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칼럼= 발행인 김경홍]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낯선 친구를 만나면 / 우리들 문둥이끼기 반갑다/ ... 중략/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 중략/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 리 먼 전라도길’
(나환자의 시인 한하운의 전라도길 中에서)
1970년대를 풍미하던 나환자, 문둥이 시인 한하운이 소록도로 휘청이면서 써 내린 시다.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나병환자를 수용하는 요양원이 있는 이름다운 섬 소록도, 이곳은 진보보다 보수 표심에게 몰표를 몰아주는 호남의 정서와는 별난 곳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1970년대 당시만 해도 문둥병(지금의 나병)은 전염병으로 분류됐다. 때문에 정부는 전국에 걸쳐 77개의 나환자촌을 조성하고 환자들을 격리했다. 검역과 함께 전염병을 차단하겠다는 취지였다. 나환자와 접촉하는 것은 불문율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당시 육영수 여사는 소록도를 찾아 뭉그러진 손을 덥석 어루만지거나 품어 안으면서 함박웃음을 짓곤 했다. 소록도가 눈물바다일 수밖에 없던 까닭이었다. 그래서 소록도는 육 여사의 위대한 인간성이 비롯된 곳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11월 7일 김건희 여사가 소록도를 찾았다. 영 부인으로선 50년 만의 일이다. 국립 소록도병원을 찾아 한센인을 위로한 김 여사는 피사렉 간호사 치료실을 찾아 최근 영면한 소록도의 천사 ‘피사렉’의 숭고함을 되새겼다. 유자청을 직접 담가 소록도 병원에 전달하는 김 여사의 모습은 간만에 잔잔한 감동을 준다.
필자는 1년 전부터 구자근 의원과 만나 ‘소록도로부터 시작하는 민생 정치’에 대한 의견을 나누곤 했다. 그날이 보고 싶다.
정치의 답은 높은 곳보다 낮은 곳에 있다. 낮은 곳으로 내려갈수록 그곳으로부터 더욱 값진 답을 얻는다. 그게 정치의 묘미이다. 심심 산속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더욱 값진 약초를 캐는 이치와 같다.
코로나19의 한파를 물리쳤지만, 후유증이 심각하다. 그 중심에 자영업자가 있고, 민생의 꺼진 어깨가 있다. 하지만 소록도 등을 비롯한 나환자촌은 ‘끼니를 어떻게 이어가느냐’는 생계의 문제를 떠나 ‘ 어떻게 생명을 부지해 가느냐’는 생존의 기로에서 어려운 날들을 보내고 있다.
총선을 앞둔 11월의 정가가 시끄럽다. 정치세계는 마치 동물의 세계와 흡사하다. 대부분 자신들만이 살아남겠다는 아우성들이다. 이러니 고래 싸움에 민생인 새우등이 남아날 리가 없다.
차제에 국민의힘 구자근 의원이 몇 달 전부터 긍정적으로 검토해 온 ‘소록도로부터 시작하는 민생정치’가 현실화하길 기대한다. 시의원 시절, 어렵고 힘든 서민들을 얼싸안던 ‘너털웃음’으로 새벽을 열던 구자근 의원의 ‘아주 낮은 정치’가 소록도 민생 정치를 통해 중앙 무대에서 진화하길 바란다.
‘소록도로부터 시작하는 민생 정치’ , 그 감동어린 행보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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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영수 여사 [ 사진 출처=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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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29일 자 k문화타임즈 보도
뭉그러진 나환자의 손 부여잡던 육영수 여사
[K문화타임즈= 김경홍 기자] 아름다운 삶은 가고 없을지언정 세월은 흘러도 엊그제만 같다. 마치 새싹을 풀어올리고 동구 밖을 나서는 봄비처럼.
육영수 여사가 우리 곁은 떠난 1974년, 그로부터 46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추억은 어슴푸레이 밝아오는 동녘 하늘의 샛별만 같아 보인다. 그만큼 진한 추억은 지금까지도 떠나지 않고 남아 혼곤한 가슴을 물들이고 있기 때문이리라.
박정희 대통령에 이어 박근혜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끈끈한 맥과 함께 호흡하고 있는 구미시민들에게 육영수 여사는 그리움 그 자체일 것이다.
1974년 8월 15일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장인 장충동 국립극장장에서 비운을 맞은 육영수 여사, 전국 각지에 마련된 분향소에는 눈물을 가슴에 모아쥔 국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지천을 흘러내린 냇물이 강을 이루듯 가고 없는 세월은 다시 시공을 넘나들어 우리 곁으로 다가섰다.
왜 국민들은 세월이 흐를 만큼 흐른 지금도 인연이 끈을 놓아주지 않은 것일까.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그 시절, 독재와 항거하던 젊은이들을 무더기무더기 철창 안으로 내동댕이치던 그 무렵, 그래도 그들의 가슴을 적신 것은 육영수 여사의 따스한 모정이었다. 그만큼 그 당시에도 육 여사는 국민의 가슴을 아름다움과 은은한 사랑의 이미지로 채색게 했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육 여사는 살아생전 그늘진 곳을 찾아다니며 국민들에게 사랑을 심어주는 모정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민주를 외치는 젊은이들을 잡아들이는 폭정의 상황 속에서 국민들로부터 추앙을 받던 육영수 여사, 이해할 수 없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국민으로부터 추앙받던 사랑의 힘은 어디에서 발현한 것일까,
▶나환자의 뭉그러진 손 부여잡던 타아의 삶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낯선 친구 만나면 /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푸세미 같은 해는 서산이 남는데/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 리 먼 전라도길- 나환자 한하운 시인의 전라도길 전문(소록도로 가는 길)”
한하운 시인이 애달프게 노래한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도는 육영수 여사가 자주 찾아 나한의 뭉그러진 손을 잡아주던 곳이다. 당시만 해도 한센병은 전염병의 일종으로 분류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육 여사는 종종 이곳을 찾아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지는 한센병 환자’들의 애환을 끌어안던 곳이다.
