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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기획‧ 김천 정치史] 구미와 김천은 공동 운명체, 밀어주고 끌어주어야 할 형제의 도시

김경홍 기자 siin0122@hanmail.net 기자 입력 2022.12.12 15:26 수정 2022.12.12 15:58

구미와 김천, 정치적•경제적•문화적 동일체
구미에 토박이 버금가는 세력 형성
일화⇥ 박팔용 후보의 김태환 후보 선산시장 지원 유세가 제18대 총선 분위기 바꿨다



↑↑ 1970년대 김천시 [사진 출처 = 김천시]



12대 총선(김천시, 금릉군 ,상주군), 김천 출신 국회의원 배출 못해
여성 출신 재선 김철안, 지역언론 사장 문종두 의원 탄생시켜
‘수사관 출신이 법무장관 이겼다’유행어 만든 임인배 의원
19대 총선 이철우 현 지사 전국 최고 득표율, 이명박 대통령 축하 전화
20대 보궐, 송언석 박빙의 승부수, 최대원 후보와 표 차 493표 불과
백남억 5선(전국구 포함), 박정수 5선(전국구 포함),임인배․•이철우 3선


[김천 정치史 = 김경홍 기자] 구미와 김천은 모든 분야에서 끈끈한 연을 맺고 있다. 사실상 공동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구미 곳곳에는 김천지역 고교를 졸업한 출신 인사들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김천을 고향으로 둔 이들도 적지 않다. 1970년대 초 1산단 조성을 시작으로 구미공단이 활황기를 맞으면서 1980ㅁ년에만 해도 10만 5천 명에 불과하던 구미 인구는 1990년에 들어서면서 20만 6천 명으로 배가량 늘었다. 반면 1965년 21만 3천 명이던 김천 인구는 1990년 15만 1천 명으로 6만 명 가량 줄었다. 줄어든 6만 명의 김천 인구를 받아들인 곳이 바로 전국 최대의 국가공단이 소재한 구미였다.
이러한 인구 유출 역사에 비추어 구미에는 7만 가량이 김천 인구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당시에 전국 최대의 국가공단으로 이주해온 김천 출신들은 대부분 청운을 꿈을 품은 청년층이었고, 이들은 구미에서 가정을 이뤘다. 토박이에 견주어 강력한 세를 구축하고 있을 만큼 재구미 김천 향우회의 입김은 구미 여론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다.

이러한 공동체적 성향 때문에 구미와 김천은 정치적으로도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다. 실례로 흥미 있는 일화가 있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박근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데 이어 대통령에 취임한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총선을 앞두고 친박계를 배제하는 ‘표적 공천’을 단행했다.
이에 반발한 박근혜 당시 전 표는 계파 의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하면서‘ 살아서 돌아오라’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친박 정서가 강한 김천에서는 박팔용 전 시장과 구미을에서는 김태환 전 의원이 친박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선거 초반만 해도 지역 여론은 구미을의 친박무소속 김태환 후보와 김천의 박팔용 후보에게 힘이 실렸다. 상대적으로 한나라당 후보들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구미 접경을 넘어온 김천 박팔용 후보가 선산시장에서 김태환 후보 지원에 나서면서 재구미 김천 정서와 김천 현지 정서의 이반 현상이 일어났다. “김천에 집중해야 할 박팔용 후보가 구미에서 친박 무소속 후보를 지원하는 자세가 바람직하냐.”는 것이었다. 김태환 후보에게는 도움을 준 반면 박팔용 후보 자신은 역풍으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미묘하게 일기 시작한 민심 이반현상은 상대적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이철우 후보에게 기울었고, 양상은 이철우 후보에게 승기를 안기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게 당시 정치 상황을 지켜본 이들의 평이다.

