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오폭 사건은 1950년 8월 16일(음력 7월 2일) 오전 11시경, 기체 불명의 폭격기 몇 개 편대가 수 시간 동안 마을을 맹폭하면서 발단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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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무실(형곡) 미군 오폭사건 / 사진= 이규원 전 시의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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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문화타임즈=김경홍 기자] 2020년 12월 10일부터 2022년 12월 9일까지 2년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을 시행한다는 계획이 공표되자, 유가족들은 구미시 시무실(형곡)미군 오폭사건이 규명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앞서 진실화해위원회는 2009년 4월 7일부터 8일까지 조사관을 파견해 형곡 지구, 인동 유학산 지구, 고아(선산) 지구에 대한 현장 조사를 한 바 있다.
미군 오폭 사건은 1950년 8월 16일(음력 7월 2일) 오전 11시경, 기체 불명의 폭격기 몇 개 편대가 수 시간 동안 마을을 맹폭하면서 발단이 됐다. 마을은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했고, 아비규환의 처절한 참상 그 자체였다. 설상가상으로 폭격이 끝난 직후 다시 제트기 몇 대 편대가 마을을 향해 또다시 기관포 사격을 가하면서 수많은 주민과 피난민들이 집단 떼죽음을 당했다.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한 집안이 전부 몰락된 경우도 있었으며, 마을과 인근 산야가 벌집 쑤셔 놓은 듯 참혹했다고 한다.
→진실 규명을 위한 노력 2012년 2월 8일 5분 발언을 통해 형곡동 오폭사건에 따른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건립을 촉구한 구미시의회 당시 이규원·손홍섭 전 시의원에 따르면 시무실 미군 폭격기 오폭 사건은 6.25 전쟁 당시 130호가 사는 산간 농촌 지역인 형곡동(시무실, 사창)의 쓰라린 역사였다.
이 지역은 금오산 자락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지리적인 특수성으로 김천, 칠곡 북삼을 비롯한 사곡, 상모, 임은, 오태, 광평 등 인근 지역에서 피난을 가지 못한 주민들이 피신처로 몰려들 만큼 안전하고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치열했던 1950년 8월 16일 (음력 7월 2일) 오전 10시경, 형곡동 주민들과 피난민들이 더위를 피하기 위해 냇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무렵, 미군 폭격기가 무차별 폭격을 가해 수백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당시 전시 상황은 북한군이 총공세로 임시 수도인 대구 방어선의 함락이 우려되던 때였다. 이에 따라 유엔군은 대구를 사수하기 위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해 다부동 전투를 전개했고, 북한군은 낙동강 반대쪽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위급 상황에서 미군의 융단폭격으로 형곡지역 시무실과 사창 등 두 마을은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했고, 이 와중에 형곡동 주민과 피난민 등 130여 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는 비극이 발생했다.
또 당시 피해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고인이 된 마을 주민인 고 김왕개 씨 등 일가족 12명이 사망하고, 고 이종록 씨 일가족 9명도 사망했다. 미군 측의 오폭에 따른 명백한 비극적 사건이었다.
지울 수 없는 형곡동 오폭사건의 악몽 속에서 살아온 생존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참극이 발생하고 40년이 지난 1992년 고 이종록(발기인 대표/ 이규원 전 의원 선친)옹을 중심으로 ‘위령탑 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미국의 미 자도 꺼내지 말라’는 국방부로부터의 회신을 받고 이들은 좌절해야 했다. 이어 2005년에는 구미시에 의견서를 제출하고, 진정서를 냈으나 시정에 반영되지 않았다.
결국 1년 후인 2006년 11월 28일 이규원 전 구미시의회 의원은 진정서 마감 시한을 이틀 앞두고 부랴부랴 진정서를 작성하고, 과거사 정리 기본법에 따라 발족한 과거사위에 자료를 제출했다. 그로부터 2개월 후인 2007년 1월 위령탑 건립 추진위는 오매불망 그리던 ‘결정통지서’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이어 2년 3개월이 흐른 2009년 7월부터 8일까지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관을 파견해 형곡 지구, 인동 유학산 지구, 고아(선산) 지구에 대한 현장 조사를 했다.
