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미 원평 출신 독립투자 김정술 선생
[ 사진 제공 = 둘째 아들 김구식 선생 ]
[분석·기획·칼럼 전문 매체 K문화타임즈 =김경홍 기자]1920년대의 일제 강점기에 박상희, 장진홍 선생과 함께 신간회 조직의 또 다른 중심인물이었던 구미 출신 김정술 선생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져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하고 있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15일 비타협적 민족자결주의 이념을 표방하는 범민주주의 세력이 결집해서 만든 독립운동 단체로서 국내를 비롯한 해외지부에 4만여 회원을 가진 거대 조직이었다. 당시 대구고보(현 경북중고교) 재학생 신분이었던 구미 원평동 출신의 김정술 선생은 신간회의 중심인물인 구미 인동 장진홍 선생을 지원하는 역할의 중심에 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 선생과 김 선생은 일제 강점기 경찰 정보망을 피해 가며 금오산 성안마을에서 제조한 거사용 폭탄 4개와 자살용 폭탄 1개를 소지하고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를 시도한 때부터 김 선생의 독립운동은 시작된다. [편집자]
암흑기를 살아가는 이들은 현실 순응이냐, 현실 극복이냐는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게 된다. 36년 동안의 일제강점기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 당시 그 누군가는 암흑 속에서 새로운 길을 내는 삶의 방식을 택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암흑 속에서 쌀독을 채우는 적자생존의 방식을 택했다. 그래서 훗날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그들의 살아갔던 길을 재조명해야 하는 과제가 부여된다.
특히 오늘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바로 목숨을 담보한 독립투사들에 의해 개척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때 우리에게는 과거를 올바르게 조명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주어진다. 해방 직후 몰아닥친 다사다난한 이 땅의 암흑은 진실과 사실을 굴절시키며 종종 외도의 길을 가곤 했다. 그래서 어깨에 짊어진 책임과 의무는 더욱 무겁기만 하다.
예외 없이 구미를 거쳐 간 일제 강점기. 36년이라는 짧지 않은 굴욕과 수치의 그 기간 수많은 구미 출신 인사들은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해 일제와 당당히 맞서 싸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부 인사는 이념 논리로 재단되면서 본질을 심하게 훼손당해야 했고, 일부 인사는 역사와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 잊히는 비운의 세월 속에 묻혀야 했다.
구미시 원평동 324번지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일제와 맞선 독립투사 김정술(1909~1964년) 선생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일제 강점 기간 최대 독립운동단체로 맹활약을 한 신간회와 최대 사건 중의 하나인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과 밀접한 교감을 하면서 독립운동에 앞장선 김정술 선생이 아직도 독립운동가로서 역사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세상무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수치일 수밖에 없다.
가슴을 더 쓰리게 하는 것은 독립투사로서의 길을 걸어온 남편의 삶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을 부인 최복인 여사가 백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가 김정술>이라는 역사적인 평가를 접하지 못하고, 지난 2005년 남편의 곁으로 돌아갔으니, 안타까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서럽다고 해서 묻힌 역사를 방관할 수 마는 없는 일이다. 김 선생의 아들인 김일식(1940년생), 김구식(1950년생) 씨와 딸 김경화(1956년생) 씨 등은 그 서러운 역사 속에서 아버지의 독립투혼을 세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싸우는 세월의 삶을 살고 있다.
→김정술 선생과 조선은행 폭탄테러 사건
구미와 인근지역의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왕산 허위, 박정희 대통령의 둘째 형인 박상희, 장진홍 선생이다. 이 중 김정술 선생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을 주도한 칠곡 인동(지금의 구미시 인동동)의 장진홍 선생(1895~1930년)과 신간회 선산지회 조사부 총무였던 구미 출신 박상희 선생(1906~1946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1909년생인 김정술 선생은 1909년생인 박상희 선생의 고향 후배이면서 동시에 구미 공립보통학교 (지금의 구미초교) 2회로서 12회인 박정희 대통령의 10년 선배였다. 특히 당시 구미 독립운동사의 중심에 서 있던 박상희 선생과 신간회 활동을 함께 했다는 사실은 인상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당시 김 선생이 관여했던 신간회의 성격은 무엇이었으며,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신간회는 1927년 2월 15일 사회주의, 비타협적 민주주의 세력들이 결집해서 창립한 좌우합작의 거대 독립운동 단체였다. 1931년 5월까지 4년여 동안 일제와 맞선 이 단체는 전국은 물론 해외 지부에 3~4만 명의 회원을 거느릴 만큼의 거대 조직이었다.
이처럼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던 신간회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쟁취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반대, 근검절약 운동, 파벌-족벌주의 타파 등을 활동 목표로 삼아 일제와 맞섰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은 장진홍 선생의 주도로 1927년 10월 16일 거사용 폭탄 4개와 자살용 폭탄 1개를 제조해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하려고 했으나, 실패한 민족운동이었다. 은행 간부에게 발각돼 수포로 돌아갔으나, 폭탄 속의 뇌관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순사 4명과 은행 사환, 행인 1명 등 6명이 다쳤다.
선물 상자로 위장, 심부름꾼을 시켜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전달된 당시의 폭탄은 1927년 10월 16일 장진홍 선생이 칠곡의 집에서 제조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경상북도지사와 경상북도 경찰부,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하기 위해 폭탄을 제조하기까지는 무수한 우여곡절이 뒤따랐다. 특히 금오산 근교의 깊은 산 속에서는 폭풍우 치는 한밤중을 이용해 무수한 실험을 거쳤다.
↑↑ 김정술 선생과 대구교보 동기 [ 사진 제공= 둘째 아들 김구식 선생 제공 |
↑↑ 1960년 대의 구미 원평동 [사진 출처 = 구미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