김천은 자존심이 강한 도시다.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하다.
1949년 8월 15일, 광역시로 분할이 되기 이전 경북 도내에서는 처음으로 대구시와 함께 시로 승격된 곳이 바로 김천이다.
풍부한 역사의 토양 속에서 김천은 교육과 경제의 꽃잎을 풀어 올렸고, 그곳으로부터 잉태한 씨알들은 도내는 물론 전국에 문명의 꽃을 피워내는 종자를 제공했다.

1949년 시 승격 당시 금릉군을 포함해 19만 명에 육박하던 인구는 1960년대 들어 21만 명을 마크하면서 마의 20만 시대의 능선을 뛰어넘었다. 1965년 당시 도내 최대 인구를 자랑하던 26만 5천 명의 상주군과 자웅을 겨룰 정도였다.

그러나 제19대 총선을 목전에 둔 2015년, 단독 선거구를 유지하기 위해 김천은 인구 하한선인 14만 명 사수에 안간힘을 쏟아야 했다.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1931년 4월 1일 김천면이 김천읍으로 승격한 데 이어 1949년 8월 15일 대구시와 함께 시로 승격하면서 유서깊은 전통의 길을 걸어 온 김천시로서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천의 역사와 전통을 써온 국회의원들

1948년 5월 31일 1대 국회 출범을 시작으로 2020년 5월 30일 제21대 국회가 개원하기까지 70년 동안 김천시(금릉군)가 배출한 국회의원은 권태의, 이병관, 우문, 여영복, 문종두, 김철안, 우돈규, 김세영, 백남억(지역구 4선, 전국구 1선), 박정수(지역구 4선, 전국구 1선)), 임인배(3선), 이철우(3선),송언석 의원(재선) 등 12명이다,

같은 기간 18명의 의원을 배출한 상주시에 비해 김천이 6명 적은 12명의 의원을 배출할 수밖에 없게 된 배경에는 상주시와 김천시, 금릉군을 선거구로 2명의 의원을 선출한 제12대 총선에서 2명 모두를 상주에 뺏겼고, 백남억(지역구 4선), 박정수(지역구 4선), 임인배(3선), 이철우 현 지사(3선) 등 다선의원이 많은 반면 상주의 경우 3선은 이상배 의원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역대 김천 총선 관전 포인트
▷최연소, 지역신문 사장 출신

문종두 3대 의원은 37세에 당선됐다. 41세에 당선된 임인배 의원보다도 4년 빠른 나이에 등원한 문의원은 일본중앙대학원을 수료하고 지역언론이었던 김천시보 사장을 지냈다. 지역언론 사장과 최연소라는 두 개의 타이틀을 거머쥐는 기록을 남겼다.

▷중졸, 여성 국회의원
중졸 출신도 2명이나 됐다. 특히 중졸 여성 출신 국회의원을 배출했다는 점은 당시 시대 상황에 비추어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주인공이 바로 김철안 의원이었다. 원내 자유당 부인부장을 맡고 있던 김 의원은 47세, 중졸과 여성이라는 장애를 극복하고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재선의원의 이력을 쓰면서 정계를 떠났다.

▷백남억 국회의원
구미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김윤환, 박세직 의원이라면 김천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백남억, 박정수 의원이다. 두 의원 모두 지역구 4선과 전국구 의원 등 5선을 지냈다.
 
↑↑ 백남억 의원 [ 사진 출처 = 김천시]

2001년 유명을 달리한 백남억 의원은 1960년 민주당 소속으로 참의원에 선출돼 정계에 진출한 후 제3·4공화국 시절인 1963년부터 1979년까지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6·7·8·9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참의원까지 포함하면 5선인 셈이다. 김천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17년 동안 정치활동을 하면서 김천 정치사에 큰 획을 그었다.

이력도 화려하다. 1963년 당 정책위원회 의장을 맡은 그는 당시 길재호,·김진만,·김성곤과 함께 이른바 핵심 '4인방'으로 민주공화당 내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1970년 당 의장서리에 오른 백 의원은 1973년 당무위원 겸 총재 상임고문을 지냈다
그러나 민주당 참의원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뒤 공화당에 입당, 6대부터 9대까지 국회의원을 지낸 백 의원은 1979년 치러진 10대 선거에서는 46세의 신진 박정수 의원에게 쓴잔을 마셔야 했다.

