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문화

제주 4.3 연작 서사시 5/ 사랑할지라도 미워마라

김미자 기자 입력 2021.09.11 14:59 수정 2021.09.11 15:03

↑↑ 한라산/ 제주도청 캡처


제 3부

떠도는 삶


화전촌을 떠나 해변으로 이주한 제주 여성의 가족은 서귀포시 감귤단지를 전전하며 유랑을 하다시피 했다.
종종 기관으로 끌려간 제주 여성의 남편은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세상으로 걸어 나간 자식들은 연좌제의 덫에 걸려 청운의 꿈을 접어야 했다.

떠도는 자의 노래 •1
- 날품 파는 감귤원




그들이 나를 부르네
단칸방일망정 하루만이라도
쉬고 싶은데
누가 나를 부르네

두 손을 꼭 모아쥐고
뼈마디에 남은 한점의 힘마저 빼내라고
호령을 하네

하루해를 넘길 기력마저 없네
불러도 대답할 기력마저 없네
시키면 시킨 데로 살아가는
형벌




떠도는 자의 노래•2
- 연좌제



학교 길의 아들은 무사할까
가는 길은 눈물에 가려 보이지 않고
온전할 데가 없을 때까지
망가진 것이 내 생애인데
아들은 무사할까
돌아보면 주체할 수 없이 토해내던
악몽의 취조실과
양은 대야 꾸겨지듯 꾸겨져 울음 삼키던
오일장 선술집

뒤엉킨 어망처럼
찢긴 옷가지와 입술
잊을만하면 만나는 악몽이여
가는 길은 이념의 안개 무리에 뒤덮인
황톳길



떠도는 자의 노래 •3
- 귤을 따며


껍질을 벗기면 그 속에 내가 움츠려 있다
가슴 한번 활짝 펴보지도 못한 채
알알이 맺힌 껍질을 벗기면
그 속에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가위를 갖닺 댈 때마다 파르르 파르르
떠는 귤을 보면
입을 열까 말까 망설이다 맺힌
비겁함이 움츠려 있다
그날의 누명에 대하여 말 한마디 못하고
알알이 맺힌 응어리 눌러앉아 있다

어쩌다 매몰차게 구르는 귤을 보면
살아온 날은 얼마나 치욕이던지
내가 나를 버린 지는 이미 오래
한마디 말 못 하고 실려 가는 귤을 보면
내가 그곳에 실려 있다


떠도는 자의 노래 •4
- 성씨 다른 아들의 노래


알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교복을 입을 나이 열여섯
작업복인 내게 어머니는
소중한 그리움이었습니다
추억의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앉아
손짓하던 어머니
나를 기른 것은 나를 떠밀어 낸
야비함이 아니라
능선 마루에 온종일 주저앉은 눈물이었습니다

말없이 돌아선 어머니
나를 기른 것은 당신이 아니라
시대의 패륜이었다는
우리 어머니

능선 마루에 주저앉은 눈물은
오랫동안 떠나지 않았습니다


떠도는 자의 노래•5
-연행



한마디를 하더라도 적당히 골라서 말해야 해요. 이 눈치 저 눈치 보아가며 고개도 적당히 숙여야 해요. 옳다고 하면 옳다고 하고, 그릇되었다고 하면 그릇되었다고 말해야 해요

간첩선이 나타났다거나 대학생이 거리에 나섰다거나 노동자가 부르튼 손을 모아쥐는 날이면 끌려간 남편, 멀고 먼 밤길을 걸어온 남편은 술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함께 있으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함께 있으면
슬픔이 사랑이 됐습니다.


떠도는 자의 노래 •6
-재회(성씨 다른 아들)



