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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3·1절 기획1]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 일제와 맞선 구미 독립투사들

김경홍 기자 siin0122@hanmail.net 기자 입력 2024.03.01 01:25 수정 2024.03.01 11:38

들불처럼 타오른 경북도 독립운동⇢3월 11일 영일•의성•김천, 13일 경주•칠곡, 16일 안동, 18일 영덕• 봉화, 23일 상주, 24일 영양•청송, 26일 영천, 4월 2일 성주, 4월 3일 선산•예천, 4일 영주, 12일 청도, 15일 문경, 28일 달성


구미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 △ 장진홍 선생 △ 박상희 선생△ 김정술 선생 △ 박휘광 선생

사형이 확정되던 날 장진홍 선생의 절규...“조선민족의 피를 받은 자로서 일제 경찰의 주구가 되어 동족의 해방운동을 이다지도 방해하는 악질 조선인 경관의 죄상이야말로 나의 죽은 혼이라도 용서할 수 없다”

서울 왕산로의 유래...이인영이 부친의 별세로 귀향하자 총대장을 맡은 왕산은 동대문을 향해 진격했으나 패했다. 현재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길은 당시 연합 의병부대의 의병 활동을 기념해 왕산의 호를 따 왕산로로 명했다.

김정술 선생의 회고
...“금오산 근교의 깊은 산 속에서는 폭풍우 몰아치는 한밤중을 이용해 무수한 폭탄 제조 실험을 거치곤 했다”


↑↑ 1960년대 구미시 원평동 [사진 출처 = 구미시]


[K문화타임즈 = 김경홍 기자]
세월은 흘러도 일제에 강점당했던 역사의 아픔은 지금도 우리들의 저 깊은 가슴 속에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전쟁터로 끌려 나가 울부짖어야 했던 젊은 위안부들은 이제 90대를 넘긴 노을 녘의 삶이 됐고, 울분의 벼랑 끝에서 생을 하직하고 있다. 하지만 범죄자 일본의 태도는 아직도 인면수심이다. 엄연히 살아있는 약육강식의 질서 세계를 다시 한번 통절해야 한다.

3•1 만세운동, 경북도는 살아 있었다. 도내에서는 20개 시군이 동참한 가운데 3월2일부터 4월28일까지 50여 일간 지속됐다. 일제 강점기에 맞선 독립운동은 가히 치열했다. 도내에서 독립만세 운동은 대구에서 비롯됐다. 1919년 3월 8일 고등보통학교 학생, 기독교도, 천도교도 등 8백여 명이 연합,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민족해방운동은 들불처럼 번져나가 9일에는 각급 학교 학생 4천5백여 명이 만세를 불렀다.

3월 11일에는 영일, 의성, 김천, 13일에는 경주, 칠곡, 16일에는 안동, 18일에는 영덕, 봉화, 23일에는 상주, 24일에는 영양, 청송, 26일에는 영천, 4월 2일에는 성주, 4월3일에는 예천과 선산, 4일에는 영주, 12일에는 청도, 15일에는 문경, 28일에는 달성군이 운동에 가담하면서 삼일운동은 들불처럼 번졌다.
경북의 삼일 만세운동은 3월 20일을 전후해 10일간 절정을 이뤘다. 4월 12일 이후는 소강상태로 접어든다.

운동의 주체는 기독교도, 천도교도, 각급 학교 학생 및 농민이었다. 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는 소극적인 운동을 경북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직접적인 시위운동에 나선 것은 경상도의 화끈한 애국적 기질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20개 군의 운동 중 규모나 내용으로 미루어 13개소에서 만세운동을 벌인 안동은 대표적인 독립 만세 운동의 중심지였다.
3월 17일 장날을 맞은 예안면에서는 1천5백여 명이 모여 만세 시위를 전개할 정도였다. 14명이 피살되고, 10명 이상이 부상을 당할 만큼 현장은 참혹했다.
영덕군 영해 장터에서도 기독교도와 주민 등 2천여 명이 모여 집집마다 태극기를 걸도록 했다. 정오경 독립연설회를 개최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른 뒤 시위운동에 들어갔다. 경찰 주재소를 습격, 파괴하기도 했다. 주동자 60여 명이 검거돼 고초를 겪어야 했다.
경북의 총 시위지역은 60여개 소에 연인원이 3만 명에 달했다. 이 중 26개소에서 일제와 충돌했다. 일병의 출동지역은 20개소, 발포 지역은 9개소였다,
이 와중에 경찰관서 12개소, 면사무소 3개소, 우편소 1개소, 기타 1개소 등 18개소가 파괴됐다. 또 20명이 피살되고, 7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7백여 명이 검거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구미의 독립운동가
구미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는 왕산 허위, 장진홍 선생, 박희광 선생, 김정술 선생, 박정희 대통령의 둘째 형인 박상희 선생 등이다.

