83만7천 표를 얻은 데 비해 윤보선 후보의 득표력은 54만3천 표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 선산군(지금의 구미시)은 총투표자 4만8천 표 중 72.6%인 3만4882표를 박정희 대통령의 손에 쥐어졌다. 반면 윤보선 후보는 7천 319표를 획득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윤보선과 재격돌한 6대 선거와 호남 출신의 김대중 대통령과 격돌한 제7대 대선을 거치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최고 87.4%의 득표율을 거머쥐고 구미에 박정희 향수를 깊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1967년 5월 3일 직선제로 실시된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은 윤보선 전 대통령과 재격돌해야 했다. 하지만 표차는 5대에 비해 상당히 벌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선거 결과 전체 투표자 1천 164만 표 중 민주공화당 후보인 박정희 대통령은 568만 표를 득표해 452만 표를 얻은 신민당 윤보선 후보를 1백1십여만 표 차로 눌렀으니 말이다. 5대 선거에서 나타난 표차인 16만 표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들 정도였다.
6대 대선에서는 여타 후보들이 나섰으나 정의당 이세진 9만 표, 한국 독립당 전진한 23만 표, 민중당 김준연 24만 표, 통한당 오재영이 26만 표를 얻는 데 그치면서 선거전은 싱겁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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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보선 대통령/ 백과사전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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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점은 6대 대선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경북 득표율이 돋보이기 시작한 데다 구미에서의 득표율이 80%에 육박했다는 점이다. 반면 전남지역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이 윤보선 후보를 앞서는 특이상황을 낳았으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당시 경북(대구 포함)지역 선거에서는 총투표자 178만표 중 박정희 대통령이 1백만8만 표를 얻으면서 60%대의 득표율을 보인 반면 윤보선 전 대통령은 44만7천 표로 24%를 얻는 데 그쳤다.
선산군(지금의 구미시)은 총 4만9천 명의 투표자 중 박정희 대통령에게 3만9천 표를 몰아주었다. 이는 80%대에 근접한 79%의 득표율이었다. 반면 차점자인 윤보선은 4천6백 표로 9%의 득표를 하는 데 쳤다.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박정희 후보 vs 40대 기수론의 김대중 후보19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50대 말의 박정희 대통령은 40대 기수론을 들고 출사표를 던진 전남 목포 출신의 김대중 후보와 격돌 해야만 했다. 대선 사상 최초의 동서 대결이었으나, 박정희, 김대중 후보가 각각 적지에서 나름의 득표력을 보이면서 동서 간 갈등은 눈에 띄지 않았다.
민주공화당 박정희, 신민당 김대중, 국민당 박기출, 자민당 이종윤, 정의당 진복기 후보가 나선 선거에서는 전체 투표자 1천 2백41만 표 중 박정희 후보가 634만 표를 얻은 데 비해 김대중 후보는 539만 표를 얻는 데 그쳤다. 하지만 40대의 김대중 후보가 90여만 표 차로 따라붙은 것은 여권으로서는 충격적이었다.
경북지역(대구 포함)에서는 총투표자 183만표 중 박정희 후보가 133만 표를 얻었으며, 김대중 후보 역시 41만 표를 얻으면서 득표력을 과시했다. 또 전남에서는 149만 표 중 김대중 후보가 87만 4천 표를 얻었고, 박정희 후보 역시 47만9천 표를 얻으면서 득표력을 과시했다.
특히 김대중 후보의 고향인 목포에서도 김대중 후보가 3만 8780표를 얻은 반면 박정희 후보 역시 1만889표를 득표해 동서 간 갈등의 노출되지 않았음을 증거해 보였다.
하지만 선산군(지금의 구미시) 은 90%에 가까운 민심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쏠려 있었다. 총투표자 4만6650표 중 박정희 대통령은 87.4%인 3만8780표를 득표하면서 3천832표, 8.2%에 그친 김대중 후보를 멀찌감치 따돌렸기 때문이었다.
