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 탄신 107돌에 돌아본다
‘대통령의 고향이기 때문에 먹이를 물어다 주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 버려라’
구미리더 그룹, ‘박정희의 철학’ 계승했더라면 구미공단은 일취월장 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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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 현장을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 [사진출처=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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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기획 칼럼 전문매체 k문화타임즈 =김경홍 기자] 1967년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 대통령의 첫 공식 일정은 구미(선산)방문이었다. 그로부터 1969년까지 내리 3년간 해마다 구미를 찾은 박 대통령은 고향 사람들에게 늘 박절했다. 선물 보따리를 싸 들고 올 것으로 믿었던 기대감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순간이었다.
‘먹이를 물어다 주겠지,하는 안이한 생각 버려라’
‘농사는 하늘이 지어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서 짓는 것’
‘남한에서 가장 나무가 없는 데가 바로 우리 고장 선산이다. 김천, 상주, 칠곡 일대도 마찬가지다’
구미를 찾을 때마다 나무라기 일쑤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러한 발언은 재떨이가 화병이 될 수도 있다는 고정관념의 파괴 즉 혁신적 가치관, 프론티어쉽(개척주의 정신)이 담겨있는 언중유골의 타이름이었다. 특히 혁신주의적 가치관은 세계 최초, 프로티어쉽은 1800년대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의 정신을 우리 실정에 맞게 계승한 한국적 자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7년부터 내리 3년 구미 방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왜 고향 사람들에게 박절했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말로는 비단같이 굉장한 것 같이 떠드는데, 행동이 따라가지 않습니다. 내 고장부터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애향심이라는 것이, 즉 애국심입니다. 내 고장을 아끼는 것이 무엇이냐... 남한에서 다른 지방의 어디보다도 가장 나무가 없는 데가 바로 우리 고장 선산입니다. 또 김천, 상주, 칠곡 일대가 가장 나무가 적습니다 ”
1967년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 대통령의 첫 공식 일정은 구미(선산)방문이었다. 그해 3월 30일 일선교 준공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은 산림녹화를 강조하면서 실천하는 애향심과 애국심을 강조했다.
이어 구미국가 공단 선정을 1년 앞둔 1968년 11월 11일, 선산농산물가공공장 (원평동 소재) 준공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은 치사를 통해 “사업의 타당성, 미래 국가 경제에 대한 기여도에 부합할 수 있는 타당한 사업 계획안을 만들어야 하고, 이런 연후에 연고를 활용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이면에는 “대통령의 고향이기 때문에 뒷짐을 지고 있어도 먹이를 물어다 주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구미를 방문해 정주여건 개선을 위한 자율적인 노력(산림녹화)과 지도자와 주민의 개척주의 정신(프로티어쉽)을 유난히 강조해 온 이면에는 향후 산업화의 전진기지로 선정될 구미공단을 장차 구미 스스로가 성장시켜야 한다는 강한 주문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게 그 시대를 함께해 온 이들이 전언이다.
6대 대통령에 취임한 1967년 직후, 박 대통령은 전자산업이 일본의 경제 성장을 견인한 데 착안해 수출을 주도한 섬유산업과 미래전략 산업인 전자산업을 함께 육성하겠다는 전략안을 수립했고, 지역 선정 절차에 착수했다. 결국 섬유도시 대구에 인접해 있고, 낙동강으로부터 채수할 수 있는 풍부한 공업용수를 호조건으로 한 구미가 결국 국가공단으로 선정됐다. 이미 박 대통령은 구미 지도자들에게 풍부한 낙동강 물은 구미공단의 생명수이기 때문에 잘 관리해야 한다는 주문을 하고 있었다.
