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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k문화타임즈의‘우리의 얼 되찾기 운동’/구미 지역 동네의 옛 이름을 찾아 (3) 원평동

김미자 기자 cloverail@hanmail.net 기자 입력 2022.09.04 12:13 수정 2022.09.04 13:24

김영민 전 구미•대구 YMCA 사무총장 / k문화타임즈 공동 고문 겸 논설위원장

늘 비판과 격려를 해 주시는 네티즌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얼 되찾기의 가치관을 지향하는 k문화타임즈가‘우리의 얼 되찾기의 운동’에 나섭니다.
그 일환으로 김영민 필진이‘구미 지역 동네의 옛 이름을 찾아서’, 송기남 필진이 우리나라 항일 운동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 주항일 운동사’를 각각 연재합니다.
[편집자]

 



◇김영민 k문화타임즈 고문 겸 논설위원장
대표적인 시민 운동가입니다.
구미 YMCA, 대구 YMCA 사무총장을 역임했습니다.
잊혀진 구미의 지명 살리기와 관련한 칼럼을 연재합니다.



◇송기남 K문화타임즈 논설위원
제주 4•3 민주 항쟁과 제주 생태(자연, 인문) 분야에서 오랜 활동을 해 오신 제주지역의 대표적인 시민•사회 활동가입니다.
제주항일 운동 칼럼을 연재합니다.
<편집자>

☛구미 지역 동네의 옛 이름을 찾아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구미를 느끼고 살아왔는지 각 동의 이름을 중심으로 그 유래와 내용을 통해서 살펴본다.
<필자>

3.우리동네 이야기• 원평동

경부선의 기차역, 신리, 고려, 조선시대, 근대 초기까지 우리 지역의 중심은 선산에서 행정, 상권 등 모든 것이 이루어졌으나, 1916년 경부선 구미역이 개통되면서 원평동이 구미의 중심이 되는 단초를 마련했다. 처음 단층 역사 1동과 승강장 및 이동 지하도를 갖추고 있었다 한다. 이어 개축 및 증축을 거듭해 오다가 1999년에 선상 종합역사 공사를 시작해 2015년에 완공했다. KTX구미역을 기다리며……
↑↑ 사진 제공 = 필자

↑↑ 사진 제공 = 필자

↑↑ 사진 제공= 필자



<동명의 유래와 역사>
☛유래:‘들 가운데 가장 먼저 생긴 들’이라는 뜻으로 상고시대부터 취락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 현재의 원평1동이 먼저 생겼다고 한다.

☛다른 이름들
*월산(月山): 원평동을‘월산동(月山洞)’이라고도 하였으니, 곧 금오산에 저녁에 달이 걸리면 아름답다하여 불리워진 지명.
*죽바위들(岩田): 마을 일대가 온통 돌자갈 밭이기에 ‘암전’이라고도 불림
*각산(角山): 금오산 줄기인 황우봉에서 굴러내린 큰 바위가 마치 쇠죽통 같이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 (현 구미역 자리에 둘레 20m, 높이 10m 큰 바위가 있었다고 함)
*장터(場基), 나무전 거리, 소전 거리: 1일, 6일 시장이 형성되었던 곳이며,구미중앙시장으로 현존하고 있다.
‘나무전거리’는 장터안의 땔나무를 사고 팔던 곳, 장터안의 우시장이었던 ‘소전거리’현재는 주택가로 변함,

*변천: 조선시대에는 선산군 상고면 지역이었고,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에 따라 월산동· 암전 동· 각산동· 장기동의 각 일부를 합하여 원평동이라고 하여 구미면에 편입하였다.

*1978년 2월 15일 구미시로 승격되면서 1동에서 5동이 생겨났다. 1999년 3월 2일 원평1, 2동으로 편제되었으며 6동은 선주원남동에 편입 되었다.

