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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제주 4•3 연작시/ 마지막 편

김미자 기자 cloverail@hanmail.net 기자 입력 2021.11.20 20:12 수정 2021.11.20 20:18

시인•소설가 김경홍

↑↑ 제주 한라산/사진 =제주도 켑처



제5부

아들의 노래

아들의 노래 •1
- 삶의 둥지


젊은 날의 능선은
그리움으로 가는 길이고
늙은 날의 능선은
머물고 싶은 둥지다
햇살 밝은 아침
삶터로 달려가는 밤늦은 하행선
잠시
깨어보니
먼 산 마루엔 등잔불

훌쩍 달려가
안기고 싶은 마음 간절하니
이제 나도 늙어간다는 말인가

새벽마다 물병을 든 아내는
왜 능선으로 걸어 들어만 가는가
따스한 둥지 하나 마련못한
세월이 마냥 부끄럽다



아들의 노래 •2
-열여덟 딸에게


딸이 둥지를 떠났다
물어다 준 먹이를 마다하던 여리디 여린 열여덟이 저 스스로 둥지를 틀겠다며 겨울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던 그 날, 딸이 전화를 걸어왔다.

딸을 만나러 가는 길에는 눈이 쌓여있었다. 길 없는 길 위에 앞서거니 뒷서거니 흩어진 발자국, 하필이면 이 겨울에 둥지를 틀겠다고 나선 것일까.

내게도 열여덟이 있었다. 밤늦은 산간을 넘나들어 들창문을 두들기던 어머니,
따라온 어린 동생은 손 떼 묻은 대추 알 몇 개를 쥐여주며 멀뚱멀뚱 방을 나섰다.
가고 없는 어머니가 능선 너머 아련한 장년

김치 몇 조각과 식은 밥, 딸은 가난한 재료로 둥지를 틀고 있었다. 한기가 스멀스멀 기어들어 오는 작은 공간에는 적어놓은 꿈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열여덟에 만난 어머니도 적어놓은 내 꿈을 읽으며 되돌아섰을까.

밤길을 걸어온 달이 새벽 속으로 멀어져갔다. 새벽 햇살이 비친 눈길에는 화양목 몇 그루, 까치가 둥지를 틀고 있었다. 지천의 냇물이 강가로 스며들고 있었다. 아련한 능선들이 산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외로운 것들이 일어나 고운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아들의 노래•3
-미워마라 미워할수록 그 대는 외롭다

함께 가는 것이 삶이다
미워 마라 떠나고 나면
남아있는 것은 외로움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는 것이 삶이다

붙들어도 헤어질 인연들이다
미워도 미워한다고 말하지 마라
막상 떠나보내고 나면
가슴이 으스러지도록 그리워해도
한번 떠난 인연은 돌아오지 않고
멀리 뒷모습만 남을 뿐이다

미워 마라
사랑할수록 그대 가는 길 위에
내가 있고
내가 가는 길 위에
그대가 있다

사랑을 마주 주기에도
짧은 것이 생이다


아들의 노래 •4
-천변 청개구리


울음인 줄 몰랐습니다
파랗게 물이 오른 음계를 밟고 오는
목이 잠긴 노래는 얼마나 그윽한 향수이던지
가만히 귀 기울이면
오랜 기억의 골목 어귀에 앉아 있는 어머니
아련히 떠오르다 사라지곤 했습니다

천변에 뿌리를 치면서
그것이 울음인 줄 알았습니다

물살의 힘이 닿지 않은 저 안전한 지상에
몇 개의 기둥을 세워 집을 지을 수는 없는 것일까.
허공으로 날아오른 청개구리의 꿈이
물거품처럼 꺼지는 천변

내 생이 시작된 그곳에서
나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도
그와 같았을 것입니다


아들의 노래•5
-비누에 대하여



어울려 살아가려면
아침저녁으로 지그시 두 눈을 감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며
늙은 어머니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우쭐해 보이고 싶지만
몸을 낮출 줄 알고
때로는 두 손을 비빌 줄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복받치는 눈물을
억누를 줄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때로는 쓴맛을 맛보아야
단맛의 의미를 알고
단맛과 쓴맛을 알아야
세상사는 법도 안다고 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그는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 갔습니다
어울려 살아가려면
스스로 조용히 작아 주어야 한다는
의미를 타이르기라고 하듯