사건명은 ‘ 미군 관련 희생 사건, 결정 이유 = 신청사건 다-9042 미군 관련 희생 사건은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 제2조 제1항 제3호의 진실규명범위에 해당하여 조사개시를 결정함’이었다.
시무실(지금의 형곡동) 미군 오폭사건에 대한 현장 조사에서 조사관이 만난 형곡지구 면담자는 생존자와 피해자 가족 등 35명이었다. 더 많은 피해자가 있었지만, 당시 상황을 목격한 주민이나 피해자 가족들이 전국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에 현장 조사 대상자는 미군 폭격기의 오폭으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130여 명에 비해서는 턱없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조사 기간 피해자나 그 가족, 현장을 목격했던 주민들은 기억하기조차 싫은 미군 폭격기 오폭 사건 당시로 되돌아가야 했고, 그 악몽의 세월 속에서 그들은 다시 눈물을 흘려야 했다.
당시 조사관은 전국에 흩어져 있는 관련자들에 대한 추가 조사를 약속하고 돌아갔다. 특히 미군 폭격기의 오폭에 따른 피해와 관련 " 다른 지자체에서는 위령탑 건립 등 피해자들의 원혼을 달래는 노력이 있지만, 구미에는 그마저도 없는 것 같아 애석하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진실화해위가 가동된 당시만 해도 전쟁 과정에서 억울하게 생명을 잃은 피해 주민들에 대해 정부는 1천340억 원의 피해 보상을 할 것으로 알려졌고, 형곡 지구 피해 관련자들 역시 입법발의 중인 법안이 의결되면 보상에 착수할 것으로 기대를 보았으나 결국 무산됐다.
더군다나 2010년 6월에는 2009년 형곡지구를 조사했던 조사관이 타 부서로 옮기면서 업무를 이관받은 다른 조사관이 "1차 조사자를 대상으로 다시 2차 조사를 해야 하겠다"는 통지를 해 왔다. 1년 전 조사한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기억하기조차 싫은 당시 상황을 다시 녹취하겠다고 하자, 당사자들은 오열해야 했다. 하지만 형곡 지구 피해자에게 마음의 상처만을 남긴 진실화해위는 2010년 6월 말 업무를 끝내면서 허망함까지 아픈 가슴 위에 얹혔다.
◇한국 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 진실 규명의 길 열려야
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2006년 4월부터 2010년 12월까지 약 4년 7개월간의 활동을 종료하면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은 규명되지 못했다.
하지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개정으로 2020년 12월 10일부터 2022년 12월 9일까지 2년 동안 재출범한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다시 활동하게 됨에 따라 미규명된 형곡(시무실) 미군 폭격기 오폭 사건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 등은 진실규명의 길이 열렸으나,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구미, 김천지역 미국 오폭 사건 및 양민 학살 사건
▶ 선산, 구포동 미군 폭격기 오폭 사건1950년 8월 16일(음력 7월 2일) 미군 폭격기의 오폭에 따른 구미시 시무실(사창마을), 지금의 형곡동을 맹폭하면서 1백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 이외에도 시 관내 타지역과 이웃해 있는 시군에도 이와 유사한 비극이 발생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게다가 6.25 당시 민간인 학살 사건의 비극 역시 발생했던 것으로 알려져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동시에 영혼을 추모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6·25전쟁을 전후해 미군 폭격기의 오폭사건으로 비극을 겪어야 했던 곳은 형곡동을 비롯해 선산 송림동, 구포동, 김천시 농소면 봉곡리 등이었다.
경북도의회 특위 보고서(2000년)에 따르면 형곡동(시무실)은 1950년 8월 16일 미국 폭격으로 130여 명이 사망했다. 또 전민특위 공동 백서에 따르면 선산읍 송림동에서도 1950년 8월 31일, 미군 폭격으로 38명이 사망했다.
