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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제주 4.3 연작 서사시 연재 3/ 미워할지라도 사랑하라

서일주 기자 입력 2021.07.17 18:17 수정 2021.07.17 18:19

시인 소설가 김경홍






한라산•3
-그날 밤의 편지


‘미워 마라 준 만큼 받는 것이 미움이다
준 만큼 받을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그래도 사랑해다오‘

밤길을 달려온 산속의 남편
쪽지 한 장 건네주고 산새 되어 날아가네

밤이 되어도 세상은 잠들지 않네
세상은 산속으로 생명을 내쫓고
산은 생명을 받아들여
푸르른 영혼으로 되살아나네

세상은 산속으로 총구를 겨누지만
산은 세상을 받아들여
푸르른 영혼으로 되살아나네


한라산 •4
- 어머니


지아비를 버리고 쫓는 자의 아내가 되라는
어머니
난세일수록 힘 있는 쪽에 서라는 어머니
가엾은 어머니

‘ 예야, 목숨부터 부지하고 봐야지 않겠느냐’
절뚝절뚝 멀어지는 눈물을 따라가며
나 또한 눈물을 흘렸습니다

늘어진 어머니의 슬픔이 절뚝절뚝 가라앉는
저문동 포구에 달빛이 휘영청 떠 올랐습니다
이어도사나 이어도사나 숨비소리

나를 살리려는 어머니
개가를 하라는 불쌍한 어머니
깡마른 기침 소리가 파도에 부딪혀 찢어지곤 했습니다


한라산 •4
- 고향, 서귀포시 예래동 군산에서


세상이
마을을 떠나라고 하네
지난 겨울 몰래 떠먹은 한술의 밥이
죄였을까
탱자 한 알 훔쳐먹은 동박새
앞들의 동백나무에 둥지를 튼 멧새가
마냥 부러운 봄날 아침

옷소매를 붙드는 세상은 없고
떠밀어내는 총구만 있네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이 사랑을 멀리한다면
사람이 낸 길은 길이 아니네
사람의 삶을 죄라고 부르고
총구가 사람을 벌한다면
세상은 살 곳이 아니네

휘영청 달이 떠오른 예래동 군산
사람이 낸 길이 끝나는 벼랑 너머
푸섶 속에 둥지를 틀
세 살배기 딸이 먹이를 달라고 울어대네
웅성거리는 군화 소리 귓가에 쟁쟁하네
입술을 눌러내자 어린 딸
발버둥을 치네

새벽녘
겨울 길 걸어온 인동꽃이 이슬을 머금고
다소곳이 우리 모녀 반겨 맞네
새벽 기운 받아들인 한라산은
푸르기만 한데

총성이 잠을 깨우네
사이렌이 울리고
마을이 불길에 휩싸이네


꽃다운 이십 대
외로울수록 사랑이 간절하네
인동꽃 넝쿨이 지천을 물들인 군산
꽃다운 이십 대
사람이 모여 사는 세상이 그립네



출향일기 •1

돌아갈 수 있을까
날 저문 고향 저문동 떠나
짐승이 낸 산길을 떠도네
사람이 낸 길은 길이 아니네
돌아보면 목숨을 거두어
포구를 휘감아 도는 상여
세상은 눈물 머금어 등을 돌리네


머물 곳이 있을까
세상이 낙인찍은 죄인에게 하룻밤이 무사할까
가도 가도 흩어진 신발짝과
지천을 물들인 산딸기
간밤에 끌려간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무사할까

돌아갈 수 있을까 우리 모녀
밤이 깊어지자 마을은 모두
길이 아닌 길을 헤매도네
저문동 포구 돌아들면 어머니
허벅을 이고오던 샘물터 그립네
보리밭 돌담길 따라 담뱃대 피워물던
아버지의 뒷모습 그립네

어디로 가야 할까
한라산은 오라고 손짓하지만
가는 길을 모르겠네



마을 길이 우리 모녀 부르지만
가는 길을 잃었네


출향일기 •2



죄명이 무엇일까
좌익은 무엇이며
우익은 또 무슨 뜻일까
남로당은 또 무슨 의미일까

수평 너머 가고 없는 아들을 부르고
산속으로 숨어든 아들을 그리워한 눈물이
죄인 것일까


학교 운동장에 끌려온 시부모, 눈물 멀리 내려다보이네. 둘러싼 아우성들, 돌팔매질을 하자 아이들이 몰려들고 동백나무 숲속에선 새들이 날아오르네. 허공에 맴돌던 새들은 운동장 밖 숲속에 둥지를 틀고, 시부모 고개를 떨구네. 몸을 눕히네. 돌멩이들 쌓이고 쌓여 사람은 보이지 않고 돌무덤만 보이네