아들의 노래 •6
- 꽃 앞에서


꽃이 필 때 영영
피어있기를 바라지마라
꽃이 질 때
아쉬워도 마라
내 곁은 떠난 그대
내게로 돌아오고
내 곁에 있는 그대
때가 되면 떠난다

그대여
꽃이 피어있을 때
피어있는 꽃에 집착하지 마라



아들의 노래•7
- 어머니의 눈물


우리 서로 마주 앉아 있었네
얼마 후 나는 사라지고
꽃 한 송이
홀로 남아 한들거리고 있었네
멀리서 슬픈 소식 들려와
꽃 한 송이 눈물 몇 점 떨구고 있었네
꽃의 눈물이 아름다워
잠시 그 속으로
내가 빨려 들어간 것이었네


아들의 노래 •8
-해바라기의 꿈


내 근본은 어둠이었다
저세상은 그토록 밝은 날인데
내가 사는 세상은 이토록 어둠일까
어린 시절
어머니는 흙 묻은 손으로
움츠린 내 어깨를 다독이고
물 젖은 손으로 아버지는
움트는 꿈을 적셔주었다

오늘 내가 가까스로 지상에 자리를 잡고
그나마 남들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어둠이 나를 길렀기 때문이어서
오늘도 온종일 어둠을 찾아
햇살 속을 헤집고 다녔다


아들의 노래•9
-귀성 열차


바늘귀에 실을 꿰어달라던
눈먼 어머니
객지로 나가는 아들이
마냥 안쓰럽던 어머니가
호롱불 밑에서 터진 양말을
깊던 그해
그동안 무엇을 위해 살았으며
지금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깨어보면 스쳐 지나는
깊은 산에 불빛 한 점
내리고 싶은 곳에서
내릴 수 없는 것이 중년이다



아들의 노래 •10
-고갯마루 어머니


의붓형을 팔고 오는 고갯마루
자주 뒤를 돌아보는 어린 아들에게
쌀 포대를 머리에 인 어머니는
다가서면 멀어지는 것이 사랑이라며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다가서면 다가서는 것이 사랑인줄 알았을 때
내게서 떠난 사랑은
길을 간만큼 멀리에 있고
떠나온 나는 걸어온 만큼
아득히 멀리 와 있습니다

때로는 거짓이
아름다운 사랑임을 알았을 때
눈시울 붉히던 어머니는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노래 •11
-재회 (아버지와 어머니)

화사한 햇살이 내리는 일요일 정오
도서관에 들른 노부부
젊은 연인들이 줄지어 서 있는
자판기 앞에서
뽑은 커피를 마시며 미소를 주고받습니다
오랜 세월이 달인 사랑의 맛이
얼마나 달콤한지 보여주기라도 하듯

커피를 마시며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아들의 노래 •12
- 누이



꽃다운 내 누이
수술 날짜 적혀있는 철쭉 피는
4월
마냥 푸르를 것 같은 초록 잎
몇 잎이 고운 이 봄날에 지고 있습니다
새잎은 돋아나고 또 푸르러 가는데
하필이면 이때
초록 잎 한두 개 떨어지는 것일까
왔다가 가는 길은 한결같다지만
누이는 그것도 아픔이라고
떨어져 누운 초록 잎 한 잎
깊게 품어 안아 울고 있습니다

땅이 되어 눈물 받아들이고 싶은
4월
어머니를 닮은 누이


아들의 노래•13
- 연좌제


아버지는 늘 술의 힘을 빌렸습니다
타박타박 밤길을 걸어온 어머니의 품삯이
삼거리의 주점에 들어서면 깡 소주에다
4•3 이야기

앨범을 넘기듯 어머니는 장부를 넘기며
외상술값을 갚곤 했습니다
고독이 얼마나 깊었길래
쏟아부어도 외상 술값은 그대로였을까
술없이 살 수 없다던 아버지는
술의 힘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부에는 지금도 외상값이 남아
밤길을 걸어온 내 품삯이
삼거리의 주막으로 타박타박
걸어 들어갑니다