슬픔과 슬픔의 만남은 반가운 일입니다

산 넘어 산속으로 마냥 숨어들고 싶은 날
비극의 유산이거나 토벌대의 아들이거나 간에
멀리서 온 슬픔을 맞이하는 것은 눈물겨운 일입니다

낙엽처럼 시대의 한파가 떨어 낸
우리 서로 손을 맞잡았습니다
뼈마디가 으스러질 만큼 부둥켜안고
밤이 새도록 울었습니다

아들의 등을 떠밀어 낸 아내의 어깨가
가늘게 떨립니다
눈물을 뿌리며 돌아서는 아들이 어둠 너머
어둠에 잠깁니다

새 한 마리 노을을 물고 날아올라
세상이 버린 아들을 부축합니다



떠도는 자의 노래 •7
- 감귤단지에 부는 섬 바람


섬 바람 속에 숨고 싶었다
발톱의 떼가 되라면 떼가 되어
탁류라도 되고 싶었다

세상과 어울려 산다는 것은
사는 게 아니었다
고개를 들면
마루 너머 취조실이 보였다

세상은 또 등을 떠밀었다
앙상한 아내의 입술과
벼룩처럼 등짝에 달라붙은 아이들이
떠나는 이유를 물어올 때
가도 가도 그 길뿐이냐고 물어올 때

섬 바람 속에 숨고 싶었다




떠도는 자의 노래 •8
- 전정을 하면서



웃자란 가지와 곁가지를 자릅니다
햇볕과 바람을 잘 들게 하고
양분을 골고루 나눠 먹게 하려면
가지치기를 바르게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아버지, 그날의 노래는 혁명가가 아니었으며
그날의 발버둥은 쿠데타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제 오십 대는 살아남기 위해 자르지 말아야 할
가지를 자르는 굴종의 나날입니다

잘라내야 할 세상의 곁가지를 뒤로한 채



떠도는 자의 노래 •9
- 다리가 잘리다


세상이 버린 목숨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산간 벽촌 감귤원 골짜기
나뒹구는 목숨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농약 살포기가 루프를 휘두르며 으르렁대고
목숨만 부지하면 됐지
무엇을 더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느냐고
농약 살포기가 숨 고를 틈도 없이 으르렁댈 때
두 손을 싹싹 비볐다

농약 살포기가 취조실의 뭇매처럼 으르렁댈 때
포기할 만큼 지루하기도 하련만
두 다리로 달려들며 으르렁댈 때
저승의 문턱에 기대어 쓴 또 한 장의 전향서
배상 청구 포기각서







떠도는 자의 노래 •10- 병실에서


병실 멀리 아득한 수평선
십 대에 띄어보낸 그리움이
불순분자의 이름으로 다가온다
오늘 나는 잘살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고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산산이 부서진 꿈이
몸을 집어삼킨다
마취약이 전신을 마비시킬 때
비로소 내가 상처를 집어삼킨다

의욕 하나로는 버티기 힘든
이 상처
인술로도 고칠 수 없는
가슴 속의 상처




떠도는 자의 노래 •11
-결혼식



딸을 남기고 돌아섰습니다
갈수록 가는 길은 가팔라서
짐 하나를 덜었다는 푸념과
똘똘 뭉친 아내의 미련을
고스란히 남기고 떠나 왔습니다


가진 것 없는 딸이 애처롭습니다
물려받은 가난을 이어 매고
아스라이 서 있는 비탈길의 딸이
노을 멀리 자화상처럼 떠오릅니다




떠도는 자의 노래 ․ 12
-목발을 짚고 서서


불구의 다리와 만성 폐결핵
목발 짚고 먼 산 올려보네

세상과 섞이기엔
깊은 병


그리움에 기대어
가을 산 바라보네

어디로 가야 할까
길은 절망에 가려 보이지 않고
절뚝절뚝
행선지 물어보네


앞서가는 그대들은
그들만의 언어로 교신을 하고
먼 산 어둠에 갇히네
어디로 가야 할까




떠도는 자의 노래 ․ 13
-아내에게



왜 그랬는지 몰라
바다와 등 맞대 살면서 바다를 외면하듯
아내와 살 맞대 살면서
왜 그랬는지 몰라


내 사랑 그렇게 어설펐는지 몰라
한번 멀어진 사랑은 다가올 줄 모르고
다가서면 물러서는 것을
왜 그랬는지 몰라


한평생 살 맞대 살며
외면한 사랑
왜 그랬는지 몰라



떠도는 자의 노래 ․ 14
-남편


절뚝절뚝 당신
남들이 낸 길을 가세요

머뭇거리는 당신
길 끝이 벼랑일지라도
가는 길을 버리지 마세요

우리 걸어온 길은
때때로 독침처럼 흘러
이어 매고 온 삶을 부수고
슬픔은 때때로 물처럼 흘러
가는 길을 지웠지만

길을 가세요
죽지 못해 가는 길도 길이고
죽으려고 가는 길도
길이에요






<계속>



◇시인 김경홍
1984년 백록문학상 (시 부문) 당선
1994년 계간 문예지 자유문학 신인상(시 부문) 당선
1994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필명 김군산) 당선
한미 대표 시인선집 작품 발표
한국청년대상 본상 수상(언론 부문)
문화타임즈 대표• 발행인
시집
<사계의 바다>, <인동꽃 반지>, <그리운 것들은 길 위에서 더욱 그립다>, <사랑은 먼데 있는 것이 아니더라>. <미워할지라도 사랑하라>








저작권자 K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