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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제주 4.3 연작 서사시 4/ 사랑할지라도 미워마라

김미자 기자 입력 2021.08.03 01:13 수정 2021.08.03 01:19

↑↑ 한라산


제2부

하산과 반공 강연




1955년 8년의 피신 끝에 하산한 제주 여성의 남편은 제주, 서귀, 성산포를 돌며 반공 강연을 했다. 토벌군인과 사이에 아들을 낳은 제주 여성이 재결합 한 것은 이듬해였다.
재산을 뺏긴 채 고향 서귀포시 저문동에서 쫓겨난 제주 여성의 가족은 산간 마을 서귀포시 천서동으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토벌군인과 사이에 낳은 아들을 양자로 보냈고, 소아마비 딸은 세상을 떠났다.


하산•1
-날아오르는 종달새야

산간에 눈발 흩날리고
삐라 뚝뚝 떨어진다
날아오르는 종달새야
내 죄명은 무엇이더냐
전향하면 살려준다는 최후통첩이
살아남아 부끄러운 목숨을 적신다

쫓겨 지낸 8년의 고독은
부질없는 짓이었을까
삶의 미련이 남아
세상으로 내딛는 하산길

발길 붙든 색동댕기 한 자락이
가는 길을 묻는다
누가 평온한 들녘에
죽음을 불러들였느냐
주인 없는 묘지의 억새
끄억끄억 그 까닭을 물어온다



하산•2
-취조실에서


짐승이라면 목을 매달릴지언정
울부짖기나 해볼걸
저승의 문턱에서 돌아누우며
써 내린 전향서 한 장

더벅머리와 갈퀴의 손톱
한라산 능선에 엎드려 보낸
8년의 고독을
하소연할 길이 없네

어떤 미련이 남아
내가 내 삶을 배신하고 있을까
산의 영혼을 더럽힌 육신을
누가 받아들일까



하산•3
-삭발



‘8년간의 고독한 빨치산 전향하다’
신문을 읽어내리며
하염없이 눈물 쏟아내네
내 죄명은 무엇이며
누가 벌을 내리는 그들은 누구인가

무성하게 자란 푸르른 영혼이
찬 서리를 만나 우수수 우수수
이파리를 뜯어낸 그 날 이후
누구도 내 이름을 부른 적 없었네

누구도 손 내밀지 않았네


하산•4
-이송


호송차가 중문 지서를 떠나 경찰서로 향한 그해 겨울, 안길 것 같은 고향 저문동은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있었고, 파도 속의 섬처럼 어렴풋이 떠오른 스물여덟 해 자화상도 멀어져갔다.


무심코 바라본 낯선 세상
상복 입은 길가의 여인들은 호송차가 지나자, 눈물을 쏟아냈다
이 시대의 폭력은 이래도 괜찮은 것인가. 철장 속의 분노는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주먹을 모아 쥔 반항은 군홧발에 맞서기도 했지만 끝내 무릎을 꿇었다.
철장 속의 나는 무심코 야경을 바라보며 주먹밥을 구걸했을 뿐 어떤 슬픔에도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아내는 살아있다고 했고, 토벌대의 아들을 낳았다고 했지만 분노하지 않았다

이미 깊숙하게 잠복해 들어온 이 시대의 병
불감증과 무기력증
호송차가 속력을 내자, 나도 내게서 멀어져갔다.



반공 강연 •1
-제주 관덕정에서

저 해맑은 학생들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까
살아남기 위해 거짓을 말한다고 해야 할까
나로 말미암아 섬이 아파하고 있다고
써 준 대본을 읽어내려야 할까

길은 보이지 않았다
써 준 대본을 읽어내릴 때
분노한 눈빛으로 다가오는 저 해맑은 눈빛들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할 수 없는
관덕정에서

내가 나를 죄인으로 만들고 있었다



반공 강연•2
-성산포에서



손수건 한 장 살며시 건네주고
돌아서는 눈물
여인처럼 나 또한 서럽다고
말할 수 없네
속으로 가슴 속으로 눌러 담은
젖은 눈빛 향해
가슴 속의 노래는 억새의 새순처럼
아직도 곱고 싱싱하다고 말할 수 없네

이 비극은 모두
우리들의 어리석음 때문이었다고
가고 없는 벗들을 원망해야 하나
오열을 가다듬은 성산포에서
모든 절망은 우리들의 잘못 때문이었다고
장문의 대본을 읽어내려야 하나

저 여인은 누구일까
알 수 없는 인연으로 왔다가
눈물로 돌아서는 저 상복
당신이 흐르는 눈물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며