▶왕산 허위
1854년 철종 5년 구미시 임은동에서 태어났다. 1896년 3월 23일부터 의병 활동을 시작해 김해에서 수백 명의 의병을 모집, 독립운동에 나섰으나 첫 전투에서 관군에게 패했다. 1899년부터 1904년까지 평리원의 수석판사를 역임하면서 근대 지향의 혁신 유림으로 탈바꿈했다. 당시 왕산은 10개조 개혁안을 만들었다. 학교 설치, 화폐제도 개혁, 신분제 폐지, 세제정비 등이 관심을 모았으나, 개혁안이 문제가 돼 관직에서 물러났다.

1907년 9월 경기도 연천, 적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의 규모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당시 왕산은 원주에서 활동 중인 이인영과 협의해 13도 의병을 통합해 서울 진공 작전을 추진키로 했다. 이를 계기로 1907년 11월 경기도 양주에서 의병 약 1만 명이 집결한 가운데 13도 차의 대진소가 결성됐고, 왕산이 군사장을 맡았다.

이인영이 부친의 별세로 귀향하자 총대장을 맡은 왕산은 동대문을 향해 진격했으나 패했다. 현재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길은 당시 연합 의병부대의 의병 활동을 기념해 왕산의 호를 따 왕산로로 명했다.

서울 진공 작전에 실패한 왕산은 임진강으로 이동, 의병 활동을 계속했다. 당시 임진강 일대는 허위 의병부대의 군정이 실시될 만큼 기세를 떨쳤다. 1908년 6월 일제에 체포됐고, 9월 27일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정부는 1962년 공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장진홍 선생
구미지역의 대표적인 3·1운동 애국지사는 옥계동 문림리 출생인 장진홍(1985년- 1930년) 의사이다. 대구 조선은행에 포탄을 투탄하는 등 3.1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1962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장 의사는 1914년 3월 조선 보병대에 입대, 1916년 제대 후 곧바로 조국 광복 투쟁에 나설 것을 결심하고, 당시 비밀 독립운동단체였던 광복단에 가입했다. 1918년 7월에는 광복단 동지인 이내성의 소개로 만주 봉천성에서 김정묵과 이국필을 만나 독립운동 방향에 대해 논의했다.

이후 러시아 영토인 하바로프스크로 건너가 교포 청년 80여 명을 모집, 군사교육을 실시했다.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3.1운동이 발발했다. 부친의 논을 팔아 자금을 마련하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했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만행을 인천항에 들어온 미국 군함 승무원에 의뢰, 세계 각국에 배부할 것을 요청했다.

1926년 이내성을 만나 독립운동의 전개 방법을 논의했고, 1827년 만주에서 몰래 들여온 다이너마이트 뇌관과 도화선, 50원의 자금을 받고 폭탄 제조법을 배웠다. 1927년 8월 폭탄 2개를 시험용으로 제작, 칠곡과 선산 경계에 있는 봉화산에서 성능실험을 하고 1927년 10월 거사용 폭탄 4개와 자살용 폭탄 1개를 제조해 경북도청, 경북 경찰부, 조선은행 대구지점, 신산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하려고 했다. 1927년 10월 18일 오전 9시경 대구 덕흥 여관에서 폭탄에 점화 후 포장을 해 여관 종업원인 박노선에게 목표지점 4개 처에 송달을 부탁했다.

같은 날 오전 11시 50분경에 폭발하면서 은행원과 일제 경찰 등 5명이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며, 은행 창문 70여 짝이 부서졌다. 장 의사는 이후 선산군 해평면으로 피신해 안동과 영천에서 재차 거사를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29년 2월 13일 체포된 그는 조선인 경관들에게 “조선민족의 피를 받은 자로서 일제 경찰의 주구가 되어 동족의 해방운동을 이다지도 방해하는 악질 조선인 경관의 죄상이야말로 나의 죽은 혼이라도 용서할 수 없다”고 부르짖었다.
반년 만에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됐고, 결국 사형이 확정됐다. 1930년 11시경 자결했다.