2명의 정원인 김천, 금릉, 상주 선거구에 출마한 백 의원은 당시 3만 5,200표를 획득했다. 1위는 박정수 4만 3,319표, 2위는 장휘동 4만 2477표, 4위는 김윤하 3만 2,126표였다.

▷박정수 국회의원
10대 총선에서 아메리칸대학원 출신의 46세 박정수 후보는 4선의 백남억 의원을 누르고 김천 정치사에 새로운 물꼬를 텄다. 그러나 4선 의원을 지낸 박 의원의 정치적 행보가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10대와 11대에 걸쳐 연거푸 무소속으로 당선된 박 의원은 1985년 실시된 제12대 선거에서는 쓴잔을 마셔야 했다.
 
↑↑ 박정수 [사진 출처 = 김천시]

2명이 정원인 김천, 금릉, 상주 선거구에 출마한 박 의원은 9만 5,657표를 획득한 전두환 대통령의 동서이면서 상주 출신인 김상구 의원과 3만 3,504표를 획득한 이재옥 의원에게 2천여 표 차로 패했다, 당시 박 의원은 3만 718표를 획득했다. 결국 12대 선거에서 김천은 국회의원을 배출하지 못했다.
하지만 13대, 14대 총선에서 연거푸 당선되면서 4선의 이력을 썼다. 이어 15대 국회에서는 국민회의에 입당, 전국구의원에 당선되면서 5선 의원이 됐다.

연세대 정치학과 3학년이던 1953년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타운대를 졸업한 데 이어 1965년 부인 이범준과 함께 미국 아메리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유학파 엘리트 출신인 박 의원의 정치적 고향은 김종필 국무총리 보좌관이었다.

무소속으로 출마해 정치적 거물인 백남억 후보를 누르면서 이름을 알린 박 의원은 1996년, 2002월드컵 유치에 전념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전국구 의원직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김대중 대통령이 이끄는 새정치 국민회의에 전국구 의원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입당, 부총재를 역임했다.

하지만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1998년 3월 외교통상부 장관에 임명된 박 의원은 기자회견을 통해 '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문화 개방 및 천황의 방한을 원하신다'는 발언과 서울주재 러시아 대사관을 강제 추방하는 등의 행보로 정치적 상처를 입으면서 5개월 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결국 정치사의 한 페이지를 쓴 백남억 의원은 2003년 유명을 달리했다. 인생도 짧고 권력도 짧다는 엄연한 사실을 박 의원은 증거해 보였다.

▷임인배 국회의원
1963년부터 1996년까지 33년 동안 사실상 백남억, 박정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김천 정치사는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 1996년 4월 실시된 총선은 그만큼 지역의 최대 관심사였다.
 
↑↑ 임인배 [사진 출처 = 김천시]

후보군도 춘추전국이었다. 당시 실시된 총선에는 9명의 후보가 난립했다. 특히 한나라당 후보인 대검찰청 중수부 수사관 출신의 임인배 의원과 서울법대 출신으로서 법무부 장관,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무소속 정해창 후보의 맞대결은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선거 결과 임인배 후보가 3만 4,576표를 얻어 2만 9,831표를 얻은 정해창 후보를 4천700여 차로 누르는 기염을 토했다. 임 의원이 당선되자 언론은 ' 수사관 출신이 법무부 장관 출신을 이겼다'는 유행어를 만들었다. 9명이 후보가 난립한 선거에서 A모 후보의 경우 296표를 얻는 데 그쳐 또 다른 화제를 낳기도 했다.

세간의 화제를 뿌리며 41세라는 젊은 나이에 등원한 임 의원은 3선과 국회 상임위원장에 오르는 등 출세 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4선의 고지를 넘기는 쉽지 않았다.