아들의 노래•14
-주름살


아내에게
따스한 손길 한번 내민 적이 없었네
무겁게 가라앉은 내 마을 건져 올리려고
낙도처럼 외로운 아내는
아, 밀려오는 세파를 삼키고 삭이느라
안간힘을 쏟았겠구나



아들의 노래•15
-사랑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더라

사랑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더라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살다 보니
사랑은 눈앞에 있는 것이더라
사랑은
장롱 속에 들여놓을 것이 아니더라
꺼내놓고 물 쓰듯 쓰는 것이 사랑이더라

물 젖은 아내의 손을 꼬옥 잡아주고
퇴근한 남편의 등을 다독여 주는 것이
사랑이더라
살면 얼마를 더 살고
누리면 얼마를 누리겠나
사랑은 아주 가까이 있는 것이더라

마시고 싶은 술을 덜 마시고
보고 싶은 텔레비전을 덜 보면서
밥상이나 찻잔을 마주하고 앉아
귀 기울여주는 것이 사랑이더라

살다 보니 그렇더라
잘 살지는 못했지만 살아보니
사랑은 마음먹기에 닫려있더라
많은 돈은 없지만 있는 만큼 나눠갖고
불편할지언정 오순도순 자리를 펴고 앉아
지내는 것이 사랑이더라

외로워마라
사랑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더라
그러므로 외롭다고 생각 마라
사랑은 아주 가까이 있는
이웃사촌 같은 것이더라



해설

아버지의 긍정에서 출발한 서사적 서정성
-제주 4•3의 슬픈 흔적, 사랑으로 승화

김관후(시인, 평론가)



1


김경홍 시인의 시는 아버지의 긍정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가 긍정하는 아버지는 남다르다. 김 시인과 아버지는 제3세계 민초가 겪어야 하는 강대국의 논리에 의한 희생자이며, 분단이라는 아픈 역사가 잉태한 이단자이다.
아버지는 자의든 타의든 정통을 파괴하고 역사의 이단을 선택한다. 옛날의 그리스인처럼 하이레스시를 선택한 것이다.
김 시인의 장편 서사시는 바로 하이레스시가 아버지의 그늘에 서는 과정이다. 시인은 이단자의 자식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주홍글씨를 가슴에 달았으니 아들도 주홍글씨를 달고 살아야 할까. 그 주홍글씨는 분명 분단이 낳은 매카시즘의 결과이다. 아무튼 김 시인의 가족사는 이단사이며, 그 이단사가 오히려 진한 감동을 자아내면서 정통사에 진입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2

김경홍 시인은 1994년 계간 문예지 자유문학과 한라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소설과 시 두 분야에 걸쳐 한국 문단에 이름 석 자를 올린다.
시 데뷔작은 ‘귀향길’, ‘수렵장 마을에서’, ‘ 어머니의 노래’ ,‘한라산 철쭉꽃’ 등 다섯편이며, 소설 데뷔작은 ‘마지막 유산’이다.
모두가 제주 4.3 사건으로 말미암은 제주섬 사람들의 역경을 노래한 것들이다.
시인은 ‘귀향길에서’ 그 사연 밝혀도 될까/ 단 한 번만이라도/ 쌓이고 맺힌 세월 도려내/ 아버지의 무자년을 밝혀도 될까/라고 노래하면서 제주 4.3 사건을 작품 전면에 등장시키기로 독자와 약속한다.
당시 신경림 시인과 임헌영 평론가 등 심사위원들은 ‘제주 4.3 사건의 정신을 담은 역사 의식의 시’라고 평했다.

