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림사의 주불전인 칠곡 송림사 대웅전은 임진왜란의 전란을 겪은 후 1649년에 중수됐다. 이후 1755년과 1850년 두 차례의 중수를 거쳐 현재 모습으로 남아 있는 건물이다. 17세기 이후 재건한 불전들이 정면 3칸, 옆면 2칸을 채택했던 추세와 달리 정면 5칸, 옆면 3칸으로 이전의 규모를 지키고 있다./ 사진 =문화재청 제공
[k문화타임즈= 김미자 기자 ] 임진왜란의 전란의 상처를 안고 있는 경북 칠곡군 송림사 대웅전이 17~18세기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됐다.
문회재청은 이외에도 17~18세기 경북 팔공산 주변의 지역적 특색을 지닌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인 ’대구 동화사 극락전(大邱 桐華寺 極樂殿)‘과 ’대구 동화사 수마제전(大邱 桐華寺 須摩提殿)‘ 등도 보물로 지정했다.
송림사의 주불전인 칠곡 송림사 대웅전은 임진왜란의 전란을 겪은 후 1649년에 중수됐다. 이후 1755년과 1850년 두 차례의 중수를 거쳐 현재 모습으로 남아 있는 건물이다. 17세기 이후 재건한 불전들이 정면 3칸, 옆면 2칸을 채택했던 추세와 달리 정면 5칸, 옆면 3칸으로 이전의 규모를 지키고 있다.
규모뿐 아니라 실내 구성도 당대 흐름인 중앙에 대형 불단을 설치하고 후불벽을 두어 예불공간을 확장하는 방식을 따르지 않고 옛 방식을 취하고 있다. 공포의 짜임은 비교적 시기가 올라가는 교두형 공포로 짰는데, 이런 유형의 공포는 팔공산 일대 사찰 등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지역 특색이다.
교두형은 흔히 공포의 짜임에서 전면으로 길에 내민 활이나 날개모양의 살미형식이 아니고 끝을 각지게 깎아 낸 모양의 공포 형식이다.
송림사 대웅전은 17세기 중엽 중수된 이후 18세기 말과 19세기 중엽 등 두 차례의 중수를 거치면서 주칸의 크기를 재조정하고 외관이 달라지는 큰 변모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팔공산 일대 사찰건축의 특징이 반영된 옛 부재를 최대한 재사용해 역사성을 잘 계승하고 있다.
대구 동화사 극락전은 1600년(선조 33년)에 중건을 시작했고, 그중 금당(金堂)을 제일 먼저 건립했는데, 지금의 극락전으로 판단된다. 이후 문헌기록을 통해 1622년에 중창된 것을 확인했다. 임진왜란 이후에 재건된 조선 후기 불전 중에서는 건립 시기가 빠른 편에 속하며, 처마와 창호, 단청 등에서 일제강점기 이후의 변화가 확인되지만, 전체적인 구조와 의장은 건립 당시의 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다.
금당(金堂)은 사찰의 본당으로 부처님을 모신 불전을 이르는 말이다.
또한, 창건 당시(통일신라)의 위치, 기단과 초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상부에 17세기 전반의 목조건축을 세워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창건 당시 기단과 초석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감주나 이주 없이 동일한 기둥 간격의 평면을 구성하고 있으며, 상부 목조가구의 기본틀 역시 고대기법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도 마룻바닥 하부에 방전(方塼, 네모난 벽돌)이 깔려있는 등 옛 기법이 많이 남아 있다.
감주·이주는 사찰 불전에서 불상 안치와 예불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내부의 기둥을 줄이거나, 기둥 위치를 뒤쪽으로 물리는 등 불전 평면의 공간 사용에 따라 적용하는 기법이다.