▶김정술 선생
구미시 원평동 324번지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일제와 맞섰던 독립투사 김정술(1909~1964년) 선생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일제 강점 기간 동안 최대 독립운동단체로 맹활약을 한 신간회와 최대 사건 중의 하나인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과 밀접한 교감을 했다. 하지만 김정술 선생이 아직도 독립운동가로서 역사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세상무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수치가 아닐 수 없다.

특히 1909년생인 김정술 선생은 1909년생인 박상희 선생의 고향 후배이면서 동시에 구미 공립보통학교 (지금의 구미초교) 2회로서 12회인 박정희 대통령의 10년 선배였다. 특히 당시 구미독립운동사의 중심에 서 있던 박상희 선생과 신간회 활동을 함께 했다는 사실은 인상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당시 김 선생이 관여했던 신간회의 성격은 무엇이었으며,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은 면면은 어떠했을까.

신간회는 1927년 2월 15일 사회주의, 비타협적 민주주의 세력들이 결집해서 창립한 좌우합작의 거대 독립운동단체였다. 1931년 5월까지 4년여 동안 일제와 맞선 이 단체는 전국은 물론 해외에 지부에 3~4만 명의 회원을 거느릴 만큼 거대 조직이었다.

이처럼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던 신간회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쟁취와 동양척식주식회사 반대, 근검절약 운동, 파벌•족벌주의 타파 등을 활동 목표로 삼아 일제와 맞섰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은 장진홍 선생의 주도로 1927년 10월 16일 거사용 폭탄 4개와 자살용 폭탄 1개를 제조해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하려고 했으나, 실패한 민족운동이었다. 은행 간부에게 발각돼 수포로 돌아갔으나, 폭탄 속의 뇌관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순사 4명과 은행 사환, 행인 1명 등 6명이 다쳤다.

선물상자로 위장하고, 심부름꾼을 시켜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전달된 당시의 폭탄은 1927년 10월 16일 장진홍 선생이 칠곡의 집에서 제조한 것이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경상북도지사와 경상북도 경찰부,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하기 위해 폭탄을 제조하기까지는 무수한 우여곡절이 뒤따랐다. 특히 금오산 근교의 깊은 산 속에서는 폭풍우 치는 한밤중을 이용해 무수한 실험을 거쳐야 했다.

이 당시 구미 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대구고등보통학교(대구고보• 현 경북 중고교)에 입학하면서 1927년 2월 15일 발족한 신간회에 몸을 담은 김정술 선생은 열차를 이용해 구미•대구를 오르내리면서 폭탄실험에 필요한 폭약류를 책가방 속에 넣고 운반했다. 결국 학생 신분인 김정술 선생의 책가방 속에 숨겨 운반된 폭약은 금오산 깊은 산속에서 폭탄 제조를 위한 실험에 쓰였고,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를 위한 폭탄 제조의 원료로 쓰였다.

장진홍 선생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이 미수에 그치자, 친척을 통해 안동의 주요 시설을 폭파할 수 있도록 폭탄을 제조해 전달한 데 이어 친구를 통해 영천 거사를 위한 폭탄을 전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미수에 그치면서 일본 경찰은 장진홍 선생을 비롯한 가담자를 체포하기 위해 은 구미지역 인근을 벌집 쑤셔 놓듯 했다.

당시 경북 경찰부 요주의 인물로 주목된 김정술 선생에게도 수사망은 좁혀들기 시작했다. 결국 1927년 11월 10일 경북 경찰부 고등과 사상범 전담 요원인 최석현 경부보와 형사 3명은 대구에서 구미로 올라와 신간회 산하 구산 구락부원인 김정술 등 2명을 검거하고, 대구로 압송한 후 대구시 유치장에서 취조하기 시작했다.

당시 구금된 김정술 선생과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의 연루 관계를 취조한 것은 해방 후 인동읍장을 지낸 선산 경찰서 윤갑덕 형사였다. 가족에 따르면 남편 김정술 선생을 떠나보낸 후인 70년대 초반, 부인인 최복인 여사는 윤갑덕 형사를 만나 조선은행 폭탄 사건 당시 김정술 선생을 취조했다는 자술서를 확보했으나, 자술서는 훗날 장씨 집안으로 넘겨진 후 분실되고 말았다. 44년부터 50년까지 6년 동안 구미초교 교사를 지낸 최복인 여사의 애타는 심정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실감케 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나이 어린 학생 신분으로 유치장에 감금된 김정술 선생은 새벽 2~3시경 고문실에서 모진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거꾸로 매달아 놓고 물을 먹이는가 하면 책상 위에 손을 묶어놓고 대나무 침으로 손톱 밑을 찌르는 죽음의 고문은 수개월째 지속됐다.