☛ 일제 강점기 시절 원평동에서의 청년운동 1
*1920년대 구미청년회 조직: 구미청년 구락부라는 이름으로 1925년 12월 28일 오전 10시 구미역전 보은관에서 창립총회가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일경의 방해로 12월28일 김구룡 집에서 열림
*1926년 구미청년회도 임시 집행위원회를 열고 조사부 증설과 함께 박상희, 윤재우, 황석호 등 3명을 임명, 회관 건축을 위한 강연회를 4월 3일 구미역전 환송구락부에서 개최함
*1926년 5월 12일 구미역전 보은관에서 제1회 고문회를 개최하고 26일 구미청년회와 구산구락부는 회의사무실을 구미역전에서 시청 앞 보천교 선산정 교부자리로 이전

<일제 강점기 시절 원평동에서의 청년운동 2. 신간회>
*1928년 10월 11일 신간회 본부 홍명희 초빙 구미역 원평동에서 신간회 선산지회의 설립, 의장 배승환 (동아일보, 조선일보 1927.10.14.)
*1928년 1월5일 신간회 선산지회는 구미역전 보은관에서 이재기를 사회로 정기 대회를 개최 (조선일보 1928.1.9.), 대의원 선출, 기금조성
*1928년 7월 8일 부회장, 간사 (박상희)등 일본 헌병대가 가택수색 및 구속
*1928년 9월 29일 관북지역 수해와 영남지역 한재 대책 강구(해평에 농지를 소유한 대구지주에게 소작료 면제 및 50% 삭감 요청)
*1928년 10월 11일 경찰의 수사 활동 강화, 회장단 검속, 대대적 탄압, 검색, 구속
*1928년 12월 1일 석방,그러나 신간회 자료 등 모두 압수 (11월 27일 송정야학 폐쇄, 활동가 대부분 체포당함)
*1930년 5월 박상희를 서기장으로 선출, 이후 좌우 대립으로 신간회 존립에 대한 논쟁 격화, 존립에 대해 불분명한 입장으로 사라지게 됨
(구미역 대한통운 자리에 조선일보 지국에 사무실에 있었다하나 확실한 내용 없음)
출처: 『구미독립운동사』(구미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2021,11, 구미시)

 


↑↑ 김정묵 선생 [ 사진 제공 =필자]


☛원평동이 나은 독립운동가 해산 김정묵 선생 및 가족의 독립운동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중국으로 망명.
*1914년 북경서성중국대학 정치학과를 졸업,
*1915년 항일투쟁을 위해 동삼성(東三省) 곽송령(郭松齡) 부대에 입대
*1918년 밀입국하여 구미출신 장진홍(張鎭弘, 인동, 후 대구의 한국은행 폭파사건 주도)과 독립운동 방향을 의논,
*1919년 3월 1일 운동 직후 북경으로 피신
*1920년 북경 팔만정(八萬亭)에 사비로 집의학교(集義學校)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 이후 상해와 북경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경상도의원으로 활동
*1921년 5월 신채호 등과 함께 통일촉진회를 조직하였고, 김창숙·박순병·신채호 등과 함께 월간지 『천고(天鼓)』를 발행하여 중국인들에게 한국인의 독립정신을 일깨웠다.
*1924년 2월 만주에서 독립신문사 길림지국장, 다시 중국군에 입대하여 동북지방 육군 제 19여단사령부 군법처장을 역임
*1926년 하얼빈에서 의열단 활동을 지원하여 일본 요인 암살과 일본제국주의 통치기관의 폭파 계획에 참여하였다.
*1926년 11월 북경에서 강부약·김광선·신익희·조성환 과 함께 한국독립유일당 북경촉성회를 조직하여 일본제국주의의 타도와 독립운동자의 단결에 힘썼다.
*1932년 4월 29일 일본의 천장절(天長節) 및 중일전승축하식이 있던 상해 홍구공원(鴻口公園)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준비하였다

<가족>
*큰 아들 김교일(1909~1960)역시 의혈단에서 활동했다. 1909년 11월에 태어났고 본적은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원평동 391번지이다. 아버지 김정묵을 따라 중국에 건너가서 혈단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독립운동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우 김성묵은 1902년 4월 선산국 구미면 원평동에서 출생하였다.1919년(또는 1920
년)에 중국 요녕성 봉천으로 건너가 김정묵과 함께 독립운동에 나섰다. 1928년 하얼빈으로 이주했다. 독립군자금모금으로 일본 영사관에 체포된 적도 있으며 여성독립운동가 남자현과 교유했다. 동아일보 1930년 2월 13일자 기사는 봉천의 형 정묵과 함께 거주했음을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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