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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북 출신 두 번째 대통령 탄생할까, 민주당 이재명 경기지사의 고향 안동

김경홍 기자 입력 2021.05.23 13:47 수정 2021.05.27 16:37

박정희 대통령 이어 경북 출신 여권 유력 주자

야성의 도시 안동 권영세 시장 민주당 입당, 의회 의장도 무소속

역대 총선 진보성향 출신 4선의 박해충, 초선의 오경의 의원 배출

[K- 문화타임즈 = 김경홍 기자]1963년 8월 대장으로 예편하고, 그해에 창당한 민주공화당에 입당한 박정희 총재는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470만 2,642표를 얻어 야당 후보인 윤보선을 15만여 표의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해 12월 취임한 박정희 대통령은 경북 구미가 배출한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그로부터 1979년 10월 26일 서거하기까지 16년간 그에겐 경북 구미 출신이라는 대명사가 따라다녔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지 40여 년 동안 경북에서는 대통령은 물론 대통령 후보조차 배출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내년 3월 9일 실시하는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권 유력 주자인 이재명 경기지사에 경북민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의 고향이 경북 안동이기 때문이다.

 


↑↑ 대법원 선고 직후인 2020년 7월 16일 오후 이 지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고맙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흔들림 없이 나아가겠습니다’라는 장문의 글을 올렸다. / 사진= 경기도청 제공



◇‘암초 밀어내고 8부 능선 뛰어넘은’ 안동 출신 대권 주자 이재명 경기지사 
안동시 예안면에 접어들어 시골길을 굽이치면 월곡초등학교 삼계분교장 초등학교가 외롭게 터를 잡고 있다. 이곳이 바로 이재명 경기지사의 가난한 어린 시절을 길러낸 곳이다.
유년 시절 그가 맞닥뜨려야 했던 것은 사방팔방에서 몰아쳐 오는 가난이었다. 상계초교 졸업장을 마지막으로 상급 학교 진학을 포기한 그는 한파가 스멀스멀 흘러드는 가난한 집이지만, 마음만은 편했던 정든 고향 안동 예안을 뒤로한 채 상경길에 올랐다. 저녁노을이 밀려드는 동구 밖에서 쏟아내는 어머니의 눈물이 어린 가슴을 하염없이 미어져 내리게 하는 출향 길이었다.
이후 그는 공단 노동자로 시작해 사법시험 합격과 민변 소속 변호사 활동, 참여연대 시민운동을 거치면서 진보 성향의 인물로 성장했다. 이어 성남시장을 거쳐 경기지사에 재임하고 있는 그는 유력한 대권후보로 거론되는 입지전적의 인물로 거듭났다.

하지만 높은 곳을 향할수록 비탈은 더욱더 가팔라지는 법이다. 2019년 9월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친형 강제진단 사건에 대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직위 상실형에 해당하는 벌금 3백만 원을 선고받은 그는 정치운명을 대법원 심판에 위탁해야 하는 위급한 상황을 맞아야 했다.

세상은 그를 응원하고 나섰다. 함세웅 신부( 전 민주주의 국민행동 상임대표), 송기인 부마 민주항쟁 기념재단 이사장, 이수호 전태일 재단 이사장, 진영종 전 참여연대 운영위원장 등 31명은 (약칭) 이재명 범대위 준비위원회를 발족했다. 이국종 아주대 외과 교수는 또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대법원에 제출하기도 했다.
경기도의회 여야 의원 120여 명도 1심 판결에 대비한 1차에 이어 2차 탄원서를 대법원에 제출했다. 광명시 의회를 비롯한 기초의회 의원들의 탄원서 제출 움직임도 확산해 나갔다.
그리고 2020년 7월 16일 대법원은 '친형 강제입원'과 관련해 허위사실을 공표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재명 경기도지사에 대해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 결정을 내렸다. 지사직 유지와 함께 대권가도에 놓여 있던 거대한 암초를 거둬낸 순간이었다.

대법원 선고 직후인 이날 오후 이 지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고맙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흔들림 없이 나아가겠습니다’라는 장문의 글을 올렸다.
그리고 그는 잠시 유년 속으로 걸어 내려갔다. “어머니는 이 결과(재판 결과)를 보지 못하고 지난 3월 13일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속 한을 풀지 못하고 눈을 감으셨습니다. 애증의 관계로 얼룩진 셋째 형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저희 가족의 아픔은 고스란히 저의 부족함 때문입니다. 남은 삶 동안 그 아픔을 짊어지고 살아갈 것입니다. 더이상 저의 가족사가 공적인 의제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희 가족들에게 너무나 잔인한 일입니다"

가난을 미워하거나 증오하기보다 사랑하고, 그 속에서 자신을 길러낸 어머니와 가난을 함께 먹고 자라난 형을 그리워하는 애절한 심적 기반이 강자보다 약자, 불공정보다 공정을 추구하는 진보 성향의 인물로 그를 길러낸 것일까.

◇야성의 도시 안동
근현대 정치사를 돌아보면 안동은 경북지역에서 야성의 정서가 강한 곳이다. 이러한 정서의 물결은 지금까지도 흐르고 있다. 2020년 7월 실시한 안동시의회 후반기 의장 선거에서는 무소속 김호석 의원이 미래통합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이어 2020년 10월 14일에는 무소속 권영세 시장이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하면서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장세용 구미시장과 함께 동행할 정도다.
역대 안동 총선 역사 속에도 야성의 물결은 고비마다 위세를 발휘했다. 진보 성향의 박해충 의원을 4선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도 안동이었고, 박해충 의원의 비서인 오경의 의원을 배출한 곳도 안동이었다.