박정희 후보는 김대중 후보와의 경쟁에서 승리했으나, 서울에서는 59.39%를 얻은 김대중 후보에게 패해야 했다. 당시 박정희 후보의 서울 득표율은 39.95%에 머물러야 했다. 수도권에서의 패배는 박정희 정권에게 극심한 불안감을 조성했고, 증폭되는 불안감을 잠재우기 위한 방편으로 이듬해인 1972년에는 유신체제를 택하게 했다.
이를 계기로 1972년 12월 23일 실시된 제8대, 1978년 7월 6일의 제9대, 1979년 12월 6일의 제10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간접선거 방식으로 대통령을 선출했다.
그러나 비운이 몰아쳤다. 제8대, 9대 대통령에 연거푸 당선된 박 대통령은 1979년 10월 동향의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유명을 달리했다. 이어진 된 제10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비극의 최규하 대통령이 탄생했다.
이어 1980년 8월 27일 실시된 제11대 대통령 선거 역시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간선방식을 통해 전두환을 대통령을 당선시켰다. 사실상 11대 대선은 5.18 광주 민중항쟁의 가해 당사자인 전두환 대통령의 강압에 의한 것으로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면서 젊은 청춘들을 교도소로 향하게 했고, 동서 간 갈등을 야기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 방식을 통해 실시된 1981년 2월 25일의 제12대 대선은 제11대 대선을 실시한 지 불과 6개월 만이었다. 민정당 전두환, 한국 국민당 김종철, 민권당 김의택, 민한당 유치송이 후보로 나섰으나, 야당의 대표주자 형식을 내걸고 출사표를 던진 유치송 후보는 정도 야당의 길에서 외도했다는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 역대 대선과 보수 성향의 구미 민심1972년 직선제에서 간선제로 대선 방식이 바뀌고 다시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돌아오기까지는 16년 세월이 흐른 후였다. 이 기간 동안 미래가 창창한 386세대의 주축인 젊은 대학생들은 줄줄이 철창신세를 져야만 했다. 박종철 군 사망 사건은 가슴을 쓰려오게 하는 뼈 아픈 역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중한 희생을 바탕에 깔고 대선 방식이 직선제로 진화했지만, 1980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동서 간의 갈등이 그대로 표심으로 표출되면서 국민화합과 국가발전에 악재로 작용하는 불행을 낳았다. 아울러 박정희 정서에 뿌리를 내린 절대다수의 구미 민심은 13대 대선 이후 보수 성향에 많은 표를 몰아주기도 했으나 때로는 진보 성향의 후보에게도 득표력을 선물하는 지혜를 발휘하는 현명한 선택을 하기도 했다.
16년 만에 직선제 방식으로 실시한 제13대 대선에는 민정당 노태우, 민주당 김영삼, 평민당 김대중, 공화당 김종필, 한국당 신정일 후보가 출마했다. 김대중, 김영삼으로 지칭되는 양 김 후보 단일화가 쟁점을 이뤘고, 김대중-김영삼- 김종필로 지칭되는 3김 시대가 출현한 때이기도 했다. 선거 결과는 우려했던 대로였다. 총 2천3백만 투표자 중 노태우 후보가 828만표를 득표하면서 당선됐고, 김영삼 후보는 633만 표, 김대중 후보 611만 표, 김종필 후보는 182만 표였다.
경북지역에서는 총 170만표 중 노태우 110만표, 김영삼 47만표, 김대중 3만9천표, 김종필 4만3천표였다.
반면 전남에서는 총 149만 표 중 노태우가 11만9천 표를 얻는데 그친 반면 김대중 후보는 131만 표를 획득했다. 김영삼 후보는 1만6천 표, 김종필 후보는 4천831표를 얻었다. 동서 간의 갈등이 확연히 표출된 선거였다.
선산군에서는 총 4만 872표 중 노태우 3만551표, 김영삼 7천222표, 김종필 후보가 1천581표를 얻은 반면 김대중 후보는 527표를 얻는 데 그쳤다.