▷이철우 경북도지사
18대 총선에 처음 출마한 이철우 현 지사는 김천시장 출신의 무소속 박팔용 후보와 맞붙으면서 세간이 관심을 집중시켰다. 초반에는 뒤처졌으나 선거 후반으로 오면서 역전에 성공해 당선됐다.
 
↑↑ 이철우 [사진 출처 = 김천시]

이어 19대와 20대 총선에 당선되면서 3선의 입지를 다진 이 지사는 2018년 6월 지방선거에 출마해 경북도 지사에 당선됐다.

◆역대 총선 결과
▷제1대 총선 (1948년 5월 31일- 1950년 5월 30일)

상주 갑구에서는 무소속 권태의 후보, 을구에서도 역시 무소속 이병관 후보가 당선됐다.

▷제2대 총선 (1950년 5월 31일- 1954년 5월 30일)
6‧25전쟁이 발발한 해였다. 2명의 의원을 배출했다. 대한국민당 우문 후보는 김천시 일원에서 48.6%를 얻어 당선됐고, 중졸 출신의 무소속 여영복 후보는 금릉군 일원에서 19.2%를 얻어 당선됐다.

▷제3대 총선 (1954년 5월 31일- 1958년 5월 30일)
1954년 실시된 총선에서도 2명의 의원을 배출했다. 김천시 일원에서는 무소속 문종두 후보가 당선됐다. 지역언론사인 김천시보 사장 출신의 문 후보는 37세로 역대 당선자 중 최연소였다.
금릉군 일원에서 39.6%를 얻고 당선된 자유당 김철안 후보는 김천정치 역사상 최초로 여성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기록을 남겼다. 당선 당시 47세인 김 후보는 중졸 출신이어서 관심을 더 모았다. 재선가도까지 달리는 저력을 과시했다.

▷제4대 총선 (1958년 5월 31일- 1960년 7월 28일)
4‧19 혁명으로 임기가 2년이었다. 3대에서 당선된 무소속 문종두 후보와 자유당 김철안 후보가 또 당선되면서 동시에 2명의 재선 의원이 탄생했다.

▷제5대 총선 ( 1960년 7월 29일-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 정변으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임기를 채 1년도 채우지 못했다. 김천시 일원에서는 무소속 김세영 후보가 46%, 금릉군 일원에서는 우돈규 후보가 24.5%를 얻어 당선됐다.

▷제6대 총선( 1963년 12월 17일- 1967년 6월 30일)
김천시와 금릉군 일원에서 1명의 의원을 선출했다. 민주공화당 백남억 후보가 3만 2,527표(47.1%)로 당선됐고, 재선을 겨냥했던 국민의당 김세영 후보는 2만 9,256표로 2위를 차지했다. 3선을 노리던 재선의 여성 후보 자유당 김철안, 자유민주당 김승환, 민주당 김동영 후보도 선전했지만 쓴잔을 마셔야 했다.
결국 백남억 시대를 연 총선이었다.

▷제7대 총선(1967년 7월 1일- 1971년 6월 30일)
김천시, 금릉군 일원에서 1명을 선출한 선거에는 5명의 후보가 출전했다. 민주공화당 백남억 후보는 3만 8,244(50.6%)표로 당선됐고, 신민당 이병화 후보가 3만 107표로 2위를 차지했다. 이외에도 자유당 김재곤, 민중당 김승환, 대중당 김동영, 한국 독립당 박용준이 후보로 나섰다.

▷제8대 총선 (1971년 7월 1일- 1972년 10월 7일)
김천시, 금릉군 일원에서 1명을 선출했다. 3명의 후보가 나선 가운데 민주공화당 백남억 후보가 4만 173표(54%)를 득표하면서 당선됐다. 신민당 조필호 후보는 2만 4,569표를 얻는 데 그치면서 2위에 머물렀고, 국민당 정정문 후보는 9천 685표를 얻었다.