데뷔 당시의 약속처럼 김 시인은 자신의 가족사, 수많은 제주인들이 겪었고, 아픔을 겪고 있는 재주 4.3 사건의 아픈 역사를 서사적인 서정시로 다듬어 독자의 닫힌 가슴을 두드리게 했다.
과연 김경홍 시인의 시는 제주섬이 예언이 될 수 있을까. 그의 시는 가족사를 뛰어넘어 제주사, 그리고 한국사의 한복판에서 절규할 수 있을까. 저 넓은 우주의 온갖 생명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시인은 이단자의 아버지를 긍정하면서 아버지를 위한 애절한 시를 쓰면서 독자에게 질문하고 있다, 오히려 아버지를 시인이 되게 하면서 자신을 노래하고 있다.


3

김경홍 시인의 시는 아버지가 화두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비극의 가족사를 엮어가는 주인공이다. 가족은 제주섬의 여느 가족과 마찬가지로 입산해 한 맺힌 불행의 씨앗을 낳게 하는 등 광기와 폭력의 극치인 역사의 현장에 써 내린 아버지의 질곡의 세월, 그 자체였다.
섬은 이미 죽음의 땅이었다. 오름마다 봉화가 타오르고, 결혼한 지 일 년 만에 야학선생이던 아버지가 한라산으로 피신하면서 연작시는 전개된다. 어머니는 한 살짜리 소아마비 딸과 함께 대대손손 살아온 고향을 떠나 피신하다가 붙들려 심한 고문 끝에 전향서와 이혼각서를 쓰고 조부모를 학살한 토벌대와 위장 결혼한다. 산사람이 된 아버지는 죽음의 땅에서 죽음을 피해 다니면서 산을 품어 안고 이데올로기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비극의 역사 현장에서 순결을 벗어 던져야만 했던 어머니는 바로 이념 논리가 한 인가, 한 시대를 어떻게 파멸시키는가를 적나라하게 실화를 통해 고발하고 있다.

바닷길은 우리의 몫이 아니었다. 해변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섬이 돌아 앉아 바라보는 산은 사랑하는 당신이었다.
그리운 어머니였다.
바라다보면 볼수록 가슴을 울리는 가고 없는 어머니를 닮은 산.
그리워 살 수 없고
그리움을 버리고도 살 수 없는
열여덟 꽃다운 시절
산길마저 우리의 몫이 아니었다.

-한라산•1 중에서-

사랑의 추억을 산속 깊이 묻어둬야 하네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고개 넘어 산속에 파붇어 둬야 한다네
이제 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가고 없는 그이를 원망해야 하나
엄연한 불륜 앞에서
어디까지나 살아남기 위한 조건이었다고
가슴을 쳐야 하나

섬 세상은 살아남기 위해
사랑의 삶을 버리라고 하네
사랑의 삶을 버리고
짐승의 삶이라도 살라고 하네

살아남은 것이 부끄러운 날
세월은 눈물을 몰아 흘러갔네

-귀향•4 중에서-


8년여의 도피 생활을 끝내고 아버지는 자수하고, 반공 강연에 나선다. 그리고 토벌군인과 사이에 아들을 낳은 어머니와 재결합한다. 전 재산을 뺏긴 아버지는 사상범이라는 낙인을 피해 가족과 함께 고향 저문동을 떠나 화전촌으로 이주한다. 결국 이 와중에서 성씨 다른 아들은 양자를 들게 되고, 소아마비 딸은 세상을 뜬다.
가족은 또 화전촌을 떠난다. 이때 가족은 2남 2녀였다. 우리 민족사에 쓰여진 아픈 역사의 흔적이 아닐 수 없다.

산간에 눈발 흩날리고
삐라 뚝뚝 떨어진다
날아오르는 종달새야
내 죄명은 무엇이더냐
전향하면 살려준다는 통첩이
살아남아 부끄러운 목숨을 적신다.