당시 상황을 지켜본 관계자들은 고향인 구미가 선정된 데 대해 겸연쩍어했다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박 대통령은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한 1967년부터 산업화의 전진기지로 구미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구미를 방문할 때마다 유난히 산림녹화 등 기초적인 정주여건 개선을 위해 지도자와 주민들이 솔선수범하고, ‘노력하지 않아도 먹이를 물어다 주겠지, 하는’ 연고주의가 결국 지역발전을 저해한다는 경각심을 누차 강조해 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결국 1969년 국가산업단지 지정과 함께 그해 9월부터 조성에 들어간 구미공단이 윤곽을 드러내면서 작은 읍소재지에 불과했던 구미읍(지금의 구미시)으로 전국 팔도의 생산 인력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경북 도내에서 인구 1, 2위를 마크하던 26만의 상주시가 10만 중반대로 내려앉고, 20만의 김천시 인구가 10만 중반대로 내려앉을 만큼 구미국가 공단은 지역 청년들에겐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이상세계’로 각인됐다.
70년대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금성사(현 LG전자)가 들어오자, 구미공단은 TV와 반도체 등 전자제품과 섬유화학 제품을 생산하면서 산업화의 전진기지로 발돋움하기 시작했고, 1973년 자체 생산 제품 첫 수출로 탄력을 받은 구미공단은 1975년 수출 1억 달러 시대를 열면서 명실상부한 산업화의 전진기지로서 한강에 이어 낙동강의 기적을 이룬 곳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어 1988년 삼성전자가 국내 최초의 휴대전화 SH-100을 개발하고 ‘애니콜 신화’가 시작되면서 구미는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발돋움했다.
이러한 저력에 힘입어 2004년 마크한 구미의 수출액 274억 달러는 전국 수출액의 10.8%, 전국 흑자 규모의 80% 이상을 차지하면서 역사가들은 구미공단을 낙동강의 기적을 써 내린 메카로 기록했다.
70~80년대 섬유·전자 산업에서 출발해 90년대 전자·가전, 2000년대 모바일·디스플레이, 2010년 이후 차세대 모바일·의료기기·자동차부품·탄소섬유 등 시대에 따라 주력산업을 변화시켜 온 구미공단은 ‘구미 경제가 곧 대한민국의 경제’라는 수식어를 만들었다. 인구 2만 명 미만의 조그만 시골 읍이 인구 43만 명, 최대 수출기록 320억 달러의 글로벌 전자산업도시로 발돋움하는 데 기인한 상징적 표현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누군가가 먹이를 물어다 줄 것’이라는 환상 버려야지금의 구미 경제는 급격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대기업이 수도권과 해외로 이전하면서 구미공단은 위축되고 있고, 단순 하청을 통해 생존해 온 수많은 중소기업은 물량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 것인가.
1968년 11월 11일 선산 농산물 가공 공장 준공식에서 박 대통령의 강조한 치사의 내용이 생생한 이유가 있다.
“지방과 지방, 국가와 국가 간의 생존경쟁을 위한 경쟁이 치열한 현 상황에서 지연, 학연, 혈연이라는 정에 이끌려 ‘가만있는 이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선심’은 있을 수 없다. 기대해서도 안 된다”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 누군가가 먹이를 물어다 줄 것이라는 발상을 한다면 미래가 없을 것이라는 50여 년 전 박 대통령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구미를 꾸려온 리더 그룹들이 ‘진정한 박정희의 정신’을 계승했더라면 침울한 오늘의 구미로 추락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은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 107돌에 돌아보는 구미정치 성향 ◇5.16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윤보선 대통령은 이어 실시된 5대, 6대 대선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대결을 벌였으나 번번이 패했다. 그러나 그는 1979년 신민당 총재 상임고문, 1970년 국민당 총재 등을 거치면서 정치권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한국 정치사의 고질병인 계파 간 정쟁이 낳은 희생양의 표본이기도 했다.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민주당의 신구파 간 갈등 속에서 속앓이를 해야 했고, 결국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이 주축이 된 군부에 의해 하야하는 운명을 맞았다.
구미 출신 박정희 대통령이 44세의 나이로 한국 정치사에 최초로 명함을 내민 것은 1961년 6월 국가최고재건회의 의장으로서였다. 이어 대통령의 직에 오른 것은 2년 후인 1963년 10월 15일 제5대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면서였다.