극락전의 공포는 미세한 첨차 길이의 조정을 통해 공포 간의 간격을 일정한 비례로 구성하고 있으며, 제공의 내외부 끝을 교두형으로 처리하고 있다. 또 추녀와 선자연이 걸리는 모서리 부분 퇴칸의 공포에 병첨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이 건물을 조영한 목수의 탁월한 실력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기법은 17~18세기 팔공산을 중심으로 영남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특정 지역에서 활동했던 기술자 집단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어 학술적으로도 매우 가치가 높다.
제공(提栱)은 공포의 짜임에서 첨차와 살미가 층층이 짠 것이며, 첨차(檐遮)는 공포에서 기둥위에 도리방향으로 살미와 십자맞춤으로 되는 짤막한 부재이다. 선자연은 추녀 옆에서 부챗살 모양으로 배치한 서까래이며, 병첨은 다포계의 공포에서 귀공포와 옆의 공포(주간포)가 서로 맞닿아지는 각각의 첨차를 하나의 부재로 연결한 첨차이다.
대구 동화사 수마제전은 극락전의 뒤쪽에 있으면서 고금당(古金堂)이라고 전한다. 1465년(세종 11년)에 건립되었고, 임진왜란 뒤 1702년(숙종 28년)에 중창되었다는 기록이 전하며, 현재의 건물도 17세기 이후의 기법과 옛 기법이 공존하고 있다. 수마제전은 사방 1칸 규모로 다포식 공포를 가지며 맞배지붕으로 된 불전인데, 이처럼 사방 1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불전은 현재 국내에서 수마제전이 유일하다. 옆면에 공포를 구성하지 않았지만 평방을 구성하고, 귀포의 모습에서 이전에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이었던 것을 해체해 일부 부재를 재사용해 다시 지으면서 지붕형태가 변경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다포식은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꾸며 놓은 건축양식이며, 귀포(耳包)는 건물 모서리에 놓이는 공포이다. 또 맞배지붕은 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고, 용마루까지 측면 벽이 삼각형으로 된 지붕이다.
수마제전의 공포 의장은 극락전과 마찬가지로 교두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공포 의장 기법은 앞서 살핀 송림사 대웅전, 동화사 극락전 등과 함께 17~18세기에 걸쳐 팔공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 특징을 보여준다.
지붕가구는 삼량가로 구성됐으나, 중도리를 사용해 마치 오량가 구조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중도리 없이 하나의 서까래만 걸친 삼량가의 독특한 방식으로 돼 있다. 이러한 지붕가구 기법은 다른 문화재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전통 목조건축 지붕가구 기법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종보 위에 설치한 고식의 솟을합장 부재가 남아있는 것도 중요한 특징으로 언급할 만하다.
삼량가‧오량가는 가구의 구조형식으로 도리(지붕가구 구성에서 기둥, 보와 함께 뼈대를 구성하며, 서까래와 직교해 서까래를 받치는 부재이다. 위치에 따라 처마도리, 중도리, 종도리로 불림)의 개수에 따라 세개면 삼량가, 다섯개면 오량가임. 오량가는 전후의 처마도리와 중도리가 각각 2개씩이고 최상단에 마룻대(종도리)를 두어 총 5개의 도리가 사용된 가구이다.
종보는 대들보 위에 설치되는 마지막 보이며, 솟을합장은 종보 위에서 마룻대(종도리)의 좌우이동을 방지하기 위해 ㅅ자 모양으로 버티어대는 부재이다.
3건의 보물 지정 예고된 문화재는 17~18세기에 걸쳐 팔공산을 중심으로 영남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지역적 특성과 당시 이 일대에서 주로 활동했던 같은 계보의 기술자 집단에 의해 조영된 건축물이다. 시대적으로 앞서고 각각의 구조적 특징이 나타나 역사, 학술, 조형예술적인 면에서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하여 보존할 만한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판단했다.
문화재청은 보물로 지정된 칠곡 송림사 대웅전, 대구 동화사 극락전, 대구 동화사 수마제전 을 체계적으로 보존·활용하도록 해당 지방자치단체 등과 적극적으로 협조해 나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