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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최양업 2대 신부가 2년간 머문 천주교 성지, 구미시 무을면 안곡리

김경홍 기자 입력 2021.09.05 18:57 수정 2021.09.08 17:54

천주교 교우촌에 2년간 머물며 16, 17번 서한문 작성
한양으로 과거 가던 선비들이 머물던 역마촌과 안곡역
퇴계 이황 • 무릉도인 주세봉 시인의 흔적도 남아 있어

↑↑ ‘최양업 신부 초상’(김형주, 캔버스에 채색, 2020, 배론성지 소장)/ 서울대교구 제공


[K문화타임즈= 김경홍 기자] 경북 구미시 무을면 안곡리에는 천주교 선교 초기에 형성된 교우촌이 있었다. 특히 이곳이 주목받는 것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극에 달했던 1850년대 2년간 이곳에 거처를 마련한 2대 신부인 최양업 신부가 16, 17번째 서한문을 작성해 르그레 주아 리부이 신부에게 보낸 역사성 때문이다.

조선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사제가 된 최양업 신부의 생애는 오랫동안 김대건 신부의 활약과 순교에 묻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최양업 신부가 한국 천주교 역사에 남긴 발자취는 김대건 신부에 못지않을 만큼 소중한 가치를 지녔다는 평이다.

무엇보다도 최 신부는 1842년부터 1860년까지 18년간 매년 보고 듣고 체험한 내용을 유창한 라틴어로 써서 스승 신부들에게 19통의 서한을 통해 보고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이 중 16, 17번째 서한문을 안곡에서 작성했다는 점은 주목할만한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1850년대 안곡리에서 2년 동안 거처했다는 점은 천주교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다.

1850년대는 천주교 박해가 가장 심했던 무렵이었다. 이 당시 최 신부는 5개 도에 걸쳐 100개가 넘는 광활한 전교 지역을 돌아야 했다. 신자가 둘이나 셋밖에 없는 공소도 마다하지 않고 방문했는가 하면 다섯 가구의 신자 집을 방문하기 위해 사흘 길을 걷기도 했다.

조선 조정은 처음에는 천주교에 너그러운 태도였다. 그러나 천주교의 평등 상이 조선의 신분 질서를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와 천주교도들이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박해가 시작됐다. 특히 조선 정조 때인 1791년에 전라도 진산에 살고 있던 유학자 윤지충이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박해가 본격화됐다. 그는 불효자라며 비판받다가 끝내 관청에 잡혀가 처형됐다.

이후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계속 이어졌다. 조선 사회는 유교에 바탕을 둔 윤리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천주교에서 가르치는 평등사상이나 생활 윤리가 잘 맞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선의 지배층은 사회 질서가 어지러워질 것을 염려해 천주교를 배척하며 없애려고 한 것이다.

주요 박해는 선교사 주문모와 신자 100여 명을 처형하고, 400여 명을 유배한 1801년의 신유박해, 프랑스 선교사를 포함한 천주교도 100여 명을 처형한 1839년의 기해박해,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포함해 8,000여 명을 처형한 병인박해 등이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 한반도에 들어온 천주교는 100여 년 동안 모진 박해를 받았다. 조선의 지배층은 천주교의 가르침이 조선의 신분 제도와 전통 풍습을 해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많은 선교사와 신자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혹독한 벌을 받았다.

특히 1852년부터 1854년 사이의 사목활동은 체포의 위기, 공소의 습격 등의 잦은 박해 속에서 이뤄졌고, 선교사 중 가장 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
최양업 신부는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12년간 온갖 고난과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사목한 덕분에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1861년 6월 15일, 영남지방 전교를 마치고 주교에게 사목활동 상황을 보고하려고 상경하던 중 경북 문경에서 갑자기 쓰러진 최 신부는 40세의 아까운 나이로 사망했다.

이 기간 2년여를 머물렀던 역사성 때문에 더욱 주목을 받는 무을면 안곡리는 역마촌과 교우촌, 퇴계 이황과 무릉도인 주세봉 시인의 흔적,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와 나들이객들의 숨결이 면면히 살아 숨쉬고 있는 조선 역사의 보고이다.

 

↑↑ 천주교 성지 무을면 안곡리/ 사진 =김경홍 기자


무을면 안곡리는 2010년대 들어서면서 조선시대의 보고(寶庫)로서 집중적인 조명을 받고 있다. 무을 생태공원 조성과 함께 조선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알려진 우물이 복원되기 시작하면서 안곡리에 묻혀 있는 조선의 역사가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천주교 교우촌과 최경업 신부가 안곡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성지로서의 가능성까지 열어놓고 있다.

안곡리의 또 다른 이름 안실(安室)은 설핏 보아도 이곳에 역마촌이 있었음을 짐작게 해 준다. 지명이 말해 주듯 안곡리에는 조선시대 한양으로 가는 길목으로 개령, 양천역과 상주 청리역을 이어주는 안곡역이 있었다.

김천찰방 관할이었던 당시 안곡역은 중마 2필, 하마 4필, 역리 62인, 노 20인, 비 5인을 거느린 경북도 서북쪽의 주요 역 중의 하나였다.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는 선비들과 나들이객들이 우물을 마시고, 말의 짐을 풀어 쉬어가곤 했던 이곳에는 당시의 역사를 증빙시켜주는 우물물이 지금도 남아 있어 아련한 역사의 향기를 느끼게 하고 있다. 아울러 우물가를 둘러친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안곡 역사의 그윽함을 뒷받침해 준다.

안곡역이 있던 안곡리에는 지금도 조선시대의 대문호 2명과 박해받던 천주교의 역사의 단편이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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