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라산/ 제주도 켑처 |
제주 4.3 연작 서사시 6/ 사랑할지라도 미워마라
제 4 부
방랑과 이별
황혼기를 맞은 1990년부터 제주 여성은 병마와 싸워야 했다. 술 없이 살 수 없던 여성의 남편 역시 만성 폐결핵의 앞에 주저앉아야 했다.
결국 1994년 제주 여성과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성씨 다른 30대의 아들이 세상을 떠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민주화 운동이 확산하면서 제주 여성이 낳은 자식들은 시류 속으로 뛰어들었다.
삶이 그리운 날 ․ 1
-1992년
길에 대하여
더 나은 행선지에 대하여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감시망과
이념의 올가미
엊그제는 누구와 만났으며
어제는 또 누구와 헤어졌는지
돌아볼 겨를조차 없었다
지명수배 전단이 싸락눈처럼 쏟아지고
뒷골목을 배회하는 아들과
거리마다 출렁이는 정보망은 언제나 두렵고
품삯을 떼이고 오는 아내의 처진 어깨가
절망보다 깊은 어둠 속에 주저앉을 때
길에 대하여
더 나은 살길에 대하여
생각할 수 없었다
사랑에 대하여
말할 수 없었다
삶이 그리운 날 ․ 2
-산간 토굴
수풀이 우거진 야산의 토굴에서
내 이십 대는 숨어지내야 했다
생사를 넘나들며 음식을 갖다주던 외할아버지와 아버지
마을 사람들
그들 또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몇 년 만인가
60여 년의 생애가 찾은 토굴
20대의 고독이 고사리 넝쿨에 얽혀 고스란히 남아있다
세월을 흘러도
토굴을 지켜선 멀구슬
나뭇가지에 칡넝쿨을 얹혀놓으면
그들에겐 내가 살아있다는 표시였고
이웃들은 한 줌의 식량을 건네주고 돌아섰다
토굴 앞에 앉아
분신과 물고문을 당했다는
꾸겨진 신문을 읽어내린다
남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동안
나를 위해 살아온 삶이
가을 하늘 아래 부끄럽다
삶이 그리운 날 •3
- 떠나는 아들
세상이 왜 나를 버렸나
나를 낳은 아비는 누구인가
어미는 왜 나를 버렸나
왜 나는 성씨 다른 30대로
생을 마감해야 하나
하늬바람이 서걱이는 나지막한 오름
세상이 나를 눕혀놓네
불륜이 낳은 이단아
세상은 나를 그렇게 불렀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네
한 줄기 바람으로 떠돌다
한 점 눈물로 사라지는 내게도
누울 곳이 있었나
온종일 주저앉아 눈물 쏟던
내 어미가 아련한 능선 마루
낮게 흐느끼는 울음이 억새 숲을 타고 밀려와
나를 덮네
어서 내 곁을 떠나다오
나를 낳아 얻은 죄
한 삽 한 삽 퍼 놓고 부디 돌아서다오
섬길 돌아들어 포구 들어서면
봄 햇살에 수평선이 가늘게 떨리던 해변가
머지않아 나를 낳은 아비가 온다는 말은
거짓이었네
원망하지 않겠네
나를 위해 울어주는 어미가 있으니
외롭지 않네
세상 떠나는 길이 외롭지 않네
삶이 그리운 날 •4
- 불치병
세상에 머물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나의 진단 결과를 받아든 남편은 소주병을 사 들고 왔다. 하얗게 늙은 생애 저 멀리 붉게 물든 한라산.
20대 남편의 고독한 생애가 묻혀있는 그곳, 재회한 40여 년의 세월은 아픔을 물고 흘러갔다.
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남편, 누구의 등에 기대어 살아간단 말이냐
이대로 떠나란 말이냐
사랑하는 당신을 홀로 남겨놓고
어떻게 떠나란 말이냐
문드러진 하치장의 오물처럼 몸은 병들어도
몸속에 흐르는 사랑만큼은 여전히 곱고
싱싱하다고 위로해야 한단 말이냐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없구나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배신한 몸
사랑한다는 말을 차마 전할 수가 없구나
삶이 그리운 날 •5
-병원을 나서며
일 년만 더 머물러 있게 해 주십시오
때가 되면 꽃잎이 피고 지듯 한번은
넘어야 할 문턱이지만
저승으로 기우는 몸을 일으켜 세웁니다
평생을 움츠려지낸 당신
일 년만 머물러있게 해 주십시오
타락한 육신이지만
저승에서 썩게 마시고
당신에게 바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삶이 그리운 날 •6
-12월 오후 일터에서
수평선 넘나들어 수시로 여객선은 떠오르는데 서울 간 큰 놈은 소식이 없고, 한라산 너머 최루탄 가스 피어오르는데 간밤에 나간 작은 놈은 소식이 없네.