돌아서는 아내를 닮은
여인
어머니를 닮은
상복 입은 여인


귀향•1
- 아버지


아버지, 물려주신 이름을 버리고 갑니다
의미를 아실 리 없는 사상범
살아남기 위해 거짓을 진실이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탁류의 시류를 따라 흐릅니다
당신은 이미 시류에 밀려
세상에 안 계시고
날 저문 저승에 내리는 눈이
길이 아니라고 가는 길을 지웁니다
저 대신 사약을 받으신
그리운 아버지
외로운 고향길에 삐라처럼 눈이 쌓입니다

길이 아닌 길을
길이라고 갑니다



귀향•2
- 아내



돌아앉은 아내는 말이 없었다. 불빛이 가물대는 포구에는 눈발이 흩날렸다

혼탁한 시대, 만남의 조건은 얼마나 깨끗해야 적당한가. 불륜은 생존의 조건이었으므로 지난 일을 훌훌 털었으면 하련만 아내는 밤이 깊도록 눈물을 훔쳤다.

아들이 젖가슴을 더듬으며 울어대고 어린 딸이 파닥파닥 간질병을 앓고 있는 마루턱을 지나 먼동이 밝아왔다.

시냇물이 휘어도는 우물터 기우는 집 한 채, 아버지의 헛기침은 들리지 않았다
그 해 태워 없앴다는 족보와 밭문서는 어디에도 없었다



귀향•3
-아내의 노래



만남만이 사랑은 아닙니다
어떤 꽃은 멀리서 바라볼 때
꽃다운 꽃인 것처럼 우리의 사랑은
멀리서 바라볼 때
꽃처럼 아름답습니다

만남만이 사랑은 아닙니다
멀리서 바라보아야 우리의 사랑은
꽃처럼 아름답고
꽃처럼 아름다워야 사랑은
오래 남습니다


귀향•4
-성씨 다른 아들


어서 내게 오렴
따스한 둥지는 없다만
어서 내게 오렴

언제 우리 따스함만으로 살았더냐
꽃샘추위 무시로 몰려오는 봄날은 혹독했지만
우리들의 사랑은 동백꽃을 피워냈고

언제 우리 웃음으로만 살았더냐
너와 내가 오순도순 어울려온 이 섬은
때로는 폭설을 받아들이고
폭우를 받아들이며
행복을 가꿔왔고

언제 우리 남남으로 살았더냐
영영 등을 돌릴 것 같다가도
날이 밝으면 되돌아 앉아
아픔을 다독여 준 이 섬은
사랑의 땅

사랑하나 믿고
내게로 오렴



귀향•5
-족보를 찾으며



제물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라며 아버지는 족보 하나 달랑 물려주셨다. 일본에서 흘러온 어머니의 비천한 시신이 겨울 땅 한 뼘을 차지하고 누울 때 아버지는 이름 석자를 족보 귀퉁이에 적으셨다.
또 다른 여인이 어머니가 된 그해에도 아버지는 족보를 꺼내 놓으셨다. 재물은 봄 햇살에 사라지는 눈더미 같고, 삶 또한 때가 되면 자리를 내주는 것이지만 족보는 세월과 함께 남는다며 애지중지하셨다.

그해에 족보를 불태웠다고 했다.
부모의 이름 석 자마저 써넣을 곳 없는
가난한 날
가슴 속에 이름 석 자를 써 놓았다



출향일기•1
-저문동을 떠나며


섬은
바다를 버리면 살 수 없다고 했네
섬이 산으로 길을 내면
살 수 없다고 했네

우물가 돌아들면
저문동 포구
조각배 한 척
닻줄에 묶여 있네

마을은 하나둘 살림을 챙겨
산으로 길을 내고
닻줄에 묶인 그리움
파도에 깊이 묻히네

담뱃대의 그리움이
수평 너머 자맥질을 하던 툇마루

수평 저 너머
고운 세상 있다던 할머니
화롯가에 내려앉은
거미줄이 울타리를 치고 있네


출향일기 •2
- 화전촌 가는 길


세상 가는 길을 포기했을 때
살길이 보였다
절뚝절뚝 앞서가는 어린 딸과
아들을 끌어안은 말 없는 아내와
내 무기력을 타이르는 낡은 살림이
산길을 헤쳤다

한 페이지의 시대사가
울먹이는 화전촌

8년의 고독은 엊그제만 같아
푸르른 한라산이 품 안으로
와락 달려든다


사랑에 대하여•1
-먼 산 바라보는 당신



먼 산 바라보는 고독한 당신
저 산 밤길에 새겨놓은 발자국은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인가요

