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비판과 격려를 해 주시는 네티즌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얼 되찾기의 가치관을 지향하는 k문화타임즈가‘우리의 얼 되찾기의 운동’에 나섭니다.
그 일환으로 김영민 필진이‘구미 지역 동네의 옛 이름을 찾아서’, 송기남 필진이 우리나라 항일 운동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 제주항일 운동사’를 각각 연재합니다. [편집자]
◇김영민 k문화타임즈 고문 겸 논설위원장대표적인 시민운동가입니다.
구미 YMCA, 대구 YMCA 사무총장을 역임했습니다.
잊혀진 구미의 지명 살리기와 관련한 칼럼을 연재합니다.
◇송기남 K문화타임즈 논설위원제주 4•3 민주 항쟁과 제주 생태(자연, 인문) 분야에서 오랜 활동을 해 오신 제주지역의 대표적인 시민사회 활동가입니다.
제주항일 운동 칼럼을 연재합니다.
<편집자>☛구미 지역 동네의 옛 이름을 찾아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구미를 느끼고 살아왔는지 각 동의 이름을 중심으로 그 유래와 내용을 통해서 살펴본다.
<필자>5.우리 동네 이야기 5. 고아읍한국 영화계의 거장 김유영, 영화에 빠진 구미의 소년, ‘유랑’◇동네 이름 유래 *통일신라 및 고려시대에 지금의 고아읍사무소를 중심으로 남쪽 3㎞ 지점 안에 있던 고아부곡(高牙部曲)에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고아 부곡에서 고아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가 민족 재통일 전쟁 마지막 결전을 치를 때 왕건과 총지휘관이 주둔해 있던 내성, 또는 본영 성곽인 아성에서 비롯한 이름 설. 이때 고아읍 송림리와 괴평리 뒷산인 매봉산에 있었는데,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매봉산 주변 지역 이름에 ‘고(高)’자와 ‘아(牙)’자를 많이 넣어 불렀다고 한다.
*옛 지명인 고소아리동리(古所牙里洞里)는 고소아리동리(高所牙里洞里), 즉 ‘고려군 아성의 소재지’란 뜻으로, 이를 줄여 고아가 되었다.
*옛날에는 평성방(坪城坊)·망장방(網張坊)·서내방(西內坊)으로 불렸고, 1914년 면 통폐합으로 고아면이 됨. 1997년 11월 1일 고아읍으로 승격.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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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신 김종무 정려비 [사진 제공=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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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 김종무의 정려비
임진왜란 당시 사근도 찰방을 맡고 있던 김종무는 후퇴하는 도중 상주지역 순변사 이일의 수하에 들어간 후 상주 판관 권길과 함깨 상주 북전전투애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숙종 1년에(1675) 건립되었으며 충신으로 임명되고 정조 때 이조참의 고종 때 이조참판으로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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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학정 [사진 제공 =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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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학정 구미시 고아읍 강정4길 63-6에 있다. 고산 황기로와 그의 사위옥산 이우가 풍류를 즐기고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다. 고산은 서예가 뛰어나서 초성이라 하였고, 옥산 역시 서예의 대가였다. 1533년에 조부의 휴양지에 정자를 지어 매학정이라 하였으며, 후에 옥산이 물려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1654년 옥산의 증손 학정 이동명이 중건하고, 1675년 그 옆에 귀락당을 지었다. 이 정자는 남향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강암으로 쌓은 3층의 기단 위에 막돌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처마 끝 서까래가 1단으로 된 흩처마에 팔작지붕이다.1843년 정자 뒤에 세운 매강서원은 1868년 훼철되어 주춧돌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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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영 기념비(원호초등) [사진 제공 =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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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계의 거장 김유영, 영화에 빠진 구미의 소년, ‘유랑’ *구미 고아읍 원호초등 뒤편에는 김유영 감독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와 함께 그가 연출한 유랑(1928), 화륜(1931), 애련송(1939), 수선화(1940) 네 작품의 스틸컷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1908년 9월 22일 구미 고아읍 원호리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한국 영화예술 분야에 큰 업적을 남겼으나 고작 32년을 살았을 뿐인 그의 세상은 일제강점기하의 대한제국이 전부였다.
*김유영은 선산군 고아읍 원호리 12번지에서 태어났다. 구미 공립보통학교에 이어 대구 공립보통학교에 진학, 서울에 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로의 전학 이후 그는 영화에 빠져들었다. 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던 1925년, 대구에서‘여명’을 발행하고 있던 숙부 김승묵을 찾아가서 원고를 내민 것이 그의 첫걸음이었다
*영화와 사랑에 빠진 김유영은 바로 이름난 문필가였던 임화, 서광제, 조경희 등이 속해 있는‘조선영화 예술협회(카프 KAPF·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가입했다.
*1927년, 만 나이 19세 때의 일이었다. 이름난 작품을 영화로 만들어 일본을 비롯한 외국에 수출하는 데 가장 큰 목적이 있었다. 이를 위해 신파극에서 탈피할 것, 지식을 갖춘 신인을 발굴할 것, 영화촬영소를 설립할 것, 영화 각본을 검토하고 연구할 것 등을 활동 내용으로 삼았다. 영화계의 중진이었던 이경손과 안종화, 이우 등이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곧이어 ‘영화인회’도 조직되었다. 영화인회에는 심훈, 나운규 등 쟁쟁한 인물들이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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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AFF관련 김유영 기고 글(1930년 동아일보) [사진 제공 =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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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단성사에서 개봉된 김유영의 첫 영화이자 카프의 첫 영화, ‘유랑’ ‘고향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떠났던 이영진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데서 시작한다. 하지만 영진이 없는 동안 땅을 빼앗긴 부모는 북간도로 사라진 뒤였다. 이에 상심한 영진이 다시 떠날 준비를 하던 중 우연히 오래전에 알고 지냈던 노인을 만나 그 집에 머물게 된다. 그곳에서 노인의 딸 순이와 사랑에 빠진 영진은 고향에 눌러앉기로 결심하고 야학을 시작한다. 비방이 빗발치고 냉소가 쏟아졌지만, 열심을 잃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의 부호가 나타나 순이의 집에 준 빚을 빌미로 외아들인 바보 윤길과의 혼례를 강압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다. 절망한 순이는 죽기로 작정하고 혼사 전날 밤, 눈 쌓인 산성으로 오른다. 뛰어내리려던 찰나 영진이 손을 잡는다. 그리고 영진과 순이, 노인은 정처 없이 길을 떠난다.’
기대가 컸지만, 평이 극명하게 갈렸다. 프롤레타리아 농민의 비애가 잘 드러났다는 호평과 나운규의‘아리랑’을 모사했을 뿐이라는 악평이었다. 흥행도 성공하지 못했으나 유랑이 가진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무산계급을 다룬 영화가 전국적으로 제작될 수 있도록 묵직하게 진동한 까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