이러한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거가 있을 때마다 야성이 강한 호남 특유의 성향과는 달리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는 유달리 보수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기도 했다.
그 당시 가장 천대받던 곳은 다름 아닌 나환자촌, 육 여사는 소록도뿐만 아니라 전국의 77개 나환자 촌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특히 전북 익산군 상지 나환자촌을 방문한 육 여사는 뭉그러진 손을 덥석 어루만지면서 함박웃음을 안기곤 했고, 이 모습을 지켜본 나환자들은 감동의 을음을 터뜨렸다. 이러한 감동이 아직도 우리들 가슴에 남아있기 때문일까. 세월은 흘러 영면에든지 45년 세월이 흘렀지만 흐르는 1백 리 낙동강 물속에 육 여사의 따스한 웃음은 투영되어 있는 것만 같다.
육영수(192511월 8일- 1974년 8월 15일) 여사는 충청북도 옥천 출신이다, 본관은 관성 육 씨. 아버지 육종관과 어머니 이경령 사이의 1남 3녀 가운데 둘째 딸로 태어났다. 큰 언니는 육인순, 오빠는 육인수 였다.
육 여사는 1930년 말 옥천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서울 배화여고를 졸업한 후 옥천중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50년 10월 12일 당시 박정희 중령과 결혼했다.
육영수 여사는 근혜, 근영, 지만 등 3자녀를 낳았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대통령 부인으로서 각종 사회 활동, 육영사업, 적십자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사회 활동으로 육 여사는 양지회 활동과 함께 각 시군에 여성회관을 건립, 여성의 사회 참여를 선도하기도 했다. 여성의 사회참여 운동을 가시화시킨 선구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여성에 대한 관심은 각별했다.
자연보호 운동, 식생활 개선, 의류 혁신, 문화사업 지원, 자원봉사 활동, 적십자 활동, 양지 진료소의 개설, 불우이웃 돕기, 윤락여성의 자활 운동, 양로원, 고아원 위문, 전몰군경 미망인 자활 운동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통해 국민 의식 개혁에 앞장선 육 여사는 특히 희망의 등불이라는 농어촌 여성 계몽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도 각별했다. 청소년들을 위해 경로효친 사상을 불어넣었고, 어린이 대공원 조성, 1969년 4월 14일에는 육영재단 설립과 어린이 회관을 짓고,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 <꿈나무> < 보물섬> 등을 발간했다. 아울러 청소년들에게 직업교육을 시킬 목적으로 정수 직업 훈련소를 개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4년 8월 15일 광복 제29주년 기념식장에서 재일교포 문세광의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장례식이 있던 그해 8월 19일, 국민의 애도 속에서 육 여사는 우리 곁을 떠나 국립묘지에서 영면에 들었다.
1974년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세상을 떠나자, 1974년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유학을 떠난 박근혜 대통령은 급히 귀국했다. 이후 어머니가 사망한 1974년부터 아버지가 사망한 1979년 10월까지 박 대통령은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을 대신했다. 이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어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새마을 운동의 일환인 새마음 운동을 주도했고, 1982년 육영재단, 1994년 정수장학회 등을 물려받아 운영했다.
이후 박근혜 대통령은 1998년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세상과 결별한 지 20년 만의 일이었다.
2008년 3월 27일 구미 순천향병원에 마련된 고 김재학 생가보존회 회장의 빈소 앞에서 애도를 한 당시의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 물끄러미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던 구미의 한 시민은 이렇게 표현했다,‘ 구미의 딸이 저렇게 외롭기만 할까’ 대부분 시민의 마음이 그랬으리라.
1974년 조총련계인 문세광에게 총탄을 맞아 유명을 달리한 고 육영수 여사, 1979년 10월 26일 비운을 맞은 박정희 전 대통령, 2006년 지방선거 유세 도중 피습을 당한 박근혜 대통령, 2008년 3월 26일 피살된 박정희 대통령 생가보존회 김재학 회장을 조문하던 당시의 외로운 모습, 그리고 2017년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과 이듬해 실시한 구미 지방선거에서 나타난 민심 이반은 보수를 몰락시켰고, 진보의 물줄기를 발원케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삼성전자와 엘지전자 등 대기업이 구미를 떠나면서 구미는 침체기를 맞고 있다. 내륙 최대의 공단으로서 한때 이 나라를 먹여 살린 구미공단은 KTX 없는 내륙 속의 섬으로 전락했다.
한국 산업 근대화의 상징인 구미 1공단, 흐르는 세월과 함께 구미 1공단은 5공단에 이르기까지 양적 성장을 했고, 이를 구미시민들의 품에 안겼다. 하지만 안긴 선물속에는 민심의 신음만이 요란하다.
1974년과 1979년 어머니 육영수 여사와 아버지 박정희 대통을 비운에 떠나보낸 딸 박근혜 대통령은 2017년 이후 세상과 벽을 쌓은 철창 속에서 5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종종 그의 뇌리에는 비운으로 영면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추억하리라. 육영수 여사 제96주기 숭모일, 나환자의 뭉그러진 손을 부여잡던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애틋한 사랑도 샛별이 떠오르는 날마다 추억하리라.
경제 부흥과 인권탄압이라는 양면의 세계를 오르내리던 남편,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한 세월을 살다가 세상을 뒤로한 육영수 여사, 나환자의 뭉그러진 손을 부여잡고 말할 수 없는 혼돈과 혼란을 겪어야 했던 가슴앓이를 소리 없이 털어놓기도 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