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기획

기획/ 희비의 구미 현대정치사, 그 주인공들은?

김경홍 기자 siin0122@hanmal.net 기자 입력 2022.01.06 00:37 수정 2022.01.06 00:44

김성조, 김태환, 심학봉, 구자근. 김석호, 채동익, 김연호, 이병길, 전인철, 김대호

↑↑ 구미 낙동강/ 사진= 네이버 켑쳐


[k문화타임즈= 김경홍 기자] 정치 지망생들은 총선과 지방선거 등 2년에 한 번씩 치루는 선거 때마다 희비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2018년 지방선거일이 4년 가까이 흘렀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돌아보면 엊그제만 같아 보일 것이다. 희비의 순간이 그들에게는 흐르는 시간과 무관하게 추억 속에 명료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5개월 앞으로 다가온 지방선거를 앞두고 역대 총선과 지방선거 속으로 걸어 들어가 구미 정치사에 희비의 족적을 남긴 인사들을 만나본다. [편집자 주]


지천의 물줄기를 받아들여 강을 이룬다. 그 강물 속으로 탁류와 청류가 흘러든다. 이게 역사다. 역사는 흘러드는 사연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래서 거대한 역사의 바다는 어떠한 강물도 거부하지 않는다. 그래서 해불양수(海不讓水)이다.
정치도 강물이나 바다의 속성을 빼닮았다. 희비의 순간순간을 가감 없이 받아들여 정치사를 써 내리기 때문이다.

김윤환, 박세직 의원의 바통을 이어받은 3선의 김성조, 김태환 의원이 무대 뒤로 사라지면서 구미는 정치적 혼란기를 맞는다.
김성조 의원을 누르고 등원한 기술고시 출신의 심학봉 의원은 2년 가까이 공직선거법 관련 송사에 매달려야 했다. 이후 심 의원은 20년 가까이 대형 민원으로 남아있던 삼진 센추리 타워 철거, 구미복합 역사 승인, 북구미 IC 신설 확정, 의료복합단지 신설과 구미의 최대 숙원 사업인 KTX 구미 유치 성사를 목전에 두고, 진골 친박계로부터의 정치적 수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의원직을 집어던져야 했다.

김태환 의원도 제몫을 해냈다. 어머니를 소재로 한 노래를 부를 때마다 눈시울을 붉히곤 했던 인간적인 김 의원은 지역 발전을 위한 길 위에서는 연약함을 벗어던졌다. 장기 계획으로 잡혀있던 생곡-구포 간 강변우회도로 (고속화 도로)를 단기 계획으로 변경시켰는가 하면 4공단 분양가 인상을 추진하던 수자원 공사의 저의를 저지시키는 등의 업적을 구미 정치사에 남겼다.

2016년 20대 총선 후보 선출을 위한 새누리당 경선에서 분루를 삼킨 구자근 의원은 4년간 불면의 시간을 보냈고, 쏟아부은 땀방울은 2020년 총선 승리의 과실을 수확하게 했다.

20대 총선 경선에서 국방부 차관 출신의 진골 친박계인 백승주 의원에게 분패하면서 선거 사무실을 정리해야 했던 구자근 의원은 무소속 출마를 강력하게 권유하는 여론을 뒤로한 채 고독한 4년의 세월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끝내 그 속에서 21대 총선 당선이라는 대어를 낚아 올렸다. 시의원 낙선과 당선, 도의원 재선 당선, 국회의원 낙선과 당선이라는 굴곡의 정치사를 극복해 온 그는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었다.

김석호 전 도의원 역시 구미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도의원을 사직하고 총선과 시장 선거에 연거푸 도전장을 내민 그의 도전 정신에 대해 세상은 다양한 의견을 내놓고 있다. 동정론이 고개를 들 만큼 그의 도전은 지속되고 있다.