- 하산•1 중에서-

몸부림치면 칠수록 빠져드는
늪 속 같은 시대
맥 풀려 돌아오는 저물녘이면
빈쌀독 긁는 소리
올레길 정낭에는 빚문서가 버티고 있었네
뿌리째 흔드는 가난과
멀미에 겨워 떠난 식구들
밤이면 어둠 속에 움츠려
떠오르는 햇살을 두려워했네

-이별에 대하여•3 중에서-

천서동을 떠난 가족은 감귤단지를 떠돌며 한 시대의 모순과 극복의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한다. 아버지는 종종 기관으로 끌려가고 형제들은 사상범의 자식이라는 세간의 삿대질에 오히려 순종하면서 사랑의 가치관을 깨닫게 된다.
안타까운 것은 억지 이념 논리의 희생자가 됐던 아버지가 농약 살포기에 다리를 다치면서 품삯로 연명해온 가족의 삶에 더 큰 먹구름이 드리우게 되었다는 점이다. 제주 4.3이 비극은 당시로써끝난 것이 아니라 가도 도 황톳길 같은 고행의 연속이었다는 것이다.

학교길의 아들은 무사할까
가는 길은 눈물에 가려 보이지 않고
온전한 데가 없어질 때까지
망가진 것이 내 생애인데
아들은 무사할까
돌아보면 주체할 수 없어 토해내던
악몽의 취조실과
양은 대야 구겨지듯 울음 삼키던
오일장 선술집


- 떠도는 자의 노래•2 중에서-

불구의 다리와 만성 폐결핵
목발을 짚고 먼 산 바라보네
세상에 쩣겨도 내달릴 수 없는 몸이여
그대들과 섞이기에는
너무 깊은 병
내 몸에 흐르는 급조한 좌익의 피
악몽도 세월의 옷을 입고 나면
그리운 법인가
목발을 짚고
가을 산 바라보네

- 떠도는 자의 노래•3 중에서-

아버지가 황혼기를 맞으면서 우리 시대의 비극인 이념은 가족들을 역사의 변두리로 밀어냈다. 불치의 병을 앓기 시작한 어머니는 오히려 아버지의 아픔 때문에 더 괴로워했다. 만성 폑셜핵을 앓던 아버지가 다시 술을 찾으면서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긴박한 상황 속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같은 해 한 많은 세상을 떠난다. 이념과 사랑, 사랑으로 파장하는 이 시대의 구조적 비극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가.

일 년만 더 머물러 있게 해 주십시오
때가 되면 피었다가 지는 꽃잎처럼 한번은
넘어야 할 저승 문턱이지만
되돌아올 수 없는 것이 죽음이어서
저승으로 기우는 시간이 안타깝습니다

평생을 움츠려 지낸 당신
일면만 머물러 있게 해 주십시오
타락한 육신이지만
저승에서 썩게 마시고
당신에게 바치도록 해 주십시오

- 삶이 그리운 날 •5 중에서-

그 자리가 보기가 참 애처롭습니다
햇볕 한점 들지 않는 축축한 음지에서
살아온 당신
오늘은 만성 폐결핵입니다
한 세기가 흘러가고
한 청춘이 흘러가고
어느덧 그 자리에 백발이 무성합니다
온 세상을 토해낸 하룻밤을 지나
아침에는 문득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설 수 있다는
간절한 소망
그리하여 당신은 없는 힘을 쥐어짜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 짧은 삶 깊은 슬픔•4 중에서-

4

김경홍 시인은 가족사를 차용해 역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 태도가 너무 겸손하다. 문학에서 만일 이 시대의 사명이 있다면 죽음의 땅 제주섬에서 시는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는가.
문학은 이에 대해 준비돼 있는가. 문학은 제고품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문학이 밀려나는 과정에서 시가 할 수 있는 역할은 과연 무엇인가. 시는 섬의 고통에 대해서 타당성을 잃어버린 것일까.
김경홍 시인은 죽음의 땅을 사랑으로 어루만지고 있다. 성인이 된 세계에서 시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돈키호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날 선 펜을 든다. 시가 나가야 할 행태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김경홍 시인은 4.3으로 인해 창조는 신의 권능을 표출하는 데 실패했다고, 역사의 지배는 전능자의 그것이 못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변방의 섬이 악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것은 그로 하여금 전능한 창조자를 의심케 한다, 수많은 사람이 섬 곳곳에서 학살당하지만 신은 침묵을 지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직접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시 구절구절이 더 철저하다. 이것이 김 시인의 매력이다. 그가 보들레르와 같이 가장 단순한 대답인 ‘ 하나님은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인간을 사랑한다면 희망이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문학이 변두리로 물러나고 있다. 이런 시대에 개인주의적이고, 추상적 사실로써 문학은 거부되어야 한다. 인간을 위해서 낮아지고 고난과 고통을 받는 사람의 편에 선 문학, 고난과 고통에 참여하는 시를 제창해야 한다. 죽음의 땅 제주섬을 문학의 한복판에 편입시켜야 한다.