또 1950년 음력 7월 2일에는 미군기가 마을로부터 4킬로미터 떨어진 금전동 앞 하천에서 피난 생활을 하는 주민 50여 명에게 총을 쏘면서 18명이 사망했다. 이외에도 도로변의 피난 행렬도 미군기의 폭격을 받아 5~6명의 희생자를 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50년 7월 25일에는 또 폭격기 2대가 피난민 수천 명이 생활하는 김천시 남면 연봉 천 냇가에 기관총을 발사해 희생자를 발생시켰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와 함께 미 1 기갑 사단장 호바트 게이 소장과 일부 장교들이 칠곡군 왜관교 폭파 명령으로 다리가 폭파하면서 어린이와 여성 등 많은 피난민이 살해되거나 익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민 학살 사건양민 학살 사건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0년 6월 28일 자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양민 학살자 신고 기간 중 당시 선산에서도 100여 명이 신고했다. 이들은 주로 1950년 8월 1차 후퇴 때 경찰에 의해 학살당했거나, 북진 당시 군인에 의해 학살된 양민이었다.
희생된 이들은 농민 69명, 공업 4명, 상업 6명, 공무원 3명, 기타 학생과 무직 등이었다. 이러한 비극을 알고 있는 유족들은 여러 차례 당시의 사찰 형사에게 학살 날짜라도 알려달라고 하소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동아일보는 보도했다.
.이외에도 선산읍 이문리에서도 피난을 갔다가 너무 일찍 돌아왔다는 이유로 군인이 마을 사람 20~30명을 총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구미시 법성사 인근에서도 억울한 양민 학살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구미시 시무실(형곡) 오폭 피해자 위령탑에 쓰여진 호국보훈! 1950.6.25. 미군 오폭 참상 무릇 동서고금의 역사를 회고해 보건대 국운의 흥망으로 각 나라마다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어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국운이 흥성했을 때 각 민족은 찬란한 문명을 이루었고, 그것이 쇠퇴했을 때 몰락과 파탄이란 비극을 겪어야 했다. 우리 민족이 지나온 길도 이 도도히 흘러가는 세계사의 물결 앞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특히 우리 민족사의 경우는 국운의 융성으로 인한 기쁨보다, 내우외환에 의한 쓰라린 슬픔이 더 많았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멀리까지 회고하지 않더라도,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고난과 상처를 안겨다 준 현대사의 한 부분 6·25동란을 우리 모두는 아픈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 동족상잔의 비극은 말과 글로써 어찌 다 형언할 수 있으리오. 이제 와서 형곡동의 슬픈 한 역사의 토막을 떠올리게 되어 만시지탄의 비통함을 느낀다. 동란 당시 형곡동에서 일어난 처절한 집단 참상과, 그로 인한 위령탑 건립에 관한 내용이다. 당시 형곡동은 궁핍한 시골 산촌으로 마을 주민 모두가 농사만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시운이 불행하여 이 마을에 갑자기 짙은 음영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동란이 발발되던 그해 여름, 이 마을에 특수한 지형(형곡동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외딴 마을이라 피난하기에 알맞은 지형임)으로 인해 수천 명의 피난민들이 만호처럼 이곳으로 밀려 들어와 목숨을 부지하던 터였다. 마을의 토착민과 피난민들은 들여오는 포성에 숨죽이면서 전쟁이 끝나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든 어느 날 비극의 흑운은 이 마을 전체를 온통 뒤덮기 시작했다.
때는 1950년 8월 16일(음:7.2) 오전 11경이었다. 기체 불명의 폭격기 몇 개 편대가 수 시간 동안 이 마을을 맹폭하는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마을은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했고, 아비규환의 처절한 참상은 아무리 통곡해도 지나침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폭격이 끝난 직후, 다시 제트기 몇 대 편대가 마을을 향해 또다시 기관포 사격을 가해와, 수많은 주민과 피난민들이 집단 떼죽음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한 집안이 전부 몰락된 경우도 있었으며, 마을과 인근 산야가 벌집 쑤셔 놓은 듯 참혹했다고 전한다.
