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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구미는 후삼국 통일의 현장, 억만금 주고도 살 수 없는 역사 관광 유산 방치

김경홍 기자 siin0122@hanmal.net 기자 입력 2021.12.22 02:41 수정 2021.12.22 02:48

△가치 높게 평가한 김관용 지사 ⇢ 재임시절‘구미시 추진하면 도비 얼마든지 지원하겠다’ 윈윈 공조 실패로 무산
△선산읍 낙동강 변, 고아읍, 지산동 앞들은 후삼국 전투 현장
△냉산(태조산)은 왕건부대 머물렀던 곳
△스토리텔링 하면 (후삼국) 통일의 길 조성 가능
△견훤의 출생지는 상주

↑↑ 왕건 부대가 머물렀던 태조산(냉산)/ 사진= 구미시 켑쳐


[k문화타임즈 = 김경홍 기자]  2019년 10월 18일 구미시가 제출한 ‘관광자문협의회 구성 및 운영’을 내용으로 하는 조례안을 심사한 구미시의회 기획행정위원회 위원들은 관광산업 개발에 팔을 걷어붙이고 관광진흥과에 힘을 실었다. 제조업 중심의 도시 구미에 관광산업을 활성화해 미래 먹거리를 마련하자는 취지였다.
특히 이날 위원들은 구미 곳곳에 산재한 문화유산을 특화해 관광 벨트화함으로써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도록 하라고 주문했다.

관광산업을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민선 6기 후반기로 들어서면서 구체화 됐다. 이러한 의지는 관광진흥계 신설로 이어졌다.
이어 민선7 기 개막과 함께 관광진흥계가 관광진흥과로 승격되면서 관광산업 활성화에 대한 의지는 더욱 탄력을 받았다.


◇구미의 소중한 자산, 후삼국 통일의 현장
관광산업 활성화에 대한 필요성이 요구되고 있는 가운데 고아, 지산 앞들을 중심으로 전개됐던 통일의 현장을 스토리텔링화해 통일(후삼국)의 길을 조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삼국통일의 현장인 논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향토축제인 60년 전통의 백제문화제를 통해 황산벌 전투를 재현하면서 관광 가치를 재고하고 있다.
황산벌에 비해 뒤질 것이 없는 후삼국 통일의 현장을 보유하고 있는 구미시로서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936년을 전후해 후삼국 통일의 현장이 되기까지 2년 동안 왕건이 견훤(아들 신검)과 대적하기 위해 전열을 정비했던 해평면 냉산(태조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선산읍 생곡리 앞 낙동강 연안부터 고아읍 관심리, 괴평리, 지산동 앞들은 후삼국 통일의 현장이다.

관광산업은 대기업 하나를 유치하는 것 이상의 부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외국의 도시들은 보여주고 있다. 실례로 괴테의 도시 프랑크 푸르트는 괴테의 생가를 관광산업으로 발전시켜 한 도시가 먹고사는 먹거리를 창출하고 있다. 또 문화유산이 전무하다시피 한 미국의 뉴욕은 로마나 파리처럼 역사적 유적으로 유명한 도시도 아니고, 스위스처럼 빼어난 자연환경으로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곳도 아니지만, 문화유산을 개발하고 이를 포장해 상품화함으로써 4,000만 명의 내국인과 1,000만 명 이상의 외국인이 찾는 세계적 관광지로 명성을 높이고 있다.

◇후삼국 전투 전투의 현장
재임 시절인 2016년 지사실에서 기자는 김관용 지사에게 후삼국 통일의 현장이 고아읍과 지산 앞들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자, 가치를 높게 평가한 김 지사는 관련 부서에 조사를 지시했다. 또 구미 출신 도의원들에게도 후삼국 통일의 현장이 재조명될 수 있도록 협조해 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특히, 김 지사는 후삼국 통일의 현장을 재조명하는 데 소요되는 예산을 얼마든지 지원하겠다는 입장이었으나, 구미시와의 소통 부재로 백지화됐다. 안타까운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936년 후삼국 통일을 이루기까지 선산읍 낙동강 변과 고아읍, 지산동 앞들에서는 어떤 양상으로 전투가 전개되었을까.

지산동 앞들은 발갱이들이라고 불린다. 명칭의 유래는 발검(拔劍)들에 비롯된다.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는 의미가 바로 발검이다. 고서에 따르면 935년 지금의 선산읍 생곡리 앞 낙동강 연안에 있던 견훤을 무찌른 왕건은 마지막까지 항전하는 견훤의 아들 신검을 쫓기 시작했고, 이듬해인 936년 지산동 앞들에서 신검을 격퇴했다.
칼집에서 칼을 뽑은 (발검 拔劍) 왕건이 신검을 격퇴한 지산동 앞들인 발갱이들은 바로 후삼국 통일의 현장이다.

918년 궁예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고 권력을 쥔 왕건은 927년, 견훤과의 팔공산 동오수 전투 (桐藪 동수전쟁)에서 대패한 후 선산지역으로 후퇴해야 했다.

전열을 가다듬은 것은 8년 후인 935년이었다. 왕건은 그동안 지금의 선산인 당시 일선군 냉산(태조산)에 숭신산성(崇信山城)을 쌓고, 그 아래의 낙산동 일대에 군창( 軍倉)을 일곱 개나 지어 군량을 비축하는 등 장기전을 마무리했다. 낙산동 일대를 칠창리(七倉里)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에서 유래하고 있다.

전열을 가다듬은 왕건은 그해 선산읍 생곡리 앞 (지금의 일선교 근처 속칭 어성정(禦城亭) 태조방천으로 불리는 낙동강 연안에서 견훤과 후삼국 통일을 위한 싸움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935년 선산 전투는 8년 전 분루를 삼켜야 했던 팔공산 동오수 전투의 악몽을 말끔히 씻어낼 수 있었다. 선산에서 대승을 거둔 왕건은 이듬해인 936년 여세를 몰아 견훤의 아들 신검과 고아읍 관심리 앞들에서 제1차 결전에 들어갔다. 당시 왕건이 신검을 막기 위해 주둔한 관심(官心)평야는 어검(禦劒)평야, 지금은 어갱이들이라고 불린다.
아울러 괴평리 앞뜰에 진을 쳤던 신검의 진지를 왕건이 점령한 후부터 이곳은 점검(占劒)평야 즉 점갱이들이라고 불렸다.

어검들 전투에서 패배한 신검은 936년 인접해 있는 지산동 앞들과 사기점(신평2동)으로 피신했고, 이곳에 미리 도착해 진을 치고 있던 왕건은 신검을 사로잡고 그를 굴복시켰다. 결국 이곳은 당시 칼집에서 칼을 뽑고 신검을 격퇴했다는 의미에서 발검(拔劍)들이라고 했고, 이후 발갱이들로 불렸다.

현대인들은 단순히 자연풍광 속에서 즐기는 것 이상의 인문학적 가치를 음미하려고 한다. 지산 샛강의 수려한 생태환경에다 후삼국 통일을 완성한 소중한 현장에 역사의 옷을 입힌다면 일거양득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여론이 힘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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