다행스럽게도 김정술 선생이 석방된 것은 서장실을 방문한 대구고보 교장의 특별 탄원과 보증 덕분이었다. "새벽에 교장 선생님은 댁까지 데려다가 목욕물을 데워주고, 새 옷을 입으라고 건네주셨다"고 회고할 만큼 김 선생에게 대구고보 교장은 생명의 은인이기까지 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 여파의 악몽을 딛고 대구고보를 졸업한 것은 1928년 3월이었다. 이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법정대학과 체육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했다. 이 무렵인 1929년 일본으로 도피한 장진홍 선생은 그곳에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지 1년 후인 1930년 7월 31일 자결하게 된다.

일본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했으나 김정술 선생을 따라다닌 것은 독립운동 전력이었고, 이 전력은 사회진출을 가로막았다. 이래서 택한 곳이 바로 독립운동가가 집결하고 있던 만주였고, 독립을 위해서는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길뿐이라는 일념으로 길림성 용정에 있는 영신(광명)중학교에서 인재 양성에 몰두했다. 당시 김정술 선생이 가르친 제자는 정일권 전 국무총리, 2주일 전 감사원장, 윤태일 전 서울시장, 김동하 전 해병대 사령관, 이종갑 씨 등이었다.

1927년 모진 고문의 악몽을 딛고 해방을 맞이하기까지는 18년 세월이 흐른 후였다. 해방과 함께 만주에서 서울로 돌아온 김종술 선생은 후학을 양성하는 길에 전념했다. 경기상업, 수도여고, 용산고 등을 오가면서 수학과 영어, 체육을 가르치는 데 전념한 김 선생은 그러나 지병과 싸워야 했다. 어린 나이에 수개월째 고문으로 망가진 심신이 지병을 앞세우고 선생을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1949년 고향인 구미로 돌아온 김 선생은 지병이 호전된 1960년 선산토지 개량조합장으로 재직하다가 1964년 5월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선생을 둘러싼 주변 세상은 냉정하기까지 했다. 선산토지 개량조합장을 탐낸 일부 인사들이 있지도 않은 비리를 날조해 투서하면서 선생을 괴롭혔다. 끝내 도지사실로 불려 가 퇴임을 종용받고 돌아온 선생의 억울함을 전해 들은 최복인 여사는 서울에 있는 선생의 제자들을 찾아 눈시울을 붉혔고, 제자들 역시 선생의 억울함을 바로 잡아드리겠다고 약속했으나, 시간은 이미 선생 편에 있지 않았다.

▶박휘광 선생
구미시 봉곡동에서 태어난 박희광 선생은 1908년 8세 때 부친을 따라 만주로 들어가 1916년 3월, 청원현 남성자 학교를 졸업한 후인 18대 때, 일제를 토벌하기 위해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지휘하는 독립 군사단체인 통의부 5중대에 자진 입대했다. 이어 6개월간의 군사 훈련을 마친 후 특공대원으로 편입,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박희광 선생은 특히 김명봉, 김광추, 김병현과 함께 일본군 공격작전에 참가했다. 이들 특공대원이 가장 먼저 겨냥한 대상 인물은 남만주 일대에서 악명 높았던 일제의 앞잡이 최정규와 일제의 첩자 정갑주였다. 결국 1924년 6월 1일, 정갑주와 가족을 몰살했고, 이어 1964년 6월 7일에는 최정규의 집안을 초토화했다.

