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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기획] 김장호 구미시장·박교상 구미시의회 의장은 달랐다⇁그때 그런 생각을 했더라면

김경홍 기자 siin0122@hanmail.net 기자 입력 2025.04.02 17:15 수정 2025.04.03 04:41

3대 인물 역사벨트화⇀항일운동시대 왕산 허위 +대한민국 건국시대 창랑 장택상 +산업화시대 박정희
창랑 장택상 생가 매입 여론 거들떠보지조차 않던 역대 민선

왕상 허위 생가터엔 원룸⇀(대안) 왕산기념관 운영 활성화
임오동 고택 원형 오간 데 없어⇀(대안) 재조명, 기념사업 추진해야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 추진 활발


 

↑↑ 식당을 운영하던 업주 김모씨가 대구시민에게 매도하기 직전 창랑 장택상 고택(생가)
[사진 =k문화타임즈]


2025년 3월 29일, ‘대한민국 건국과 나’ 재출간 기념회
김장호 시장⇀역사를 잊은 민족이나 개인에게는 미래가 없다⇀ 창랑 장택상 재조명·재평가 거론, 국가 차원에서도 나서야
박교상 의장⇁구미는 항일·건국·산업화의 상징적 인물이 탄생한 역사의 고장, 재조명해야
재조업 일변도 구미시⇁민선 30년, 다양성의 구미시대 전환 청신호



[분석 기획 칼럼 전문매체 k문화타임즈 =발행인(시인 겸 소설가)김경홍] 제조업 도시 구미만을 강조해 온 인식의 변화가 리더그룹을 중심으로 확산하고 있다. 회색 일변도의 구미 풍경화가 다양한 색깔로 어우러질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김장호 구미시장은 취임과 함께 ‘여러 개의 곳간을 가진 구미시대 지향’을 공론화했다. 오로지 제조업 곳간만으로는 미래 구미를 장담할 수 없다고 단언한 김 시장은 문화예술 분야에 뿌리를 내린 ‘관광산업 곳간’에 주목했다. 그리고 시정 추진의 무게추를 양쪽 산업에 양분하면서 ‘달라질 구미시대’를 예고했다.

그 결실은 최근 서울과 부산, 인천 등 유수의 도시를 물리치고 국책사업 ‘문화선도산단’을 폐허 위기에 직면한 구미1산단의 유치 결과로 이어졌다. 사실상 구미6문화공단 선정이다.
구미시의회가 줄기차게 주문해 온 시립박물관 겸 대한민국산업역사박물관 건립에 청신호가 켜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여기에다 더해 최근 김 시장이 역사의 도시 구미 구현을 공론화하면서 이목을 집중시켰다. 박교상 의장 역시 뜻을 같이하면서 시책 추진 방향에 힘을 실었다.

지난달 29일 구미 성리학역사관 강당에서 진행한 창랑 장택상 선생 자서전 ‘대한민국과 나’ 재출간 기념회에서 김 시장은 “역사를 잊은 민족이나 개인에게는 미래가 없다”면서 “항일운동 강점기, 산업화 시대와 관련한 역사는 활발하게 이뤄졌으나 건국 역사는 소홀한 측면이 없지 않다. 대한민국 건국의 상징인 창랑 장택상 선생에 대한 업적은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구미시 차원에서도 전문가의 의견과 토론회 등을 통해 재조명되어야 한다”고 밝힌 김 시장은 “인물의 도시 구미는 일제 강점기의 왕산 허위,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의 창랑 장택상, 산업화 시대의 박정희 대통령 등 구미는 이 시대의 상징적 인물을 배출한 고장”이라고 강조했다.
박교상 구미시의회 의장 또한 ““성리학의 뿌리인 구미는 일제 강점기 왕산 허위, 대한민국 건국 시대의 창랑 장택상, 산업화 시대의 박정희 대통령 등 시대를 주도한 인물의 고장”이라며 “상대적으로 빈약한 창랑 선생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구미시를 중심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때 이런 제안 받아들였다면
<2016년 5월 17일 김경홍 기자 보도 내용>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뒤질 것이 없는 역사인물의 삼각벨트
창랑 장택상 고택(생가) 구미시가 매입 나서야


구미시 상모사곡동, 임오동 지역은 역사 인물의 삼각벨트를 형성하고 있는 곳이다. 상모사곡동에는 근대산업화의 상징인 박정희 대통령 생가가 있고, 인접한 임은동에는 광복운동의 상징인 왕산 허위선생 기념관이 있으며, 또 이곳에는 근대한국정치의 상징인 창랑 장택상 고택(생가)이 있다.
전국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상징적인 ‘역사인물 삼각벨트’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관광산업으로 융합 발전시킬 경우 막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 생가와 왕산 허위 선생과 관련된 사업은 구미시 차원에서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는 반면 초대 외무부 장관이면서 총리인 창랑 장택상은 아웃사이더에 놓여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개인 소유로 돼 있는 창랑의 고택(생가)을 시가 매입해 역사인물의 삼각벨트로 활용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더군다나 창랑의 고택은 역사적 상징성에다 건축된 지 90여 년이 된 한옥형 고택이라는 점 때문에 더 큰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전국의 각 지자체가 고택을 보수해 ‘한옥 상품화’에 올인하고 있다는 시류에 비추어도 더 이상 간과해선 안 될 과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안타까운 여정의 창랑 장택상 고택(생가)
1997년 4월21일 자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20년 전(2016년 기준 40년 전) 창랑의 아들이 당시 1천만 원이 채 안 되는 값으로 처분한 고택은 몇 사람의 손을 거쳐 1987년부터는 남화사로 바뀌었고, 사찰 측은 1990년 중반 이 곳을 떠날 계획으로 집을 내놓았다.
1995년, 94년 전(2016년 기준) 전통한옥으로 지어진 고택을 10억 원에 팔기로 하자, 미국에 있는 딸이 이 집을 찾아 다시 사들이려다 돈이 안 돼 눈물만 떨구고 돌아섰다. 이후 고택은 개인에게 넘겨졌고, 그로부터 다시 고택을 매입한 또 다른 개인은 현재 음식점업을 했다.