그해 치러진 선거는 7대1의 치열한 경쟁률을 보였다. 육군참모총장 출신의 신흥당 장이석(60세), 국방장관 출신의 자유민주당 송요찬(45세), 국가최고재건회의 의장 출신의 민주공화당 박정희(46세), 건설신문사 사장 출신의 추풍회 오재영(44세), 대통령 출신의 윤보선(66세), 국무총리 서리 출신의 국민의당 허정(67세), 국무총리 출신의 정민회 변영태(70세) 등 기라성 같은 후보들이 나선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윤보선 후보가 득표한 454만 표보다 16만 표가 많은 470만 표를 득표하면서 진땀을 흘린 끝에 당선됐다.
당시 영남권 선거에서 지역갈등 양상은 드러나지 않았다. 경북도(대구 포함) 165만 표 중 박정희 후보가 83만 7천 표를 얻었지만, 윤보선 후보의 득표력도 54만 3천 표였다.
하지만 당시 선산군(지금의 구미시)은 총투표자 4만 8천 표 중 72.6%인 3만 4,882표가 박정희 후보를 택했다. 반면 윤보선 후보는 7천 319표를 획득하는 데 그쳤다.
이처럼 1963년 비롯된 선산(구미)의 보수화는 윤보선과 재격돌한 6대 선거와 호남 출신의 김대중 후보와 격돌한 제7대 대선을 거치면서 급속하게 확산됐다.
1967년 5월 3일 직선제로 실시된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은 윤보선 전 대통령과 재격돌했다. 하지만 표차는 5대에 비해 상당히 벌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선거 결과 전체 투표자 1천164만 표 중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568만 표를 득표해 452만 표를 얻은 신민당 윤보선 후보를 1백1십여만 표차로 눌렀으니 말이다. 5대 선거에서의 16만 표차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들 정도였다.
6대 대선에서는 여타 후보들이 나섰으나 정의당 이세진 9만 표, 한국 독립당 전진한 23만 표, 민중당 김준연 24만 표, 통한당 오재영은 26만 표를 얻는 데 그쳤다.
6대 대선부터는 박정희 대통령의 경북 득표율이 돋보이기 시작했고, 구미의 득표율은 80%에 육박했다. 당시 경북(대구 포함) 지역에서는 총투표자 178만 표 중 박정희 후보가 1백만 8만 표를 얻으면서 60%대의 득표율을 보였다. 반면 윤보선 후보는 44만 7천 표로 24%를 얻는 데 그쳤다.
선산군(지금의 구미시)은 총 4만 9천 명의 투표자 중 박정희 후보에게 3만 9천 표를 몰아주었다. 80%대에 근접한 79%의 득표율이었다. 반면 차점자인 윤보선은 4천6백 표로 9%의 득표를 하는 데 쳤다.
◇이목을 집중시킨 박정희 후보 vs 40대 기수론의 김대중 후보19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50대 말의 박정희 대통령은 40대 기수론을 들고 출사표를 던진 전남 목포 출신의 김대중 후보와 격돌했다. 하지만 대선 사상 최초의 동서 대결이었으나, 두 후보는 적진에서도 나름의 득표력을 보이면서 동서 간 갈등은 눈에 띄지 않았다.
민주공화당 박정희, 신민당 김대중, 국민당 박기출, 자민당 이종윤, 정의당 진복기 후보가 나선 7대 선거 결과 전체 투표자 1천2백41만 표 중 박정희 후보는 634만 표, 김대중 후보는 539만 표를 얻었다. 40대의 김대중 후보가 90여만 표차로 따라붙자, 박정희 정권으로선 충격이었다.
경북지역(대구 포함)에서는 총투표자 183만 표 중 박정희 후보가 133만 표를 얻었으며, 김대중 후보 역시 41만 표를 얻으면서 득표력을 과시했다. 또 전남에서는 149만 표 중 김대중 후보가 87만 4천 표를 얻었고, 박정희 후보 역시 47만 9천 표를 얻으면서 득표력을 과시했다.