4선 시의원이라는 최장수 기록을 쓰면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도의원에 당선된 전인철 전 도의원도 입지 전적의 인물이다. 도의회 입성 2년 후 사직서를 내던지고 총선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에 뛰어든 그는 결국 비정한 정치 세계에 환멸을 느끼며 꿈을 접었다.

채동익 구미시설공단 이사장도 입지전적의 인물이다. 2006년 무소속으로 시장에 출마해 13%의 득표율을 보이면서 저력을 과시한 그는 이후 12년에 걸친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분골쇄신해 왔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2018년 구미시장 선출을 위한 민주당 경선에서 눈물을 곱씹어야 했던 채 이사장은 공천 후보인 현 장세용 시장의 선거 캠프에 들어가 주경야독했고, 구미 최초로 진보 시장을 탄생시키는 밑거름 역할을 했다. 특히 채 이사장은 구미시설공단을 연거푸 최우수 공단으로 안착시키는 또 다른 역사를 썼다.

김태환 의원의 형인 허주의 보좌관을 지낸 김대호 의원은 시의원의 이력을 발판삼아 두 번에 걸친 도의원 선거에서 보수정당 후보를 누르며 이변을 속출한 주인공이다. 하지만 19대 총선에서 낙선한 그는 정치계를 떠났다.

김연호 변호사는 번번이 보수 정당 공천에서 낙천했으나 19대 총선에서는 종주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표를 맡은 미래당 구미지구당을 창당하면서 친박 세력이 부상하는 발판을 마련했으나, 냉정한 정치 세계는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구미 정치사에 희비의 족적을 남긴 인물들

△4선 고지 앞에서 뜻을 접은 김성조 의원의 정치 이력

4선 고지 앞에서 뜻을 접어야 했다. 안타까움도 없지 않았다. 19대 총선 막바지인 3월 17일, 여론조사 경선 패배의 소식이 알려지자, 급거 상경해 불공정 경선을 이유로 재심을 요구했고, 새누리당 공천위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탈당과 함께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하지만 7일 만에 탈당 철회와 함께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12년 국회의원 이력 앞에 멈춰서야 했다.

특히 2명의 도의원과 4명의 시의원이 새누리당 동반 탈당 기자회견과 탈당 철회의 여파를 초래한 그는 정치적 부담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처지에 놓이기도 했다.
이러한 사족에도 불구하고 김성조 국회의원은 김윤환- 박세직- 박재홍이라는 3대 거두, 1기의 구미 현대 정치사를 홀몸으로 마감한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정치사적 의미가 부여된다.

1기의 구미 현대 정치사를 마감한 2000년 실시된 16대 구미 총선은 1명을 선출하는 단일 선거구였다. 당시 선거에서 박세직 의원은 장고 끝에 불출마를 선언했다.
하지만 이회창을 입당시켜 그를 킹으로 만들려던 김윤환 전 의원은 하룻밤 사이에 이뤄진 공천자 지명과정에서 낙천했고, 극렬히 반발하면서 창당한 민국당 후보로 출마했다.
그에 맞선 이가 바로 당시 경북도의회 상임위원장을 맡고 있던 41세의 김성조 의원이었다. 정치 혁신을 기치로 내건 당시 이회창 총재의 한나라당 체제에서 후보가 된 그는 허주와 두 차례에 걸쳐 허주에게게 도전장을 내민 최종두 신림종합 건설 명예회장을 누르면서 당선됐다.
2기 구미 현대 정치사의 출발점이었다.

김 의원은 그러나 때때로 험로를 가야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파동으로 한나라당이 위기에 몰렸던 2004년 17대 총선에서 그는 열린우리당 조현국 후보의 강력한 도전에 맞서야 했다. 하지만 결과는 4만 2,550표 대(對) 2만 281표였다. 예상이 빗나간 선거 결과였다. 보수의 중심지인 구미의 벽은 그만큼 견고했다.
또 당시 김 의원은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사촌인 자민련 소속 박준홍 후보로부터도 도전장을 받았으나, 수월하게 극복했다.