돌팔매질을 한 이는 이웃집 삼촌이었네
이어도사나 이어도사나
바닷길을 함께 헤치던 덕순이 이모였네
해변가 돌담길 따라 냉이 캐던 앞집 친구였네



출향일기 •3


사월 봄날 우리 모녀
철쭉 무성한 숲속 동굴 속에 둥지를 틀었네
허기 속에 철쭉꽃잎 씹어 넣자
그렁그렁 젖은 어머니의 눈빛 더욱 사무치네

돌담길 따라 헤매도는 어머니
세상 길로 돌아오라는 손짓
지은 죄를 털어놓아야 살아남는다는 아버지가
가슴을 치는 동구 밖 멀구슬 아래엔
일손을 놓은 누렁소가 울어대는데

어떤 거짓을 말해야 죄가 되는 것일까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원망스럽네



출향일기 •4

수평선 가물거리는 산비알
시부모 가묘
우리 모녀 맞이하네
한 뼘 땅에 묻힌 생애
이 고운 봄날
총성 요란한 한라산


죄명도 없고 묘비명도 없는 가묘 앞에서
한나절 앉아 있네
아궁이 앞에 자리를 깔고 앉아 도란도란
옛날이야기 들려주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네
내려다보면
불길이 휩쓴 마을
누가 죄를 만들고
누가 벌을 내렸을까

가도 가도 길을 막아서는 가묘들
떠나온 고향마을 토담 길엔 갈적삼들
오랏줄에 묶여 학교 운동장으로 물결치네

멀구슬 나뭇가지에 날아드는 동박새 몇 마리
우리 모녀 지켜보네
섬에 살다 명을 다하면
새가 되어 되살아온다는
할머니의 옛이야기 귓전에 맴도네



귀향 •1
-지서 가는 길


한라산 등성이 타고 내리면
밀물 잘게 부서지는 해변가
토담 길 따라 피어난 동백나무 꽃잎 내리면
인동꽃 피어나고
인동꽃 지고 난 자리에
철쭉꽃
빨갛게 물들인 토담 길 따라
지서 가는 길

신작로는 길이 아니네
홍수처럼 떠밀려내리는 비명들
오랏줄에 묶인 포구 마을 삼촌과
뒷집 친구 순이의 해맑은 눈빛
피눈물 쏟아내네

천제연 폭포수는 붉은 물살 쏟아 내리네
고향 집 돌아보는 눈물 줄기
떨어져 내리는 폭포수 아래 천변엔
날아앉는 갈까마귀 떼들

어느 법전에도 없는 형장으로 가는 길
딸애는 젖을 달라고 울음 터뜨리네

몰려든 군용기 몇 대
폭음을 일으키는 한라 산간
철쭉꽃 붉게 피워 낸 봄 햇살은
개울가 상추잎처럼 싱싱한데
상추쌈을 입안에 넣어주던 남편은 무사할까

목숨을 구걸하러 가는
신작로는
사랑을 배신하는 길이었네


귀향•2
-전향서

그해 늦가을 새벽
스물두 살 지켜온 사랑은
전향서를 유서처럼 남겨놓고
떠났습니다

어떤 이는 살아서 돌아가고
어떤 이는 죽어서 돌아가는 섬길
취조를 마치고 돌아오는 밤길엔
반딧불처럼 날아올라
아스라이 멀어지는 사랑

써놓은 전향서를 옮겨 쓴 그 날 밤
스물두 살의 사랑은 떠나고 없었습니다




귀향•3
-재회

그해 겨울 이른 새벽, 밤길을 헤쳐온 남편은 토벌군인과 위장 개가하라는 쪽지를 남겨놓고 훌쩍 떠났습니다. 스물두 살의 모녀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
한기 가득한 아궁이 앞에 군불을 지피고 쪽지를 태워 없앴습니다.

밤길 멀리
세상 몰래 돌아서는 당신
오는 봄날에는 파랗게 살아오시나요
군홧발 소리 터벅터벅
생사의 문턱에 기대앉은
내 영혼을 어쩌라고
돌아서 어둠이 된 당신

막다른 골목에서
순결의 속옷을 벗어 던지고
불륜에게 돌아누워야 하나요
스물두 해 가꿔온 사랑을 어쩌라고
달빛 가득
산이 된 당신


귀향•4
- 위장 개가

스물두 해의 사랑
산속 깊이 묻어둬야 하네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산 너머 산속에 묻어둬야 하네

어떤 해명을 해야 하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가고 없는 사랑을 원망해야 하나
엄연한 불륜은
살아남기 위한 조건이었다고 가슴을 쳐야 하나

세상은 살아남기 위해
사람의 삶을 버리라고 하네
사람의 삶을 버리고
짐승의 삶일지언정 살아남으라고 하네

살아남아 부끄러운 봄날
무심한 세월
눈물을 몰아 흘러가네


◇시인 김경홍

1984년 백록문학상 (시 부문) 당선
1994년 계간 문예지 자유문학 신인상(시 부문) 당선
1994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필명 김군산) 당선
한미 대표 시인선집 작품 발표
한국청년대상 본상 수상(언론 부문)
문화타임즈 대표• 발행인
시집
<사계의 바다>, <인동꽃 반지>, <그리운 것들은 길 위에서 더욱 그립다>, <사랑은 먼데 있는 것이 아니더라>. <미워할지라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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