특히 김대중 후보의 고향인 목포에서도 김대중 후보 3만 8,780표, 박정희 후보 역시 1만 889표를 득표해 동서 간 갈등이 1980년대처럼 표면화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선산군(지금의 구미시)은 90%에 가까운 민심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쏠렸다. 총투표자 4만 6,650표 중 박정희 후보는 87.4%인 3만 8,780표를 득표하면서 3천832표, 8.2%에 그친 김대중 후보를 멀찌감치 따돌렸다.
그러나 김대중 후보와의 경쟁에서 승리했으나, 서울에서는 39.95%에 그치면서 59.39%를 얻은 김대중 후보에게 패하는 결과와 직면했다. 박정희 후보로선 충격이었다.
수도권에서의 패배는 박정희 정권에게 극심한 불안감을 안겼고, 그 불안감은 이듬해인 1972년, 유신체제로 들어서는 계기로 작용했다.
유신체제가 들어서면서 1972년 12월 23일의 제8대, 1978년 7월 6일의 제9대, 1979년 12월 6일의 제10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간접선거 방식으로 대통령을 선출했다.
제8대, 9대 대통령에 당선된 박 대통령은 1979년 10월 26일 동향의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유명을 달리했다. 이어진 제10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비운의 최규하 대통령이 당선됐다.
산업화의 전진기지 구미, 급속하게 보수화한 정치 민심
→역대 대통령은 구미공단에 어떤 선물 주었나구미공단을 태생시킨 박정희 대통령 이후 바통을 이어받은 역대 대통령 중 최규화, 전두환, 노태우를 제외한 이후의 대통령들은 구미공단에 많은 애정을 쏟았다. 진영의 논리보다 경제의 논리를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낙동강의 기적을 이룬 구미공단 선정 및 조성
▪김대중 대통령박세직 의원의 정치력 발휘가 진가를 발휘했다. 자민련에 입당해 4공단 조성에 정치적 명운을 걸다시피 했던 박 의원은 1996년 대구에 내려와 있던 김대중 대통령을 구미 4공단 착공식에 참석시키는 기지를 발휘했다.
4공단 착공식 당일 김대중 대통령은 대구 행사를 마치고 귀경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박 의원은 대통령 비서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종필 총재의 핫라인을 활용, 예정에 없던 대통령의 4공단 착공식 참석이라는 역사를 쓰게 했다. 이후 4공단 조성은 탄력을 받았다.
▪노무현 대통령2004년 노무현 대통령은 구미에서 열린 200억 불 수출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당시 노 대통령에게 시민들은 구미 근로자들의 최대 숙원사업 중의 하나였던 근로자 복지시설을 건립토록 해 달라고 건의했고, 결국 현실이 됐다.
▪이명박 대통령임기 중 네 번에 걸쳐 구미를 방문했다. 남유진 시장의 노력이 주효했다.
통상 4~5년이 걸리는 국가공단 승인 기한을 앞당기기 위해 남 시장이 건의한 특별법 제정이 구체화되면서 구미 5공단은 신청 후 6개월 만에 승인됐다.
5공단에 외국인 투자지역 지정이 가능했던 것도 김관용 지사의 건의를 이 대통령이 받아들인 결과였다.
▪박근혜 대통령김관용 지사와 남유진 시장의 노력에 힘입어 박근혜 대통령은 5단지에 탄소클러스터 조성을 확정토록 했다.
2016년 10월 도레이 첨단소재 기공식에 참석한 데 이어 새마을 중앙시장에서 가진 상인과의 간담회에서 KTX 구미역 정차 건의를 받은 박 대통령은 “기업하기 좋은 도시 조성에는 당연히 접근성이 중요하다“면서 배석한 경제수석에게 적극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사실상 당장에 사업 착수를 하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구미방문을 마치고 상경한 그날 오후 박 대통령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 휘말렸다. 구미지역 최대의 현안 중 하나인 KTX 구미역 정차는 지금까지 미결과제로 남아 있다.
▪문재인 대통령구미형 일자리 협약식을 통해 엘지 화학의 5공단 입주를 가시화시켰으며, 구미공단을 스마트 산단으로 지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