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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오름 정상 분화구/ 사진= 송기남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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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문화타임즈= 송기남 본지 논설위원, 제주 생태연구 운동가] 제주 공항에서 평화로를 타고 중문과 모슬포 방면으로 가다 보면 멀리 산방산이 시야에 들어오는 안덕면 동광리 원물오름과 충혼묘지가 길 오른쪽으로 보인다. 바로 원물오름서부터 서북쪽으로 일직선상에 당오름, 정물오름, 금악오름까지 4개의 오름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이곳이 이와사끼 도미오 중장이 이끄는 111사단이 주둔했던 곳이다.
이곳은 1945년 7월 12일 관동군 1만 2,000명을 끌어다가 보병 243연대. 보병 244연대. 보병 245연대로 나누어 제주의 서남쪽을 방어전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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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기남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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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박물관이 있는 한경면 청수리 가마오름 병력까지도 모두 이곳에서 지휘를 한다. 이 일대에서 보이는 모든 오름이 1개 오름 당 적게는 2~3개부터 많게는 거의 20여 개에 이르는 진지동굴을 파헤치게 된다. 7만 명이 넘는 일본군들이 주둔 한 것은 2만 명 남짓한 제주인들 사이에 길에서 돌아다니는 성인 남자는 일본군이 제주남자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젊은 남자들은 징용을 가거나 일본인 공장으로 가서 노동력을 제공해야만 했다. 땅굴을 남아있는 사람들은 땅굴 파는 노동을 쉴 새 없이 해야 했고 농작물과 가축을 공출하고 산에 나는 버섯을 공출하고 전쟁 무기를 만드는 데 쓴다고 제사 명절 때 쓰는 제기 그릇 (놋그릇)을 강제로 털어갔다.
집집마다 돌면서 놋그릇을 뺏어가니 제주 사람들 땅에 구덩이를 파서 항아리를 놓고 거기다 놋그릇을 숨겨야 할 정도였다. 그 많은 군인 장정들이 먹을 것을 바치고 주민들은 허기진 생활을 해야만했다. 그들이 마차를 끌고 다니는 도로가 큰비가 내린 후 파손될 때마다 중학생 또래의 아이들부터 여인네와 노인네들까지 총동원하여 파손된 도로를 복구해야 했다. 이들이 주둔한 기간은 농사일로 지친 주민들을 쉴 틈 없이 공출에 동원하여 쉬는 날이 없었다 한다.
그 당시 제주 사람들은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일본군의 전쟁에 의해서 일본군의 노예가 되어 일본군의 소모품으로 골병들어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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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덕면 충혼묘지와 원물오름/ 사진 = 송기남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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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작전도로 제 1 횡단 도로’
제주에는 한라산 동쪽 어깨를 넘어 서귀포로 가는 제 1 횡단 도로가 있다. 이곳을 흔히 5,16 도로"라 하는데,
이곳 제 1 횡단 도로가 1937년 일제가 군사용 도로로서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잇는 가장 짧은 도로로서 군용트럭이 지나다니기 위해 제주도민을 강제 동원해 만든 비포장도로였다. 이것이 박정희의 5,16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1966년에 내무부 장관이 김영관 제주 도지사에게 지시하여 확•포장공사를 책임지게 하여 완공하고서 5,16 도로로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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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 진지동굴 내부 천정에서 낮잠을 자는 박쥐들/ 사진 = 송기남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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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서쪽 어깨를 넘어 제주시에서 중문까지 가는 산악도로는 제 2횡단 도로로서 요즘은 1100도로로 불린다.
그리고 제주의 한라산에는 해발 600~700 고지대를 동그렇게 돌아가는 둘레길이 있는데 이 길을 하찌마끼도로라고 한다. 하찌마끼란 이마에 머리띠를 둘러맨 모습으로서 일본군들이 전쟁에 나갈 때면 빡빡 깎은 머리에 하얀 띠를 매고서 주먹을 휘두르며 왓싸 왓싸 구호를 외치게 된 데서 나온 용어이다.
이 하찌마끼 도로는 1930년대 중후반부터 일본군들이 한라산에 있는 표고버섯을 비롯한 여러 가지 임산물들을 채취 운반하기 위한 목적과 군사용 도로를 겸해서 트럭이 지나갈 만치 너비로 주민들을 동원하여 돌을 깔고 망치로 다지면서 개설한 도로이다.
일부는 훼손되어 없어지기도 했지만, 아직도 그때의 흔적들이 남아있어 일부 복원하여 둘레길로 만들어졌다.
☛다음은 108 여단 주둔지와 58군 사령부 주둔지를 소개한 것을 마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