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서사시는 제주 4.3 사건의 회오리 속에서 8년 동안 한라산으로 쫓겨야 했던 남편을 둔 제주 여성의 이야기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총살을 당한 시부모를 지켜보아야 했고, 남편을 쫓던 토벌군인의 자식을 낳아야만 했던 제주 여성은 8년의 세월이 흐른 후 세상으로 돌아온 남편과 함께 삶의 여생을 고단하게 보내야 했습니다.
남편이 산속으로 도피한 동안 조상 대대 물려받은 문전옥답은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한 것은 1994년 3월, 부부는 19일을 사이 두고 영면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써 내리는 연작 서사시는 수많은 제주인이 겪어야 했던 제주 4.3의 응어리진 슬픈 자화상입니다.
프롤로그
풀잎에게 미안하다두고 온 세상을 더 원망해 무엇하리. 누가 죄를 지었고, 누가 벌을 내렸는가
세월이 그것을 덮자, 잠시 눈가에 스치는 서러움만 남았다.
이제 우리 부부, 한라산 들녘을 지천으로 물들이는 인동꽃을 덮고 누워있다.
섬길 걸어오며 밟아야 했던 인동꽃.
짓밟혀 지냈으나 짓밟은 자를 품어 안은 꽃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한라산이 훤히 올려다보이는 여기 서귀포시 예래동 앞동산 등허리.
우리 부부가 살아온 공간은 한 뼘도 안 되는 땅이었구나,
저 좁은 땅에서 그들은 무엇을 얻기 위해 그토록 싸움질을 했는가.
길이 시작되는 곳도
길이 끝나는 곳도 매한가지였건만
왜 그 길에서 밟고 밟혀야 했는가.
여기, 길이 끝나는 나지막한 둥지에 우리 부부
함께 나란히 누워있다.
초봄의 하늘이 파랗다.
하늘이 내려앉은 서귀포시 중문동 해변 지나 수평선,
뭉게뭉게 구름이 길게 피어오른다. 지나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인동꽃이 우리를 뒤흔든다.
한 세상을 마감하고 다시 한세상을 시작하는 봄날
멀리 한라산을 올려다보며 누운 남편에게 인동꽃 반지를 건네자,
그이가 나를 품어 안는다.
떠나 온 세상이 꿈만 같다.
서시
세상은 빨치산의 아내라고 불렀다
이름은 오미희였지만 세상은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4.3 사건으로 온 섬이 핏빛으로 물들던 1948년 봄
밥상을 마주한 남편은
산새가 되어 한라산으로 숨어들었다.
왜 그들은
시부모에게 총구를 겨누고 돌팔매질을 해 댔을까
남편을 쫓던 토벌군인은 왜 사랑방의 주인이 되었고
왜 나는 성씨 다른 자식을 낳아야만 했을까.
왜 나는
세상으로 돌아온 남편과
다시 함께했을까
삶은 안개 속이었다
지금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들이 왜 나를 미워했고
내가 왜 그들을 미워했는지
알 수가 없다
여기
한라산이 빤히 올려다보이는
해변가 작은 산등성이에 우리 부부
나란히 누워있다
한 세상을 부려놓고 누우니
미워하고 증오할 일이 아니었구나
이제 저세상을 향해 노래를 불러주고 싶다
미워 마라
사랑을 마저 주기에도
짧은 것이 생이다
살아온 먼 길 돌아보면
미움도 그리움이다
살아남기 위해 살아가는 것들을
미워 마라
미워할지라도 사랑하라
<계속>시인 김경홍1984년 백록문학상 (시 부문) 당선
1994년 계간 문예지 자유문학 신인상(시 부문) 당선
1994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필명 김군산) 당선
한미 대표 시인선집 작품 발표
한국청년대상 본상 수상(언론 부문)
문화타임즈 대표• 발행인
시집<사계의 바다>, <인동꽃 반지>, <그리운 것들은 길 위에서 더욱 그립다>, <사랑은 먼데 있는 것이 아니더라>. <미워할지라도 사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