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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특집•76주년 8‧15 (2) 제주인의 아픈 역사/태평양 전쟁과 결 7호 작전

서일주 기자 입력 2021.08.26 21:51 수정 2021.08.30 14:38

4‧3 항쟁의 성지, 제주도를 찾는 관광객
역사를 알면 ⇥아름다운 풍광과 민족혼이 아픈 역사를 만날 수 있다

↑↑ 마을에서 제주 산간으로 연결하는 군사용 도로와 오름에서 오름으로 연결하는 군사용 도로, 임산물을 채취해서 나르는 운반용 산악도로, 일본군을 위해 그 많은 인력을 동원해 피땀을 짜던 흔적들은 아직도 제주 산악지대 곳곳에 남아있다./ 송기남 운동가 제공

↑↑ 마을에서 제주 산간으로 연결하는 군사용 도로와 오름에서 오름으로 연결하는 군사용 도로, 임산물을 채취해서 나르는 운반용 산악도로, 일본군을 위해 그 많은 인력을 동원해 피땀을 짜던 흔적들은 아직도 제주 산악지대 곳곳에 남아있다./송기남 운동가 제공


[칼럼/ 송기남 제주생태 지키기 운동가 ․ K문화타임즈 논설위원] 제주도 121사단 사령부 주둔지 바리메 오름을 가본다. 진주만과 인도네시아에서 퇴각하던 일본군은 일본 본토 사수와 조선에서의 제주도를 요새화하기 시작한다.
1945년 1월 16일 마사이 요이히토 중장은 만주군 1만, 3000명을 제주도로 집결시킨다. 사령부 예하 부대로는 보병 제26연대를 한립읍 금악리에 주둔시키고 보병 제263연대는 애월읍 금덕리,보병 제264 연대는 애월읍에 주둔한다. 주둔지마다 제주의 화산 오름 능선에 땅굴을 파게 하면서 만 14세 이상 만 60세까지 노동 가능한 모든 인력이 총동원된다.

마을에서 제주 산간으로 연결하는 군사용 도로와 오름에서 오름으로 연결하는 군사용 도로, 임산물을 채취해서 나르는 운반용 산악도로, 일본군을 위해 그 많은 인력을 동원해 피땀을 짜던 흔적들은 아직도 제주 산악지대 곳곳에 남아있다.


↑↑ 송기남 제주 생태지기 운동가, 본지 논설위원


키 작은 일본군의 키에 맞춰 바닥에서 천장 높이를 파고들어 가 흙더미와 돌들을 치워 나르는 죽음의 삶, 그 고통은 미군 공습에 쫓길수록 노동 강도가 더 가혹했다고 한다. 지금처럼 안전장비를 갖추거나 복장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던 당시로써는 가장 원시적이고 열악한 조건에서 작업 중에 천정에서 떨어지는 돌덩이나 흙더미에 다쳐도 다시 일어나서 작업을 해야만 했다.

군인이 어깨에 소총을 메고 서 있으면서 감시를 하는데도 조선인 작업반장을 두어 이중으로 작업을 재촉했다. 이때 조선인 작업반장을 배치하는 것도 같은 지역민을 절대로 두지 않았다고 한다. 서로의 편리를 위해서 봐주기 하는 식을 차단하기 위한 일본인의 비인간적인 행위, 게다가 죽도록 일해서 먹는 것은 주먹밥이었다.
보리쌀에 좁쌀을 섞어 지은 주먹밥에 소금을 섞어 간을 맞추고 끓은 물에 건더기 없는 소금국을 먹게 할 만큼 일본인의 만행은 극에 달했다.

미군 정찰 비행가 제주 상공을 날아다니면 땅굴 속으로 토끼처럼 숨어들었다가 밖이 조용해지면 머리띠를 매고 나와서 주먹을 치켜들며 왓싸! 왓싸! 시위를 하던 그때 그 모습이 우습고 가련하기만 하더라고도 했다.

특히 제주 산간 둘레길을 걷다 보면 숯 가마터가 유독 많은데 이곳에서 구워낸 그 많은 숯은 어디에다 썼던 것일까? 대장간에서 칼이나 낫 등 농기구나 연장을 만들기 위해 쇠를 녹일 때 숯불이 필요했지만 일제강점기에 숯을 대량으로 생산하게 된 것은 모두 군납을 위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군들은 조선 본토에서는 석탄을 사용했지만, 석탄이 나지 않는 제주에서는 목탄을 대신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머리를 좀 굴릴 줄 아는 청년들은 군대를 면제받는 조건으로 산에 들어가 나무를 베어 숯을 구워서 군납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현역병으로 입대하지 않고 방위산업체에 근무하면서 병역을 면제받는 조건과 흡수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처럼 외세의 전쟁 속에서 희생물이 되었으며 그 전쟁을 이 땅에 끌어들인 극악무도한 일본, 지금도 그 연장선에서 우리의 운명은 미국에 위임돼 있다. 서둘러 힘을 길러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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