더욱이 이 피폭자들은 무장한 군인이 아니라 모두가 순수한 민간인뿐 이었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사망자의 경우 동사무소에 공식 신고댄 형곡동 사람만 130여명(당시 리장 김경환 증언) 이라고 한다. 난리 중의 급박한 정황으로 보아 미처 신고 되지 않는 사람까지 고려하면 사망자 수는 통계적으로 기록되지 않아,
이 사실까지 고려한다면 수는 실로 엄청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새 전쟁이 끝나고 포성이 멈춘 지 65년여의 세월이 흘러갔다. 눈물도, 슬픔도 모두가 망각의 저 편으로 조금씩 사라져갔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형곡동의 뒷산에는 올해도 온갖 야생화와 진달래꽃이 아름답게 피었다 지곤 했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흘러가도, 그날의 끔찍한 참상은 이 마을 주민 모두의 가슴 속에 단근질 자국처럼 아프게 새겨져 있으리라. 사람의 피가 흐르는 이상, 어찌 비명횡사한 부모, 형제, 친지들의 참상을 잊을 수 있겠는가? 미물도 제 어미와 새끼를 잃으면 슬피 울거늘, 항차 사람인 저희야 얼마나 각골통한의 피눈물을 흘리며 살아왔겠는가?
이제 당시 폭사 되거나 몰살된 마을 희생자들에 대하여 그 넋을 위로하고져 뒤늦게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생각은 다름아닌, 비명에 간 혼령들을 위해 진혼의 위령탑 설립에 관한 사항이다. 이 위령탑의 건립은 단순한 치장이나 장식이 아니라, 유가족 모두에게 절실한 문제다. 역사는 흘러가도 그 교훈은 남는다.
만약 이 탑이 세워지게 된다면 그것은 진혼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란을 경험하지 못한 후세의 자손들에게도 소중한 교육적 가치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6.25사변(형곡동의 참상)의 그늘 속에 망각되어 왔던 유가족들의 아픈 상처가 조금이나마 위로되고 치유되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끝으로 한국전쟁기인 1950년 8월 16일 경북 구미시 형곡동에 양민들에게 가해진 미군 오폭사건에 대해서는 92년부터 국가기관을 또는 정부를 상대로 하여 18년간의 끈질긴 노력 끝에 진실규명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구미시의 도움으로 2012년 4월 30일 형곡동 위령탑 추진위원회가 설립되고, 4년여의 진통 끝에 위령비 건립 사업을 위한 추진을 박차를 가하고 되었으며, 이 사업에 추진을 위하여 혼신의 힘을 기울여주신 구미시와 관계부서, 위령탑 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손홍섭, 박교상 시의원 외 추진위원 여러분께도 유족의 입장에서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참고: 사변 당시 형곡동의 리장 김경환님 및 나의 선친( 이종록 )으로부터 6.25사변 당시의 생생한 모습을 이야기 들은 내용을 기반으로 하여 92년부터 2010년까지 정부를 상대로 하여 18년 만에 국가기관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으로부터 6.25 당시 형곡리(사창,시무실)의 양민들의 억욱한 죽음이 군들의 오폭임으로 2010년 10월 22일 진실 규명이 됐다.
( 진실규명 다-9042 규명 신청자: 이규원)
한편 손홍섭 위령탑 추진위원장은 "1950년 '그날'에 일어난 6.25전쟁 형곡동 폭격 희생자 및 유족을 위한 위령탑을 2016년 7월 건립 이후 도비와 시비 지원으로 간이주차 시설을 확충하고 매년 형곡2동에서 위령탑 주변 잡초작업 등 관리를 위해 노력중"이라며 "유족 중심으로 매년 추모제 개최 등으로 그날의 아픔을 되새기며 전후 세대를 위한 안보적인 교훈의 장으로 활용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