공사판의 하루와 술좌석의 삿대질
주저앉은 어깨 너머
젊은 날의 웃음이 아련합니다

살아갈수록 외로운 낙도처럼
흔들리는 당신

성씨 다른 자식을 둔
괴로운 당신

간밤에는 야윈 뼈마디에 기대어
당신을 울린 불륜의 몸이 목놓아 울었습니다

먼 산에 그리움 드리우고
일터로 몸 낮추는 당신

언제나 홀로인 당신


사랑에 대하여 •2
- 벌목

산길을 오릅니다
병풍바위를 오르면 만세 오름
능선 멀리 당신의 체취 날아와 앉은
상수리, 왜가리, 느릅나무
푸르른 밑동에 톱날을 갖다 댑니다

산속에 뿌리친 나무가 더욱 더 푸르고
세상에 뿌리쳐야 사람으로 산다는 이치를
모를 리 있겠습니까

나무가 사라지는 산은 산이 아니고
사람이 쫓기는 세상이
세상이 아닌 이치를 알면서
나무를 쓰러뜨립니다

살아남기 위해 나무를 산 밖으로
내쫓습니다


사랑에 대하여 •3
-메밀밭을 바라보며

화전촌 돌밭에서 보잘것없는 미물이
뿌리를 치고 싹을 펴 올렸네요
못난 제 운명을 한탄하며
때로는 힘에 부쳐 주저앉기도 하면서
아등바등하던 미물이 어느새
자리를 잡았네요
티끌만도 못한 그것이
뿌리를 치고 싹을 펴 올리기까지
수백 번 눈물을 곱씹었다지요

절망에 밀리다가 절망을 씹어 삼켜
일어서는 당신



사랑에 대하여 •4
-압류



그해 겨울 집달관이 들이닥치고
그이는 급류 속의 뗏목처럼 휘말리네
쥔 것은 마른 눈물과 깨진 그릇 서너 개
그들이 오기 전에 그이는 살려고 바둥거리고
떠난 후에는 잊으려고 바둥거리네

고독을 안주 삼아
술병 기울이는 사랑이여
마을은 이중삼중 자물쇠를 채우고
떠나라는 아우성만 올레길에 무성하네

이미 나는 무기력한 아내이네
등짝에 달라붙은 아이들과 집안으로 들이닥치는 세상의 아가미 떼

겨울이 끝나고 봄이 왔지만
길은 보이지 않네



이별에 대하여 •1
-성씨 다른 아들



아들을 떠나보내기로 했습니다
원치 않은 만남이었으므로
이별을 아쉬워하지 않겠습니다
수평선 내려다보면
당신과 첫 만남은
엊그제 같은 고운 추억
돌아갈 수 있다면 되돌아가
해변을 오래오래 거닐고 싶습니다

아들을 떠나보내기로 했습니다
온 길을 알 수 없음으로
떠날 곳이 어디인지를 알려고도 하지 않겠습니다이별이 아프지만은 않습니다

어떤 이별은
아름다운 만남일 수 있습니다




이별에 대하여 •2
-떠나가는 딸


절뚝절뚝 들판을 지나 언덕을 넘어서네
눈물 몇 점 유서처럼 남겨놓고
두 어깨에 한세상을 접고 가네

편히 누울 곳 없는 이승
누울 곳 있다기에 떠나는
소아마비 내 딸

부디 잘 가거라
오르고 나면 비탈길
서러움 씻고 나면 또 서러움
절뚝절뚝 걸어서 잘도 왔네

편히 누울 수 있는 곳
그곳으로 훨훨 날아가거라

목숨 한 잎 떨궈낸
앞뜰의 멀구슬은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내게서 떠난 혈육은
가슴 속에 떠나지 않고 남아
가는 길을 막아서네



이별에 대하여 •3
- 화전촌을 떠나며


몸부림치면 칠수록 빠져드는
늪 속의 삶
맥 풀려 돌아오는 저물녘이면
빈 쌀독 긁는 소리
올레길 정낭에는 빚문서가 버티고 있네

뿌리째 흔들리는 가난과
멀미에 겨워 떠나간 식솔들
밤이면 어둠 속에 몸을 숨기네
떠오르는 햇살 두렵네

내려다보면 지은 죄 만큼씩 서 있는
크고 작은 집들
이 시대의 빈부는
지은 죄와 비례하는 것인가
세상으로 걸어들어가는 낡은 살림
죄인들이 호령하네 

 

<계속>  


◇시인 김경홍
1984년 백록문학상 (시 부문) 당선
1994년 계간 문예지 자유문학 신인상(시 부문) 당선
1994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필명 김군산) 당선
한미 대표 시인선집 작품 발표
한국청년대상 본상 수상(언론 부문)
문화타임즈 대표• 발행인
시집
<사계의 바다>, <인동꽃 반지>, <그리운 것들은 길 위에서 더욱 그립다>, <사랑은 먼데 있는 것이 아니더라>. <미워할지라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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