구미시에서도 양상은 같았다. 총 7만8천 표 중 노태우는 5만633표를 얻었고, 김영삼 1만8329표, 김종필 후보가 4천664표를 얻었으나, 김대중은 3천872표의 득표에 머물러야 했다.
반면 김대중의 고향 목포에서는 역 현상이 나타났다. 총 11만6천 표 중 김대중은 10만6천 표, 노태우 6천337표, 김영삼 692표, 김종필은 283표였다.
1992년 12월 18일 실시된 제14대 대선은 노태우-김영삼- 김종필이 나선 가운데 3당 합당을 이루면서 선명성 논란이 야기됐다. 정주영 현대 회장과 수재 출신 박찬종 씨가 출마한 선거이기도 했다. 또 확고한 진보 성향의 백기완 후보가 출마해 관심을 끌기도 했다.
선거 결과 총 2천4백만 표 중 민자당 김영삼은 997만 표를 득표하면서 당선됐고, 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8백만 표를 득표하는 데 그쳐 고배를 마셔야 했다. 국민당 정주영 후보는 380만표, 신정당 박찬종 151만표, 최초의 여성 대선 후보인 무소속 김옥선은 8만6천 표를 얻었다. 무소속 백기완 후보는 23만8천 표였다.
경북도에서는 총 155만 표 중 김영삼 99만 표, 김대중 14만 표, 정주영 24만 표, 박찬종 12만 표, 백기완 1만7천 표였다.
구미시는 총 9만9천 명의 투표자가 김영삼 5만7천, 김대중 1만, 정주영 1만7천, 박찬종 후보에게 1만1천 표를 안기면서 비교적 모든 후보의 체면을 살렸다. 김대중 후보의 1만 표 득표가 눈길을 끌기도 했다.
반면 전남의 128만 투표자들의 성향은 김영삼 5만3천 표, 김대중 117만 표, 정주영 2만7천 표,박찬종 7천 표, 백기완 3천 표였다. 목포의 경우 12만 표 중 김영삼 2천5백 표, 김대중 11만5천 표, 정주영 1천4백 표, 백기완 256표 등이었다.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제15대 대선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당선이 점쳐졌으나, 김대중-김종필 씨가 연합전선을 형성하면서 이 후보에게 암울한 미래를 예고했다. 더군다나 이인제 후보의 경선 불복과 대선출마는 설상가상이었다. 진보권에서는 권영길씨가 출마해 눈길을 끌었다.
예상대로 2천6백만 표 중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1천32만 표를 득표하면서 993만 표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39만 표 차로 따돌리고 당선됐다.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는 4백92만 표를 획득하면서 저력을 과시했다. 권영길 후보는 30만 표를 획득했고, 황당공약으로 관심을 모은 허경영 후보는 3만9천 표였다.
경북에서는 총 157만 표 중 이회창 95만, 김대중 21만, 이인제 33만, 권영길 후보가 2만2천 표를 얻었다, 반면 전남에서는 132만표 중 이회창 4만1천, 김대중 123만, 이인제 1만8천, 권영길 2천1백 표였다.
당시 선거에서 구미 표심의 특정 인사에게 편중하는 현상은 보이지 않았다. 구미시갑은 8만7천 표 중 이회창 4만9천 표, 김대중 1만3천 표, 이인제 2만 표, 권영길 후보는 2천1백 표였고, 구미시을은 7만9천 표 중 이회창 4만8천 표, 김대중 1만1천 표, 이인제 1만6천 표, 권영길 1천3백 표였다. 반면 전남은 132만 표 중 이회창 후보에게 4만1천 표를 준 반면 김대중 후보에게는 123만 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인제 후보는 1만8천, 권영길 후보는 2천1백 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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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과 이명박 대통령/ 사진= 백과사전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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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제16대 대선에서도 당선이 확실시되던 이회창 후보가 고배를 마셔야 했다. 청문회 스타인 노무현 후보가 회오리바람을 일으킨 데다 막판에 정몽준 씨와의 후보 단일화는 노 후보에게 행운을 갖다주었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 임기 말, 대통령보다 입김이 강했던 이회창 후보의 패배는 유력 후보들에게 많은 의미를 시사했다.
