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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k문화타임즈의‘우리의 얼 되찾기 운동’] 구미 지역 동네의 옛 이름을 찾아 (6) 봉곡동

김미자 기자 cloverail@hanmail.net 기자 입력 2022.10.06 20:21 수정 2022.10.06 20:37

약 600년 전 연안 이씨가 처음 이주, 밀양 박씨·벽진 이씨·경주 노씨가 정착해 마을 형성
김영민 전 구미•대구 YMCA 사무총장 / k문화타임즈 공동 고문 겸 논설위원장

늘 비판과 격려를 해 주시는 네티즌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얼 되찾기의 가치관을 지향하는 k문화타임즈가‘우리의 얼 되찾기의 운동’에 나섭니다.
그 일환으로 김영민 필진이‘구미 지역 동네의 옛 이름을 찾아서’, 송기남 필진이 우리나라 항일 운동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 제주항일 운동사’를 각각 연재합니다
. [편집자]

 



◇김영민 k문화타임즈 고문 겸 논설위원장
대표적인 시민운동가입니다.
구미 YMCA, 대구 YMCA 사무총장을 역임했습니다.
잊혀진 구미의 지명 살리기와 관련한 칼럼을 연재합니다.



◇송기남 K문화타임즈 논설위원
제주 4•3 민주 항쟁과 제주 생태(자연, 인문) 분야에서 오랜 활동을 해 오신 제주지역의 대표적인 시민사회 활동가입니다.
제주항일 운동 칼럼을 연재합니다.
<편집자>

☛구미 지역 동네의 옛 이름을 찾아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구미를 느끼고 살아왔는지 각 동의 이름을 중심으로 그 유래와 내용을 통해서 살펴본다.
<필자>

 

↑↑ (8회) 대정 14년 (1925년) 박희광 선생 항일독립투쟁 동아일보 보도 [사진제공= 필자]



우리 동네 이야기 6. 봉곡동 (蓬谷洞)

◇명칭 유래
*봉곡(蓬谷, 다붓, 다복, 多福): 벽진이씨인 이민선이 들어와 후학을 가르치면서 뒷산 이름인 북봉(北峰)을 호로 삼았다, 이후 이 마을에서 태어난 이민선의 외손이며, 광해군 연간에 예조참의와 경주부윤 등을 지낸 박수홍이 호를 봉곡(蓬谷)이라 하였다고 해서 불렸다는 말도 있다.
또 뒷산이 다봉산(多峰山)으로 ‘다봉’이 방언으로 ‘다붓’, ‘다복’으로 불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설과 쑥대가 많아 ‘다붓’이라고 불렸다고도 전한다.

*별남(성남, 星南): 조선시대 송우암(宋尤庵)이 이곳에 은거하고 있던 이상일(李尙逸)과 만나던 날 저녁에 남쪽 하늘에 남극노인성이 빛나는 것을 보고 ‘성남’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장고개(長峴): 옛 구미 시장 가는 고개가 있는 마을이라 불린 지명. 혹은 이 고개가 길다는 뜻이라고도 한다.

*갓골(冠谷): 일반 평민이 살던 부락이었는데 관직에 나아간 이후 불린 지명. 혹은 갓에 있는 마을이라는, 이곳 지형이 의관(衣冠)처럼 생겼다 하여 생겼다는 말도 있다

◇형성 및 변천
약 600년 전 연안 이씨가 처음 이주하였고, 후에 밀양 박씨·벽진 이씨·경주 노씨가 들어와 정착하면서 마을을 이루었다. 본래 선산군 상고면 지역이었고, 1914년 신기동·성남동·서촌 각 일부를 병합하여 봉곡동이라 하고 구미읍에 편입하였다. 1977년 3월 21일 경상북도 구미지구출장소 선주지소 관할이 되었고, 1978년 2월 15일 구미시 승격으로 부곡동·선기동·수점동과 함께 선주동 관할이 되었다. 1999년 3월 2일 행정동 통폐합에 따라 선주동과 원남동을 통합한 선주원남동 관할이 되었다.

 

◇봉곡동 출신 독립운동가 박희광

 
↑↑ 건국훈장 (국민훈장) 서훈 (1968년 3월) [사진제공=필자]

1902~1970, 일제 강점기, 박수홍(朴守弘)의 10대손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8세의 나이로 부친을 따라 만주로 갔다. 16세 때 봉천성(奉天省) 남성자학교(南省子學校)를 졸업하고 오동진(吳東鎭) 휘하 통의부(統義府)에 자진 입대하여 6개월간 군사 훈련받았다.
2년 후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18세의 나이로 만철연선(滿鐵沿線)과 한만 국경 지대에 잠복하여 중국, 만주, 러시아 등지의 10여 개의 군사단체가 관동군(關東軍)의 진로를 봉쇄하기 위한 작전에 참여하는 등 실질적인 무장 독립운동을 했다.

*일본의 앞잡이인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녀 배정자(裵貞子)를 대련(大連)에서 암살하려고 했으나 실패, 일진회장 이용구를 암살 실패, 1924년 7월 22일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했으나 불발되어 실패하였으나 그날 저녁 고급요정 금정관(金井館)에 침입하여 군자금으로 300원을 탈취해 나오다가 잠복해 있던 일본 경찰과 총격전이 벌어져 김광추는 현장에서 순국하고 김병현과 박희광은 체포되었다.

* 관동청(關東廳) 지방법원에서 1심에서 사형을, 2심에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여순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일본의 유인(裕仁) 천황 즉위 때와 황태자 출생 때 감형되어 1943년 43세로 출옥한 후 대련에서 동지와 같이 상해임시정부로 가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44세의 유씨(文化柳氏)와 가정을 꾸렸으나 생활은 매우 궁핍하였다고 한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임정 요인들이 귀국하자 죽첨장(竹添莊)으로 백범 김구 선생을 찾아가 그간의 경과를 보고했더니 위로금으로 2000원을 주면서 정부 수립 때까지 기다리라 했지만 1949년 김구선생이 암살되자 아무도 찾아주는 이 없었고, 그는 묵묵히 옥중에서 익힌 재봉 기술로 양복 수선을 생업으로 살았다. 생활고와 심신의 괴로움을 달랠 길 없어 처가가 있는 왜관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천주교에 귀의하여 왜관 성당에서 ‘시메온’이란 세례명으로 영세까지 받았으나 슬하에 5남매를 두고 상처하는 쓰라림을 겪어야 했다.

*그에 관한 기록은 후일 관동성 지방법원 재판 기록이 게재된 1924년 9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가 대구지국에서 발견되어 박희광의 행적이 입증됨으로써 뒤늦게 훈장이 수여되어 노후에 다소 보탬이 되었으나 1970년 l월 20일 71세를 일기로 서울 원호병원에서 타계하였다
 
↑↑ 금오산 입구에 세워진 박희광 선생 동상 [사진제공=필자]


*지금도 금오산 금오지 입구에서 동상으로나마 구미를 내려다 보시며 조국의 독립과 말없이 실천하던 한 애국지사가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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