▷제9대 총선 (1973년 3월 12일- 1979년 3월 11일)
김천시, 금릉군,상주군에서 2명을 정원으로 하는 중선거구제를 도입했다. 7명의 후보가 나선 가운데 무소속으로 상주 출신인 김윤하 후보가 4만 6980표(28.6%), 김천 출신인 민주공화당 백남억 후보가 4만 1,943표(25.5%)로 1,2위를 차지하면서 당선됐다.

▷제10대 총선 (1979년 3월 12일- 1980년 10월 27일)
전두환 정권의 쿠데타로 임기가 1년 6월에 그쳤다. 김천, 금릉, 상주 일원에서 2명을 선출했다.
이 선거에서는 6~9대에 걸쳐 4선을 고수해 온 김천의 백남억 후보가 같은 지역인 김천의 박정수 후보에게 패배했다. 결국 백 의원이 지역정치를 떠나면서 박정수 의원 시대를 예고했다.

7명의 후보가 나섰다. 무소속 박정수 후보가 4만 3,319표(24%), 무소속 정휘동 후보가 4만 2477(23.5%)로 1,2위를 차지하면서 당선됐다.
민주공화당 백남억 후보는 3만 5,200표, 무소속 김윤하 후보 3만 2,126표, 신민당 이기한 후보는 1만 5,113표를 얻었다. 이외에도 민주통일당 임재영, 무소속 이재옥 후보도 선전했다.

▷제11대 총선 (1981년 4월 11일- 1985년 4월 10일)
김천, 금릉, 상주에서 2명 의원을 배출했다.
7명의 후보가 출마했다. 10대에 이어 무소속으로 출마한 김천의 박정수 후보가 4만 9,922표(28.2%), 상주의 민정당 정휘동 후보가 4만 6,093표(26.1%)를 얻으면서 1,2위로 당선됐다. 민주공화당이 사라지고 민정당 시대가 열리던 시기였다.

▷제12대 총선 (1985년 4월 31일- 1988년 5월 29일)
⇥ 김천 출신 국회의원 배출못 해

김천, 금릉, 상주에서 2명의 의원을 선출했다.
3명의 후보가 나선 선거에서 상주 출신으로 전두환 대통령의 동서인 민정당 김상구 후보가 9만 6,567표(49.3%), 3수에 도전한 상주의 신한민주당 이재옥 후보가 3만 3,504표(17%)를 얻어 1,2위로 당선됐다. 무소속을 고집하면서 3선을 겨냥해 온 박정수 후보는 3만 718표를 얻는 데 그치면서 쓴잔을 마셔야 했다.

▷제13대 총선( 1988년 5월 30일- 1992년 5월 29일)
김천, 금릉에서 1명의 의원을 선출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동일 선거구에서 정원 1명을 유지해 오고 있다.
12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패배한 박정수 의원이 민정당 후보로 나서 5만 4067표( 63.9%)를 얻고 당선됐다. 민주당 박희동, 평민당 정정문, 공화당 조석환 후보도 뛰어들었으나 역부족이었다.

▷제14대 총선 (1992년 5월 30일- 1996년 5월 29일)
김천, 금릉에서 1명의 의원을 선출했다.
5명의 후보가 나섰다. 민정당에서 이름을 바꾼 민자당 후보로 출마한 박정수 후보가 4만 3,687표(53%)를 얻어 당선됐다. 민주당 정정문, 신정당 박휘동, 무소속 문종철 후보도 나섰지만, 차후를 기약해야 했다.