당시 업주 A씨는 “구미시가 매입하겠다면 흔쾌히 응할 의사가 있다”면서 “유서깊은 역사의 현장과 고택을 구미시 차원에서 보존해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계승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후 업주 A씨는 대구시민에게 고택을 넘겼고, 고택을 사들인 새 주인은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원형이 훼손된 상태다.

⇀김영삼 대통령의 흔적도 남아 있는 90년 역사의 창랑고택
이런 점에 비춰 건축된 지 90년 된 창랑 장택상 고택(생가)을 구미시가 매입하고 여기에다 역사적 향기를 입힐 경우 부가가치를 제고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창랑 고택은 김영삼 대통령의 흔적이 살아 있다는 또 다른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어 가치를 더해 준다.

1947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한 김 대통령은 당시 정부수립 전국 웅변대회에서 2등을 했다. 웅변에 감탄한 장택상은 김대통령을 측근으로 삼고, 그 무렵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 운동을 위해 임운동으로 함께 내려왔다.

1997년 4월 21일 자 중앙일보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 장택상 비서로 정치에 입문한 김영삼 대통령이 선거 시절에 고택을 자주 드나들었다. 부근에 살고 있는 창랑의 조카며느리 이원규(당시 81세) 할머니는 김대통령이 비서로 일할 때는 내가 와이셔츠도 다려주고, 음식도 해 주었다”며 “ 그 인연으로 지금도 대통령과 스스럼없이 전화를 한다”고 말했다.
한보사건이 터진 이후 “우째 정치를 그리 하노”하고 물었더니 “미안합니더…”란 말뿐입디다는 게 이씨의 전언이다.

이후 6·25전쟁 당시 학도 의용군으로 복무한 김영삼 대통령은 1951년 장택상 국무총리의 인사담당 비서로 일했고, 1953년 9월, 창랑이 국무총리를 사퇴하자, 김 대통령은 자신의 고향 거제에서 자유당 후보로 나서 당선됐다. 25세의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후에도 창랑과 인연의 끈을 놓지 않은 김대통령은 임운동 고택을 종종 드나들었다고 한다.

[창랑 장택상은?]
옛날부터 인물이 많기로 유명한 구미(선산)에는 현대에 들어서도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물론이요, 김윤환, 박세직 전 의원도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창랑 장택상(1893년~1969년) 전 국무총리도 구미가 탄생시킨 출중한 인물에 속한다.
이승만 정권 당시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 총리의 고향이 바로 구미시 임오동이요, 임오동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을 낳은 상모동과 이웃해 있다. 창랑의 부친인 인동 장씨의 장승원(1852년-1917년)은 당시 3대 부자로서 구미로 편입되기 이전인 칠곡의 갑부로 유명했다. 그 갑부의 흔적이 지금도 생가의 형태를 통해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창랑은 박정희 대통령과 이웃이면서도 서로 다른 길을 갔다. 영국 에든버러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해 정구회 회장으로 있다가 광복을 맞자, 수도경찰청장과 제1관구 경찰청장에 취임했다. 이어 1948년 정부수립과 동시에 초대 외무부 장관에 취임했으며, 1950년 고향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그해 민의원 부의장에 선출됐다. 1952년에는 국무총리에 기용됐다. 이후 1958년 제4대에 이어 1960년 제5대 민의원에 당선됐으나, 5.16으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다. 이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창당한 공화당 후보와 6대 선거에서 겨뤘으나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창랑은 공화당과 늘 대립각을 세워온 신민당 고문을 지내기도 했다. 정치의 격동기 속에서 신민당 고문을 지내게 된 이유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향이 컸다. 1969년 세상을 떠난 창랑이 다시 세상에 회자된 것은 2006년 KBS가 드라마 <서울 1945>를 방영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아이는 99%, 엄마의 노력으로 완성된다”는 책으로 잘 알려진 창랑의 셋째딸인 장병혜 박사가 “아버지를 여운형 암살사건의 배후인 것처럼 묘사해 명예를 훼손했다”며 KBS를 상대로 1억여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던 것. 결국 기각되기는 했지만, 이 과정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을 통해 “사형당할 김대중 전대통령을 자신의 아버지가 살렸다”고 말해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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