5

과거의 언어는 압도적으로 실전이지만 오늘의 언어는 압도적으로 희망적이어야 한다. 희망의 문학은 역사와 사회, 정치적 책임성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출애굽기 사건에서 그 시발점을 찾아야 한다. 에게 바로 에소더스의 문학이다.
문학은 단순히 사회가 요구하는 개인적 실존으로부터,개인적 구원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떠난다는 것은 도피가 아니라 사회를 이끌고 가나안을 향해가는 올바른 문학의 방향이다. 제주인이 염원하는 가나안은 이어도다. 이스라엘이 바라던 것처럼 지리적, 공간적이 아니다. 섬에서도 에소더스는 시간적이다, 여기 지금, 이곳을 이어도, 새것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곳에 희망이 도사린다.
김경홍 시인은 그가 겪은 가족사의 고통을 극복하면서 그를 옭아 묶어놓은 역사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사랑의 인식으로 전환하면서 새로운 존재의 세계로 나가고 있다.

나로 말미암아 괴로운 사랑을 버린다면
사랑이 아닙니다
저주한 사람들을 나 또한 저주한다면
그 또한 사랑이 아닙니다.
노을이 내리고 달빛이 내릴 때까지
괴로운 사랑을 기다립니다
귀 기울이면 산 넘고 들지나
발목을 지르고 가슴을 질러
달려오는 이별의 종소리

- 삶이 그리운 날 •8 중에서-

6

김경홍 시인은 경직된 이데올로기를 낮은 목소리로 거부한다. 예리한 독자라면 그 언어 내면에 숨겨진 칼날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찢어진 가족사를 치유하기 위해 사랑이라는 칼날을 들고 예리하게 꿰매나가고 있다. 이는 바로 아프고 시린 역사를 가슴에 안는 일이며, 분단 한국의 하나 됨을 향해 나가는 길이다. 그는 연좌제라는 족쇄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치지 않았다. 아버지가 체험한 다양한 스펙트럼은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이념과 선택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화두를 아버지로 선택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개인의 아버지가 아니라 아파하며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들의 아버지다. 아버지는 보통명사가 되어 그 모습을 신선하게 드러내고 있다. 시인이 아버지를 찾는 일에는 고통이 전제된다. 섬을 짓누른 거대한 우상과의 화해에 앞서 우상으로부터 확실한 용서의 언어를 받아내는 일이 중요하다. 우상은 섬의 모든 아버지를 통해 통곡으로 용서를 빌어야 한다.
시인은 섬사람의 아픔을 싸매고, 치료할 수 있어야 한다. 김경홍 시인은 굴종을 택하고, 굴종의 아름다움을 택하고 굴종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찾아 나섰다, 우리의 삶을 통해 용서하고 용서받은 것처럼 고귀하고 아름다운 일은 없다.
김 시인의 임무는 그 일을 위해 매진하는 것이다.

떠나셨지만 당신은
뒷골목 곳곳에 계시네요
소금 섞인 물은 이미 물이 아니 듯
이념이 섞인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어서
서러운 당신은 여전히
제주섬에 연명하고 있네요

- 짧은 삶 깊은 슬픔•11 중에서-

◇시인 김경홍
1984년 백록문학상 (시 부문) 당선
1994년 계간 문예지 자유문학 신인상(시 부문) 당선
1994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필명 김군산) 당선
한미 대표 시인선집 작품 발표
한국청년대상 본상 수상(언론 부문)
문화타임즈 대표• 발행인
시집
<사계의 바다>, <인동꽃 반지>, <그리운 것들은 길 위에서 더욱 그립다>, <사랑은 먼데 있는 것이 아니더라>. <미워할지라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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