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문화타임즈 = 김경홍 기자] 박정희 대통령의 둘째 형으로서 3년여 동안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 박상희 선생에 대한 재조명과 함께 시민들이 업적을 추모토록 하는 환경 조성에 나서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식이 있던 2017년 11월 25일 박정희와의 친일 대비 효과 부각 때문에 잊히기를 강요당했던 박상희 선생은 생가와 8백 미터 지척에 잠들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쳐다보지도 않고 있다고 비판한 구미경실련은 박정희 생가는 박정희 둘째 형인 독립운동가 박상희 선생의 고택이기도 한 만큼 경북도와 구미시는 ‘박상희 선생 추모 공간’으로 공유하도록 생가 시설을 보완하라고 촉구했다.
또 문재인 정부가 독립 유공자 발굴 및 포상을 확대하기로 공식 발표한 만큼 구미시와 차기 시장은 구미지역 출신의 박상희, 최관호 선생 등 진보 노선의 독립운동가들이 서훈되도록 하는 재조명 사업 추진을 통해 탄생 110돌 기념사업으로 추락한 지역 이미지를 쇄신하라고 밝혔다.
아울러 박상희 선생 서훈을 추진키로 한 구미경실련은 경북도와 구미시, 2018년 실시하는 구미시장 출마예상자들에게 박정희 생가를 박상희 선생을 추모하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생가 시설을 보완하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 차기 시장은 문재인 정부의 독립유공자 발굴·포상 확대 방침에 맞춰 박상희·최관호 선생 등 진보 노선 독립운동가들이 서훈되도록 재조명 사업을 추진함으로써 박정희 탄생 100돌 기념사업으로 추락한 구미 이미지를 쇄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와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독립운동가 발굴·포상 확대 의지를 표명하자, 국가보훈처는 지난 2017년 9월 독립운동 사료의 국가입증 책임 강화, 독립유공자 발굴 사각지대 해소 등을 내용으로 하는 독립유공자 발굴·포상 확대 계획을 발표했다.
특히 3개월 징역형 이상 등 수형(受刑) 중심의 현행 포상 기준만으로는 독립운동가의 공헌과 희생을 제대로 판단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인식하고, 전문가 용역과 자문 등을 거쳐 수형 사실이 없더라도 독립운동 공적이 분명한 경우 포상하거나 현행 포상 기준이 적정한지에 대해서도 검토키로 했다.
이와 관련 구미경실련은 서훈 기준이 유연하게 바뀜에 따라 수형 기간 입증에 어려움을 겪었던 최관호 선생에 대한 서훈 신청이 유족 측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면서 같은 해 같은 지역에서 태어났고, 같은 진보 노선의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며, ‘일(一) 관호(최관호), 이(二) 상호(김상호), 삼(三) 상희(박상희)’라고 불릴 만큼 친분도 두터웠고, 같은 해 억울하게 사망한 박상희 선생 서훈을 추진하겠다면서 구미시의 신속한 대응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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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시대 구미 원평동 [사진 출처 = 구미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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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희 선생은 구미가 낳은 독립운동가구미 현대 정치는 보수 성향의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출발한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선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한 킹 메이커 김윤환 전 의원은 이후 박 대통령의 도움을 받아 본격적인 정계 활동의 물길 속으로 뛰어들었고, 1979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정회 의원이라는 월척을 건져 올리면서 현대정치사에 이름을 올렸다.
초대 중앙정보부장과 9선 국회의원(6~10대, 13~16대), 두 차례 국무총리,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과 '3김(金) 시대'의 한 축을 이룬 김종필 전 총리 역시 박정희 대통령과 깊은 인연이 있다. 박 대통령의 조카인 고 박영옥 여사가 김 전 총리의 부인이라는 점, 그의 부인인 박 여사가 구미 근현대 진보 정치의 한 획을 그은 독립운동가 출신의 박상희 선생의 큰 딸이었다는 점은 관심 사항이 아닐 수 없다.
▶처가가 구미인 김종필 전 총리“ 2월 23일, 오후 7시경 고향 시장으로서 김종필 전 총리의 부인 박영옥 여사님 빈소를 조문했습니다”
2015년 2월 23일 오후, 남유진 구미시장은 페이스북에 이런 내용의 글을 올렸다.
2015년 2월 21일,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한 고 박영옥 여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셋째 형인 박상희 선생의 큰딸로서 고향이 구미였다.
그녀의 죽음은 잠시 구미시민들이 박상희 선생을 떠올리게 하는 계기가 됐다. 원남동 속칭 각산에 살았던 박 여사는 고독한 젊은 시절을 보내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29년생이었던 박 여사가 아버지 박상희 선생과 이별했던 것은 1946년, 그의 나이 17세였고, 남동생 박준홍 전 대한축구협회장이 탄생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개월 후인 1947년 1월이었다. 5명의 동생을 둔 큰딸로서 어깨가 무겁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윈 박 여사는 그러나 사방팔방에서 불어오는 모진 세파를 딛고 해방 직전인 1944년 구미초등학교(24회)를 마쳤다. 이후 그녀는 숙명여대 국문학과 졸업과 동시에 모교인 구미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50년 김종필 전 총리를 처음 만났다.