이어 1924년 7월 22일에는 봉천의 일본 총영사관에 들어가 폭탄을 투척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앞서 박희광 선생 등은 이등방문의 수양녀를 대련에서 암살하려고 했고, 일진회 회장 이용구를 봉천에서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희광 선생 등은 1924년 7월 22일, 일본 총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한 그날 저녁 일본의 고급 요정인 금정관에 들러 군자금 3백 원을 징수해 나오다가 일경에 발각돼 총격전을 벌였고, 이 와중에 김광추 소대장은 순국했다. 또 박희광 선생은 권총으로 응사하면서 맞섰으나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이후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투사다운 기백을 보인 박 선생은 관동청 지방법원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상고해 고등법원 2심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아 중국 뤼순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박희광 선생이 출옥한 것은 20년간의 옥고를 치른 1943년 3월 23일, 그의 나이 43세였다, 결국 그는 조국 독립을 위해 옥중에서 청춘을 불살랐다. 박 의사는 출옥 후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대련에서 동지들과 함께 중경으로 이동한 후 임시정부를 찾아 독립 투쟁을 하려고 했으나 길이 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44년 귀향해 그해 4월 20일 결혼한 박 선생은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임시 정부 요원들이 귀국하자, 백범 김구를 만나 그동안의 경과를 보고했다. 당시 김구는 비서를 시켜 위로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박 선생의 생활은 궁핍했다. 옥중에서 익힌 양복 제봉 기술에 의지해 어렵게 살다가 5남매를 남겨둔 채 부인마저 세상을 떠나자, 풍상과 맞서 사는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 받은 것은 광복 후 23년 만인 1968년 3월 1일이었다. 기쁨도 오래가지 않았다. 박 선생은 7년 후인 1970년 1월 22일 70세를 일기로 서울 보훈 병원에서 한 많은 생을 마쳤고,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 부인 류씨와 함께 안장됐다.

▶박상희 선생
박정희 대통령의 형인 박상희 선생의 발자취는 좌우 이념의 대립 역사 속에서 때로는 박정희 대통령의 어깨를 무겁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상희 선생이 남긴 족적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될 대목이다.

“63년 전 돌아가신 아버님은 동분서주하시면서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수많은 옥고를 치렀고, 돌아가시던 1946년 10월5일에도 시위대에 둘러싸인 경찰관이 위태롭다는 전언을 듣고 경찰관을 구하러 가셨다가 변을 당하셨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아버님은 좌익이니, 우익이니, 공산 활동을 했느니, 하는 부당한 평가에 시달리며 지금까지 지내왔다. 별세하신 지 60년이 지나도록 묘비 하나 없이 싸늘한 땅에 누워계셨다”
2010년 7월 15일 오전 11시, 박상희 선생 추모식 제막식에서 당시 박준홍 유가족 대표는 하염없이 눈시울을 붉혔다.

박준홍 대표는 이어 “18년 전인 지난 1992년 11월 19일, 이곳으로 이장할 때도 비석을 세울 것을 신중하게 고려했으나, 가족들이 간단하게 세우는 그런 비석은 6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더욱더 초라할 뿐이라는 생각 때문에 나날을 보내왔다”고 술회한 후 “몇몇 분들이 아버님의 공적을 인정하고, 국가에 서훈을 제청할 움직임과 함께 뜻있는 시민들의 모금을 해서라도 비석 하나 없이 쓸쓸하게 묻힌 아버님의 추모비를 세워야 한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비로소 추모비 제막식을 갖게 됐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박상희 선생을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1905년 8월 약목면에서 태어나 1914년 상모동으로 이사 온 후 구미에서 독립운동을 한 박 선생은 특히 20대 초반, 선산 청년 동맹을 결성, 선산지역의 청년운동을 주도하는 등 민족주의 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특히 항일 좌우 합작 신간회 선산 지회 결성과 또 다른 독립운동을 한 이유로 수차례 옥고를 치른 선생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지국장 등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도 박 선생은 선산군 인민위원회와 민족주의 민족전선 선산군 지부를 결성, 분단없는 민족국가 건설에 매진했는가 하면, 미군정의 강재 공출로 국민들이 굶주림에 항거하면서 대구에서 시작된 1946년 10월의 민중항쟁이 구미로 확산되는 가운데 그 중심에서 활동하면서 경찰을 보호하고 평화 협상 노선을 견지했다.

그해 10월 5일, 경찰과 주민 간의 중재를 마치고 귀가 중 경찰의 오인 총격으로 향년 마흔둘에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1931년 개량주의 사회 운동인 구미소비조합 이사로 활동했고, 부인인 조귀분 여사도 여성단체인 근우회 김천지회장 경 중앙 부회장으로서 야학 학교 교사를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형이면서 김종필 총리의 부인 박영옥 여사의 부친인 박상희 선생은 민주주의와 지역사랑의 외길 인생, 독립운동가로서 재조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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