18대 총선이 실시된 2008년에는 자신의 위원장으로 있던 한나라당 구미갑 사무국장 출신의 임경만 전 시의원의 도전에 맞서야 했다. 정치무상의 실체를 단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기도 했다. 이 뿐이 아니었다. 그는 한나라당 공천과정에서 절친인 김석호 전 도의원의 도전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

이처럼 주요 고비마다 정치적 사건을 기록한 김 의원은 19대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공천위가 실시한 여론조사 경선에서 심학봉 의원에게 패배하면서 4선의 꿈을 접어야 했다. 권불십년이요, 화무십일홍이었다.

△ 단식과 삭발, 투혼의 정치 역경, 김석호 전 도의원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김성조 의원의 절친이었던 김석호 전 도의원은 김성조 의원과 함께 구미 차세대 정치를 꾸려나갈 소위 40대 기수론의 대표적인 인물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김 의원은 선거 때마다 행운의 여신이 비껴지나면서 낙루를 삼켜야 했다.
2006년 도의원의 이력을 내세운 김 의원은 한나라당 구미시장 후보 경선에 나서 남유진 전 시장과 불꽃 튀는 접전을 벌였으나 눈물을 곱씹어야만 했다. 당시 김성조 의원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기대했지만 낙선한 김 의원은 오랜 세월 쌓은 절친의 우정과 등을 돌렸다.

2년 후인 2008년 18대 총선을 앞두고 김 의원은 김성조 의원, 이재순 구미폴리텍대 대학장, 채동익 전 구미시 경제통상국장, 김진태▪ 이병길 변호사와 함께 한나라당 공천을 신청했으나 낙천된 후 본선 출마를 포기했다.
이후에도 김 후보의 도전은 지속됐다. 2010년 실시된 구미시장 선거에서 친박 연합 후보로 출마한 그는 30% 중반대의 득표력을 과시하기도 했지만 행운의 여신을 만날 수는 없었다.

특히 김 의원은 2011년, 박정희 대통령 홍보관 입지 문제를 이유로 40여 일에 걸친 시청 앞 단식에 들어갔고, 19대 총선을 이틀 앞둔 4월9일에는 삭발을 단행하기도 했다.

19대 총선을 앞두고 실시한 경선에서 심학봉 의원에게 패하자, 김 의원은 김성조 의원, 전인철 전 도의원과 함께 후보 단일화에 나섰다. 하지만 단일화 불참을 선언하는 그는 김성조 의원과 전인철 전 도의원 등 2인 간의 단일화라는 뼈아픈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2인 간의 단일화에 성공한 김성조 의원이 새누리당 탈당 철회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김 의원에게는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으나,파죽지세의 새누리당 바람과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후에도 그는 시장과 총선에 뛰어들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네 번에 걸친 도전, 채동익 구미시설관리공단 이사장
2006년 구미시장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에서 낙천하자, 본선에 진출한 그는 13%의 득표율을 보였다. 보수 정서가 강했던 당시로서는 이변이었다.

2년 후인 2008년 18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에서 패배하자, 본선 진출의 꿈을 접은 채 이사장은 한나라당 당원 신분으로 2년 후 실시된 구미시장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다. 결과는 낙천이었다.
이어 19대 총선에 명함을 내밀었으나 여론조사 경선 대상에서 배제되자, 본선 진출의 꿈을 접었다.
이후에도 그의 도전은 지속됐다. 20대 총선에서 낙천한 채 이사장은 2018년 진보 성향의 민주당으로 말을 갈아타고 시장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에 뛰어들었다. 결국 장세용 현 시장에게 분패한 그는 장 후보 선거 캠프에 합류해 모든 것을 바쳤다.