중매를 선 이는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6.25 전쟁 직전인 1950년, 국수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당시 박정희 소령은 관사에서 김종필 당시 중위와 국수를 먹다가 그곳을 찾았던 박영옥 여사와 처음 만나게 된다. 그로부터 얼마 후 6.25 전쟁이 터지자, 김 전 총리가 말라리아를 앓던 박 여사에게 의사를 구해주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바스켓과 빵으로 미국 야전식을 대접하면서 첫사랑의 인연이 시작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박 대통령은“ 데리고 갈 생각이 없나. 지내보긴 뭘 지내봐,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라며 결혼을 권유했고, 1년 후인 1951년 대구의 한 교회에서 백 년의 동행을 가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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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7월 15일 오전 11시, 박상희 선생 추모식 제막식에서 당시 박준홍 유가족 대표는 하염없이 눈시울을 붉혔다. [사진 = 김경홍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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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옥 여사의 부친 박상희 선생박정희 대통령의 형인 박상희 선생의 발자취는 좌우 이념의 대립 역사 속에서 때로는 박정희 대통령의 어깨를 무겁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상희 선생이 남긴 족적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될 대목이다.
“63년 전 돌아가신 아버님은 동분서주하시면서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수많은 옥고를 치르셨고, 돌아가시던 1946년 10월 5일에도 시위대에 둘러싸인 경찰관이 위태롭다는 전언을 듣고 경찰관을 구하러 가셨다가 변을 당하셨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아버님은 좌익이니, 우익이니, 공산 활동을 했느니 하는 부당한 평가에 시달리며 지금까지 지내왔다. 별세하신 지 60년이 지나도록 묘비 하나 없이 싸늘한 땅에 누워계셨다.”
2010년 7월 15일 오전 11시, 박상희 선생 추모식 제막식에서 당시 박준홍 유가족 대표는 하염없이 눈시울을 붉혔다.
박준홍 대표는 이어 “18년 전인 지난 1992년 11월 19일, 이곳으로 이장할 때도 비석을 세울 것을 신중하게 고려했으나, 가족들이 간단하게 세우는 그런 비석은 6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더욱 초라할 뿐이라는 생각 때문에 나날을 보내왔다”고 술회한 후 “몇몇 분들이 아버님의 공적을 인정하고, 국가에 서훈을 제청할 움직임과 함께 뜻있는 시민들의 모금을 해서라도 비석 하나 없이 쓸쓸하게 묻힌 아버님의 추모비를 세워야 한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비로소 추모비 제막식을 갖게 됐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박상희 선생을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1905년 8월 약목면에서 태어나 1914년 상모동으로 이사 온 후 구미에서 독립운동을 한 박 선생은 특히 20대 초반, 선산 청년 동맹을 결성, 선산지역의 청년운동을 주도하는 등 민족주의 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특히 항일 좌우 합작 신간회 선산지회 결성과 또 다른 독립운동을 한 이유로 수차례 옥고를 치룬 선생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지국장 등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도 박 선생은 선산군 인민위원회와 민족주의 민족전선 선산군 지부를 결성, 분단 없는 민족국가 건설에 매진했는가 하면, 미군정의 강재 공출로 국민들이 굶주림에 항거하면서 대구에서 시작된 1946년 10월의 민중항쟁이 구미로 확산되는 동안 그 중심에서 활동하면서 경찰을 보호하고 평화 협상 노선을 견지했다.
당시 추모비 제막식에서 조근래 구미경실련 사무국장은 “ 그해 10월 5일, 경찰과 주민 간의 중재를 마치고 귀가 중 경찰의 오인 총격으로 향년 마흔 둘에 세상을 떠났다”면서 “흔히 선생을 좌익 독립운동가로 오인하지만, 선생은 1931년 개량주의 사회 운동인 구미소비조합 이사로 활동하셨고, 부인인 조귀분 여사도 여성단체인 근우회 김천지회장 경 중앙 부회장으로서 야학 학교 교사를 하셨다”고 설명했다.
조 국장은 또 “호방한 성품의 선생은 특정한 노선이나 특정 단체에 편향됨이 없이 폭넓게 활동했다는 점에서 이론 편향적이 아니었던 분으로 평가되고 있다”면서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았느냐는 조봉암 선생의 묘비명에 쓰인 것처럼 선생의 일념 또한 이러한 민족 독립에 있다고 본다”고 평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형이면서 박영옥 여사의 부친인 박상희 선생은 이처럼 민주주의와 지역 사랑의 외길 인생, 독립운동가로서 재조명되고 있다.
▶박영옥 여사의 남동생 박준홍박상희 선생의 유일한 아들이면서 박영옥 여사의 동생인 박준홍 전 대한축구협회장은 구미 지역 정치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1996년 실시한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는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당시 상대는 사촌 형인 다섯 살 위의 박재홍 전 의원이었다. 그러나 당시 선거에서 박 전 회장은 42%의 득표율에 머물며 2위로 낙선해야 했다.
이어 제1회 지방선거 경북지사 선거에 자민련 후보로 출마했으나 3위인 27.7%로 낙선했으며, 2004년 제17대 구미 총선에도 자민련 후보로 출마했으나 12.4%를 획득하며 4위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2010년 구미 지방선거를 앞두고 미래희망연대와 함께 친박연합을 창당한 박 전 회장은 구미에서 4명의 시의원을 당선시키기도 했다.
▶인생무상구미가 고향인 박영옥 여사의 일대기를 아는 이는 별로 없었다. 구미초등학교 1년 후배인 박병천 옹(25회)은 박 여사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일대기를 전해 들을 수는 없었다.
박 여사가 86세를 일기로 영면했으니, 유유히 흘러가는 삶의 세월이 박 여사와 한때의 싦을 살았던 인연들을 온전케 놔두진 않았으리라.
아버지 박상희 선생의 독립운동사를 큰 딸인 그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보수정치 저편에 밀려나 있던 박상희 선생. 그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