야성의 도시를 입증케 한 역대 안동 국회의원

△박해충 의원

2005년 생을 마감했다.
1980년 5.17 내란 직후 모처에 끌려가 고문당하고 정치규제를 당했다. 4년 후 정치규제에서 해금됐다.
1987년 김영삼이 통일민주당을 창당할 때 바로 따라가지 않았고 신한민주당에 남아 사무총장에 임명됐다.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임박하자 신한민주당을 탈당해 통일민주당에 입당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의 공천에서 탈락하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으며, 정계를 은퇴했다.
아홉 번 출마해 네 번 당선될 만큼 안동 정치사의 살아있는 전설이기도 하다.


△오경의 의원
1970년대 신민당 박해충 국회의원의 비서로 활동하며 정치에 입문했다. 1980년부터 1985년까지 KBS에서 씨름 경기를 해설하기도 했다. 3번 도전 끝에 당선되면서 초선의원이 됐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안동시 선거구에 출마해 전국구 국회의원인 민주정의당 권중동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권중동 후보의 돈 봉투 발송사고가 호재로 작용했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자 한국마사회 회장에 임명됐고, 1996년까지 직을 이어갔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한국씨름연맹 총재를 역임하기도 했다.

◇안동 총선 관전 포인트

△제3대 - 1954년 5월 31일 - 1958년 5월 30일 임기 4년
갑구에서는 국민회 권오종 후보가 29.47%를 얻으면서 세 번에 걸쳐 도전장을 내민 자유당 권중순 후보와 박빙의 승부를 거뒀다. 391표 차였다.
을구에서는 무소속 김익기 후보가 40.82%를 얻으면서 27.52%를 얻은 무소속 박해충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후일 신민당 상도동계 중량의원으로서 박정희 대통령과도 막역한 교분이 있었던 것으로 잘 알려진 박해충 의원의 정치사에 처음으로 명함을 건넨 선거였다.

△제4대 - 1958년 5월 31일 - 1960년 7월 28일 임기 4년
갑구에서는 민주당 권오종 후보가 39.98%를 얻으면서 25%의 자유한 유시영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을구에서는 자유당 김익기 후보가 42.40%를 얻으면서 39.97%를 얻은 민주당 박해충 후보를 2170표 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제5대 -참의원선거 1960년 7월 29일 1961년 5월 16일 임기 2년, 국가재건최고회의 1961년 5월 26일 - 1963년 12월 16일
갑구에서는 안동 국회의원 역사상 최대인 11명의 후보가 난립했다. 무소속 김시현 후보가 10%대인 16.18%를 얻고 당선됐다.
을구에서는 세 번에 걸친 도전 끝에 민주당 박해충 후보가 39.12%를 얻으면서 차점자인 기타단체 유림 후보가 얻은 15.50%보다 2배 이상 앞서면서 당선됐다.

△제8대- 1971년 7월 1일- 1972년 10월 17일 임기 4년, 비상국무회의 1972년 10월 18일- 1973년 3월 11일
8대 선거는 7대 선거의 서력 전이었다. 패자는 승자, 승자는 패자가 되어야 했다. 민주당 박해충 후보가 47.79%를 얻으면서 28.68%를 얻은 공화당 김대진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제9대 -1973년 3월 12일- 1979년 3월 11일 임기 6년
안동시와 안동군, 의성군에서 2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를 도입했다.
공화당과 신민당 등 정치대결과 안동과 의성간의 지역대결 구도로 이어졌다.
의성 출신인 공화당 김상연 후보는 28.43%, 안동 출신의 신민당 박해충 후보는 27.84%를 획득했다. 1천16표로 차로 1, 2위가 가려지면서 동반 당선됐다


△제10대 - 1979년 3월 12일-1980년 10월 27일 임기 6년, 입법회의(1980년 10월 26일 - 1981년 4월 10일)
안동시와 안동군, 의성군에서 2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를 도입했다.
9대와 동일하게 공화당과 신민당 등 정치대결과 안동과 의성 간의 지역대결 구도로 이어졌다.
의성 출신인 공화당 김상연 후보는 30.41%, 안동 출신의 신민당 박해충 후보는 27.58%를 획득했다.
험지인 안동에서 야당 출신 박해충 후보는 9번의 도전 끝에 4번 당선되면서 4선 의원의 기록을 남겼다.
13대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15.10%를 얻으면서 3위에 머물러야 했다.


△제14대 -1992년 5월 30일 - 1996년 5월 29일 임기 4년
안동시와 안동군에서 각각 1명 등 2명의 의원을 배출했다.
안동시에는 무소속 김길홍 후보가 39.59%를 얻으면서 29.08%를 얻은 무소속 권중동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안동군에서는 민자당 류돈우 후보가 52.83%를 얻으면서 36.67%를 얻은 통일국민당 김시영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제15대- 1996년 5월 30일 - 2000년 5월 29일 임기 4년
안동군과 안동시가 통합하면서 갑구, 을구에서 각각 1명의 의원을 배출했다.
갑구에서는 통합민주당 권오을 후보가 39.71%를 획득하면서 33.10%를 얻은 신한국당 김길호 후보를 눌렀다.
을구에서는 무소속 권정달 후보가 51.13%를 얻으면서 31.56%를 얻은 신한국당 류돈우 후보를 눌렀다.

△제18대 -2008년 5월 30일 -2012년 5월 29일 임기 4년
친이계에 의한 친박계 공천학살이 파문을 일으키는 가운데 박근혜 전 대통령이 살아서 돌아오라는 명언을 남기면서 친박계가 선전했다.
친박 무소속으로 출마한 김광림 후보가 49.68%를 얻으면서 34.67%를 얻은 한나라당 김용범 후보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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