남편의 낡은 기침이 어둠을 재촉하는 노을 녘, 저무는 한라산 바라보네
한라산 붉은 단풍 떨어낸 12월 산바람
가슴 깊은 계곡에 몰려들어
서둘러 떠나자고 재촉하네
애원해도 옷깃을 부여잡네
감귤원 멀리 수평선엔
그리움 짙은데
가고 나면 이불속 깊이 움츠릴
남편의 낡은 기침
어쩌란 말이냐
삶이 그리운 날 •7
- 낙엽
기다림은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바람 불면 부는 대로 살아온 날이
원망스럽습니다
애타는 그리움으로
그대를 만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흩어지고 부서져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리움은 몸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었습니다
매달려 바라보는 기다림이 허망한 섬
나를 버렸을 때 기다림은 내게로 다가와
사랑의 생명으로 자라나는 것이었습니다
육신이 부서지기 시작했을 때
당신은 가까이 다가왔고
죽음으로 다가섰을 때
비로소 당신을 끌어안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삶이 그리운 날 •8
- 종소리
나로 말미암아 아파하는 사랑을 버린다면
사랑이 아닙니다
아프게 한 이들을 저주한다면
그 또한 사랑이 아닙니다
노을이 내리고 달빛이 내릴 때까지
사랑을 기다립니다
귀 기울이면 산 넘고 들판 지나
발목을 지르고
가슴을 질러
달려오는 이별의 종소리
짧은 삶 깊은 슬픔•1
- 비행기를 타고 오며
병상에 누운 내게로 온 오라버니 버선을 신기네
버선을 신고 먼 길 부디 잘 가라고
눈시울을 붉히네
아들이 돌아서서 흐느끼네
나를 닮아 눈물 많은 큰딸이 울부짖네
병원문을 나서는 나를 울려놓네
산 넘고 바다 건너
멀고 먼 세상, 서울까지 와서
죽음을 확정 짓고 돌아가네
겨울이 가고 있네
한라산 능선 너머 봄날이 오고 있네
오는 봄날에는 이 죄인을
세상 밖으로 밀어 내리라
오랜 슬픔
산화하리라
짧은 삶 깊은 슬픔 •2
- 말 없는 당신에게
그날이 그립습니다
산 넘어 산속으로 멀어져 간
당신의 20대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납니다
당당하게 걸어 나가지 못하고
뒷골목 맴도는 당신
담배를 태워 문 말 없는 고독 멀리
능선에 엎드린 당신이 아련합니다
열여덟 꽃다운 시절
눈시울 붉히던 사랑은 언제나 엊그제
한라산 바라보는 늙은 당신
짧은 삶 깊은 슬픔 •3
- 마지막 품삯
새벽 산길을 헤칩니다
능선 너머 당신의 이십 대는
세월이 흘러도 그리움입니다
돌아보면 황량한 바람 몰아치는 산간 벽촌
낡은 기침 감춰 누운
당신의 육십 대가 외롭습니다
사랑했지만
사랑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육신을 도려낸 지난 가을
몸속에 흐르는 불륜의 세월을
도려내 달라던 내 간절한 소망은
허망한 것이었나요
당신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었던
열여덟 꽃다운 시절
천근만근의 슬픔으로 누워있는
당신의 고독을 끌어안고
새벽 산길을 오릅니다
아스라이 매달린 목숨을
한 잎 한 잎 떨구고 난 후에도
당신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요
병든 내 육십 대
열여덟 꽃다운 시절을 찾으려고
곡괭이를 찍어냅니다
짧은 삶 깊은 슬픔•4- 아침 밥상
그 자리보기가 참 애처롭습니다
햇볕 한점 들지 않는 축축한 음지에서
살아온 당신
오늘은 만성 폐결핵입니다
한 세기가 흘러가고
한 청춘이 흘러가고
어느덧 그 자리에 백발이 무성합니다
온 세상을 토해낸 하룻밤을 지나
아침에는 문득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설 수 있다는
간절한 소망
그리하여 당신은 힘을 쥐어짜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자리보기가 서럽습니다