△ 변화무쌍했던 19대 총선, 전인철 의원
4선의 시의원과 구미시의회 부의장, 의장을 역임하면서 나름대로의 탄탄한 영역을 구축해 왔다. 구미시의회 의원 당시 4선의 의장을 역임한 윤영길 의장에 맞섰으나 패배한 그는 5대 의회 전반기 들어 꿈속에도 갈망했던 의장에 당선됐다.
후반기 들어서도 의장 출마를 고심했으나, 한나라당 소속 구미갑구 출신의 2명 의원을 끌어안는 데 실패한 그는 재선 의장의 꿈을 접었다.
이후 한나라당을 탈당해 구미 도의원 제1선거구 (도량동, 선주원남동)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전 도의원은 무소속 돌풍을 일으키면서 한나라당 후보를 제압하는 이변의 정치사를 썼다.

이어 임기 2년 반을 남겨놓은 2012년 12월 말 도의원직을 벗어던진 그는 19대 총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이후 행보는 변화무쌍했다. 새누리당 공천 접수마감일이 임박해오자, 새누리당 입당과 함께 공천신청서를 접수했다. 이어 여론조사 경선 대상에서 배제되자, 탈당해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또 3월 17일부터 친박 연합 김석호 후보와 단일화 협상에 들어갔으나 여의치 않자, 무소속 출마를 선언한 김성조 의원에게 돌아선 그는 선거 대책위원장직을 수락하면서 총선 본선 출마의 꿈을 접었다.

△화끈한 정치인의 기질, 이병길 변호사
이병길 변호사는 한결같이 초심을 지킨 몇 안 되는 정치인으로 평가된다. 2008년 김성조 의원, 이재순 구미폴리텍대 대학장, 채동익 전 구미시 경제통상국장, 김석호 전 도의원, 김진태 변호사와 함께 한나라당 공천을 신청한 이병길 변호사는 낙천하자, 꿈을 접었다.

이어 4년 후인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공천을 신청한 이 변호사는 여론조사 경선 대상에서 배제되자, 특정 후보의 지원 요청을 뒤로한 채 현장으로 복귀했다. ‘ 새누리당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상황 속에서도 초지일관 새누리당과 함께한다’는 내용의 마지막 보도자료는 세상에 깊은 여운을 남겼다.

△무소속의 신환, 안타까운 좌절 김대호 전 도의원
김대호 전 도의원은 파란만장한 정치의 길을 걸어왔다. 김윤환 의원을 보좌해오며 정치계에서 잔뼈가 굵은 김 의원은 처음 출전한 기초의원 선거에서 패배했으나 4대 시의원 선거에서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공직선거법 개정으로 공천제가 도입된 5대 의회에서는 출전을 포기했다. 하지만 2년 후인 2008년 10월 실시된 도의원 보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김 의원은 5대 지방의회 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출마해 연속 당선되는 등 이변을 써 내려갔다.
하지만 2012년 12월 도의원직을 중도 사퇴하고 국회의원을 겨냥했으나, 3선에 도전하는 김태환 의원을 극복하는데 실패한 그는 분루를 삼키면서 정치계를 뒤로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근거리에 보좌했던 김연호 변호사
구미지역 정치계 인사 중 새누리당 박근혜 위원장과 가장 먼저 인연을 맺은 인사 중의 한 사람이 바로 김연호 변호사였다.
2002년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한 인물은 새누리당 박근혜 위원장이었고, 김 변호사는 당시 구미시 지구당 위원장으로 활동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구미에서 열린 김연호 변호사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축사 할 만큼 각별한 인연이었다.

이후 박근혜 전 대통령과 함께 한나라당에 입당한 김 변호사는 제17대에 이어 18대 총선을 앞두고 김태환 의원, 박해식 부장판사, 이정임 전 시의원과 함께 공천을 신청했으나 낙천의 고배를 마셨다.
19대 총선을 포함해 내리 세 번째 공천을 신청했다가 낙천한 김 변호사는 19대 총선을 앞두고 실시한 새누리당 후보 공천을 위한 여론조사 경선에서 배제되자, 경선대상자 선정 무효확인 소송 및 경선대상자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20대, 21대 총선에서도 그의 도전은 지속됐다.







저작권자 K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