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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박정희 대통령 얼이 깃든 산림 꿈나무 포플라 장학금

서일주 기자 goguma1841@naver.com 기자 입력 2022.12.30 13:22 수정 2023.01.18 20:44

1978년부터 고등학교‧ 대학생 1,398명 수혜

[k문화타임즈 =서일주 기자] 경상북도가 30일 도청 다목적홀에서 포플라 장학생으로 선발된 23명에게 장학증서와 장학금 100만 원을 수여했다.
포플라 장학금은 숲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지역 산림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지역 임업인 및 산림분야 종사자 자녀와 지역 소재 산림분야 고등학생·대학생 중 시장‧군수, 학교장의 추천을 받은 모범학생을 선발해 지급하고 있다.
1978년부터 지금까지 1,398명에게 5억 2,400만 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장학금 재원은 1967년 산림사업 현지 시찰 중에 대통령 하사 격려금으로 국토녹화 취지를 살리기 위해 칠곡 북삼읍 낙동강 변에 이태리포플러 나무를 식재하고 1977년 벌채·매각한 수익금으로 기금을 조성하면서 시작했다.
또 순환 수렵장 운영 수익금, 도유림 입목 매각대금, 도 출연금, 기탁금 등을 추가해 15억 원을 경북통합관리기금에 적립하고 이자 수익금으로 운용하고 있다.

 

 

↑↑ ↑↑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 사진 출처=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박정희 대통령 얼이 서린 포플라 장학금 수혜 대상 확대

경상북도의회는 지난 2020년 5월 12일 박채아 의원이 대표발의한 ‘경상북도 포플라 장학기금 관리 운용 조례 일부개정조례안’을 가결했다.
조례안은 장학금 수혜대상을 현재 고등학생에서 대학·대학교 재학생으로 확대해 장학기금의 효율적 운영이 가능하도록 했다.
포플라 장학기금은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의 격려금으로 식재한 포플라 나무를 1977년 벌채·매각한 수익금 6천 6백여만 원으로 조성됐다. 1978년부터 2019년까지 1천 352명의 중·고등학생에게 총 4억 7,840만 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포플라 장학생 선발은 애림 사상을 드높이고 미래 산림 꿈나무를 육성하기 위해 ‘경상북도 포플라 장학기금 관리 운영 조례’에 따라 도내 임업인 및 산림 분야 종사자 자녀와 산림 특성화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지난 1978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이어지고 있다.
1967년 산림사업 현지 시찰 중에 대통령이 하사한 격려금으로 국토녹화 취지를 기리기 위해 칠곡군 북삼읍 낙동강 변에 이태리 포플라 나무를 심었고, 1977년 벌채·매각한 수익금으로 기금을 만들면서 포플라 장학금이 비롯됐다.
이후 순환 수렵장 운영 수익금, 도유림 입목 매각대금, 도출연금, 기탁금 등을 추가해 현재 15억 5,800만 원을 경상북도 통합관리기금에 적립해 이자 수익금으로 운용하고 있다.

1967년 3월 30일 당시 선산군 일선교 준공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은 치사를 통해 “ 우리 고향은 문자 그대로 선산, 착할 선 자 뫼 산자, 착한 산인데”라며 자연보호 운동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우리 선산은 옛날부터 살기 좋고, 산천이 아름답고, 우리 고장에서는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났다. 그런데 왜 우리 고향의 산들이 저렇게 모두 뻘겋게 헐벗고 있나. 선산을 지나다닐 때마다 우리 고향이 딴 고향보다 산이 제일 나쁘다는 생각을 한다. 선산인데 선산이 아니라 나쁜 산, 악산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고향 산의 산림을 애호하고, 나무를 가꾸고 심고 하는 고향 산천을 아끼는 마음이 적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오지 않았겠나.
앞으로 우리 고향을 사랑하면 할수록, 무엇보다도 우리 고향의 산에 아름다운 나무를 우리가 심고 가꾸고 보호해야 한다 “
그날 박정희 대통령은 산림 사업 현지 시찰의 일환으로 칠곡군 북삼읍을 찾았다. 자신의 출생지인 상모동과 수 킬로미터에 인접해 있는 이곳을 방문한 박 대통령이 포플라나무를 심으라면서 군 관계자에게 하사금을 전달했고, 이를 계기로 포플라 장학금이 태생하게 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산림녹화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1967년 구미(선산)와 칠곡을 방문한 박 대통령은 1년 반 만인 1068년 11월 11일 다시 고향 구미인 선산 농산물 가공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박대통령은 또 치사를 통해 자연보호 운동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면서 견해를 해외로 확장해 나갔다.
“우리 한국의 산을 보라. 전부 벌거숭이 같은 산에 나무가 있다 하더라도 앙상한 나무들이 붙어 있다. 외국은 전부 울창하고 무성하다. 땅이 좋고 비가 잘 와서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일 년 내내 거의 비가 안 오는 땅에서도 훌륭한 나무를 심어서 몇 년 내에 울창한 숲을 이뤘다. 어떻게 하면 이런 땅에다 나무를 심어서 울창하게 만들 수 있겠느냐에 대해서 이 사람들은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노력하고 당대에서 안 되면 자손들까지 대대로 노력해서 성공했다.

얼마 전에 동남 ‘아시아’와 ‘뉴질랜드’를 방문하고 왔다. 그 나라에서는 온 산이 꼭 공원과 같이 목장이 아니면 울창한 숲이다.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었느냐, 그렇지 않다. 산에 심겨 있는 나무, 목장의 풀, 이것은 거의 다 지난 백 년 동안에 ‘뉴질란드’사람들이 동양이나 ‘구라파’에서 가져와서 전부 개량을 했다.
그 지방의 농산 수목이라든지 풀이라든지 이런 것이 거의 없어지고 개량을 했다는 것이다. 그 지방에서 키우고 있는 소라든지 양이라든지 전부 ‘구라파’에서 가져왔다.
우리들 당대에는 잘 사는 부자가 되지 못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우리들 다음 대에 가서는 우리도 남과 같이 훌륭한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자연보호 운동에 대한 절박감은 박 대통령 재임 기간 내내 최대의 국책과제였다. 1977년 9월 5일 금오산 대혜폭포를 방문하고 널 부러진 병조각을 줍는 것이 계기가 돼 자연보호 운동의 발상지 구미를 태생시킨 열흘 후인 1977년 10월 5일 박 대통령은 자연보호 운동과 산업화 시대를 연계한 치사를 통해 자연보호 운동을 산업화와 연계해 구체화시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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