꼭 한번 화사한 햇살로 만나고 싶은데
돌아서면 고독한 세월
지금은 눈물의 샘마저
바작바작 말라 들고 있습니다
밥상을 마주하고 앉을
용기가 없습니다
참 미안합니다
짧은 삶 깊은 슬픔•5
-세상에 대하여
헤어짐은 관행이었다
자고 나면 눈더미처럼 내려 쌓인
강제규정
체포명령장과 강제구인장
서류뭉치에 손도장을 누르며
연인들은 눈물을 흘렸고
사랑은 사치였다
살려면 죽은 척 엎드려 지내라고 했고
반기를 들면
행방불명이 됐다
사랑은 오래가지 않았다
만남과 헤어짐은 연인들의 몫이 아니었다
짧은 삶 깊은 슬픔•6
- 마지막 부른 노래
1
형벌은 가혹했네
형틀을 이고 사는 당신이 안쓰러워
세상 몰래 옷깃을 적셨네
들판을 지르고
산길을 가로질러
모기떼처럼 달라붙은 야유와 멸시
2
한라산에 새싹이 짙푸르네
세월은 추억을 지우며 떠나지만
해마다 세월은 새순을 물고 돋아나
당신은 여전히 그리움을 움켜쥐고 엎드려 있네
화사한 봄날
뭍으로 떠난다는 아들아
배행기 표를 내미는 며느리야
잘 살거라
머지않아 다시 만나자며
꼬옥 끌어안는
낙엽 같은 아내여
멀리 수평선에 떠오르는 조각배 한 척
열여덟 꽃다운 시절
아내의 사랑이 그립네
머지않아 다시 만나자는
가을 이파리여
짧은 삶 깊은 슬픔 •7
-세상 풍경
통금령은 해제되고
단발령은 사라졌지만
무엇이 달라졌느냐 우리는
하루 세끼에 쫓겨 허겁지겁 달려왔고
예비군 교육 시간과 군 복무 시간은 단축됐지만
선술집에서 정치를 논하고
실컷 금지곡을 부를 수 있지만
무엇이 달라졌느냐 우리는
고기떼처럼 그물에 갇혀있고
미국과 중국을 넘나들기가 새처럼 자유롭고
러시아도 다녀올 수도 있지만
무엇이 달라졌느냐 우리는
휴전선 넘나드는 새 떼를 부러워했고
지옥보다 더 어두컴컴한 취조실에서
몇 날 며칠 피를 말리던 고통은
아직도 잔설처럼 남아있고
멍든 가슴으로 살아가는
세상
무엇이 달라졌느냐
떠나기로 했다
일 년 내내 꽃샘추위가
상처를 파고드는 땅
악몽의 한기가 으슬으슬 속살을
후벼파는 땅
무엇을 더 바라겠느냐
편히 누울 수 있는 저세상으로
떠나기로 했다
짧은 삶 깊은 슬픔•8
- 떠나가는 아내
한 시대의 아픔을 거두어 떠나는
아내여
돌아보면 짓밟는 일은
이 세상의 관습
무슨 미련 남아 두 손을 내밀겠느냐
살고 죽음이 어디 우리뿐이랴
깊은 한숨 몰아쉬며
못다 한 사랑 이어 메고
정든 골목 나서는
아내여
떠나보낸 후에는
따스한 밥 한 상이 그리워 울었고
깊은 밤이면
머리채를 움켜쥐고 흐느꼈네
미련이 남을 때
사랑은 더욱 아름다운 것
못다 한 사랑 이어매고 떠나는
아내여
세상과 결별은 내게
또 다른 기다림이네
짧은 삶 깊은 슬픔•9
-저문동 뒷산 바라보며
물 흐르듯 살고
물 흐르듯 사라지는
풀잎들
물 한 컵 흙 한 줌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그것들
참 부럽네
바람이 불면 부는 데로
드러눕고
비 내리면 비를 받아들여
푸르른 풀잎들
부럽네
아내를 받아들인 한라산
푸르네
서둘러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네
짧은 삶 깊은 슬픔•10
-묘지 앞에서
봄날 이른 아침
그만그만한 살림들이 모여 사는
저문동 뒷산에서
다소곳이 손 내미는 인동꽃 만나네
겨울의 얼음장을 툭툭 깨뜨리며
얼어붙은 사랑의 샘물 퍼 올리며
파랗게 살아 돌아오는
짧은 삶 깊은 슬픔이여
아내여
살아있는 봄날이
부끄럽기만 하네
<계속>
◇시인 김경홍
1984년 백록문학상 (시 부문) 당선
1994년 계간 문예지 자유문학 신인상(시 부문) 당선
1994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필명 김군산) 당선
한미 대표 시인선집 작품 발표
한국청년대상 본상 수상(언론 부문)
문화타임즈 대표• 발행인
시집
<사계의 바다>, <인동꽃 반지>, <그리운 것들은 길 위에서 더욱 그립다>, <사랑은 먼데 있는 것이 아니더라>. <미워할지라도 사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