▷제15대 (1996년 5월 30일- 2000년 5월 29일)
6대부터 14대에 이르기까지 33년 동안 백남억, 박정수 의원이 주도해 온 시대를 종료시킨 선거였다. 김천 선거 역사상 최대 경쟁률을 기록했다. 김천시와 금릉군이 통합된 가운데 치러지는 첫 선거라는 의미까지 부여됐다.
또 법무부 장관 출신의 정해창 후보와 대검찰청 수사관 출신의 임인배 후보가 맞붙어 흥미를 더해 주기까지 했다.
결국 한나라당 임인배 후보가 3만 4,576표( 45.2%)를 얻으면서 2만 9,831표를 얻는 데 그친 정해창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이외에도 국민회의 공부동, 민주당 박연옥, 자민련 김한선, 국민연합 조석환, 무소속 박영우, 여인섭, 이병무 후보가 가세했으나 쓴잔을 마셔야 했다. 특히 모 후보는 296표를 얻어 역대 김천선거 사상 최소표를 얻은 기록을 남겼다.

▷제16대 총선 ( 2000년 5월 30일- 2004년 5월 29일)
김천시에서 1명의 의원을 선출했다.
3명의 후보가 나섰다. 기상청 홍보관으로 유명세를 탔던 김동완 후보에게 관심이 쏠리기도 했으나 3위에 머물렀다.
제19대 총선에서 이철우 후보가 획득한 83.5%에 이어 한나라당 임인배 후보가 역대 두 번째 최고 득표율인 4만 9,544표(75.4%)를 얻으며 당선됐고, 민주당 박영우 후보 9천 274표, 자민련 김동완 후보는 6천 925표였다.

▷제17대 총선 (2004년 5월 30일- 2008년 5월 29일)
김천시에서 1명의 의원을 선출했다.
3명의 후보가 나선 선거에서 한나라당 임인배 후보가 4만 1,686표(62.2%), 무소속 임호영 후보가 1만 6,584표를 얻었다. 열린 우리당 배태호 후보도 선전했다.

▷제18대 총선( 2008년 5월 30일- 2012년 5월 29일)
김천시에서 1명 의원을 선출했다. 4선을 겨냥해 온 임인배 의원이 낙천하면서 대신 이철우 후보가 한나라당 간판을 내세우고 나섰다. 3선 시장 출신의 박팔용 후보가 친박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관심을 모았다.
선거 중반까지 박 후보가 압승을 거둘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으나 투표함을 열면서 또 다른 이변을 연출했다. 한나라당 이철우 후보는 3만 5,933표(53.3%), 무소속 박팔용 후보 2만 9,820표였다.

▷제19대 총선(2012년 5월 30일- 2016년 5월 29일)
4만 9,909표, 83.5%라는 압도적인 득표율을 보인 새누리당 이철우 의원이 재선에 당선됐다. 민주통합당 배영애 후보는 9천894표, 16.5%를 득표하는 데 그쳤다.
특히 이 의원은 전국 선거구 중 1위의 득표율이라는 영광을 안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축하 전화를 할 정도였다.

▷제20대(2016년 5월 30일-2020년 5월 29일)
35.74%의 득표율에 그친 무소속 박판수 후보를 누르며 당선된 이철우 의원의 득표율은 64.25%였다.
2018년 경북도지사 출마를 위해 의원직을 사퇴했다.

▷제20대 보궐선거(2018년 6월 13일- 2020년 5월 29일)
2018년 6월 13일 지방선거와 함께 실시한 보궐선거에서 자유한국당 송언석 의원은 3만 9,923표를 얻어 당선됐다. 차점자인 무소속 최대원 후보와의 박빙의 승부수였다. 표차는 493표에 불과했다.

▷제21대 (2020년 6월 13일- 2024년 5월 29일)
이철우(83.5%), 임임배(75.4%)에 이어 74.5%(5만 9,993표)를 얻은 미래통합당 송언석 후보가 1만 6,914표(21%)를 얻은 더불어민주당 배영애 후보를 누fm고 당선됐다.
이외에 무소속 이상영 후보 2.17%(1,753표), 무소속 이성룡 후보 1.15%(926표), 국가혁명배금당 919표(1.14%)였다.

 


↑↑ 최근의 김천시 [사진 출처= 김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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