선거 결과 총 2천 478만 표 중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1천144만 표를 얻었으나 1천2백만 표를 얻은 민주당 노무현 후보에게 56만 표 차로 패배해야 했다. 민노당 권영길 후보는 95만 표를 획득하면서 진보권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내로라하는 정치세월을 구가했던 하나로 연합의 이한동 후보는 7만4천 표를 얻으면서 현대 정치사를 떠나야 했다.
경북에서는 총 146만 표 중 이회창 1백5만 표, 노무현 31만 표, 권영길 후보는 6만2천 표를 득표했다.전남에서는 116만 표 중 이회창 5만3천, 노무현 1백만,권영길 1만2천 표였다.
당시 선거에서도 구미시 유권자들은 16만 표 중 이회창 11만3천 표,노무현 3만7천 표, 권영길 후보는 8천9백 표였다.
2007년 12월 19일 실시된 제17대 선거는 직선제 방식의 대선 역사상 1-2위 격차를 가장 많이 벌렸다. 재-삼수생들도 많았다. 이회창-권영길 후보는 3수, 이인제- 허경영 후보는 재수였다. 문국현 후보의 돌풍이 돋보인 선거이기도 했다.
이와 함께 박근혜 전 대표의 경선 패배 후유증이 영향을 끼치면서 구미 유권자들은 이명박 후보에게 도내 23개 시군 중 의성군에 이어 가장 낮은 표를 안겨주기도 했다.
총 2천 373만 표 중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1천 149만 표로 48.75를 득표하면서 617만 표(26.1%)의 득표에 그친 민주당 정동영 후보를 5백30며만 표로 따돌리는 정치적 이변을 도출했다. 민노당 권영길 71만 표(3%), 이인제 16만 표(0.7%), 창조한국당 문국현 137만 표(5.8%), 경제공화당 허경영 9만6천 표 등이었다.
경북지역에서도 몰표 현상이 뚜렷했다. 143만 표 중 정동영 9만6천 표, 이명박 1백만 표, 권영길 3만9천 표, 이인제 3천8백 표, 문국현 4만7천 표, 이회창 후보는 19만5천 표였다.
반면 전남에서도 쏠림현상이 재현됐다. 97만 표 중 정동영 75만 표, 이명박 8만8천 표, 권영길 2만3천 표, 이인제 2만3천 표, 문국현 3만1천 표, 이회창 후보는 3만4천 표였다.
구미시는 총 17만2천 표 중 정동영 1만2천 표, 이명박 11만4천 표, 권영길 4천3백 표, 이회창 3만 표, 이인제 381표, 문국현 8천2백 표였다.
이명박 후보의 구미 득표율 66%는 경북도 평균 득표율 72%에 비해 크게 믿도는 수준이었다.
*2012년 대선/ 2017년 대선은 서두에 언급
◇제20대 대통령 선거, 지방선거 전망 내년 3월 9일 실시하는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구미 득표율 23% 상회 여부가 당락을 가를 것으로 전망된다. 또 23%의 상회 여부는 3개월 후 실시하는 지방선거를 점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022년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은 장세용 현 구미시장이 득표한 40.79%를 얻을 수 있을까. 아울러 당시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의 정당 지지율을 웃도는 이변을 연출하면서 23명 정수의 시의원 중 9명, 6명 정수의 도의원 중 3명을 배출하는 제2의 이변을 연출할 수 있을까.
구미 민심의 물결이 보수와 진보, 어느 쪽을 향해 몰아칠지 두고 볼 일이다. 정치는 생물이고, 자고나면 바뀌는 것이 정치의 속성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