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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0.1%에 편승하는 이율배반의 구미주민 자치시대, 안타까운 우리들의 자화상

김미자 기자 cloverail@hanmail.net 기자 입력 2023.03.23 14:53 수정 2023.03.23 22:22

국민과 주민이 현명해야 1%와 0.1%의 독점시대를 극복할 수 있다


사례 하나 ⇥ 1%를 추종하는 시대, 고액 연봉을 좇아 공무원 세계를 탈출하고 싶다는 안타까운 세태 >



[시사 칼럼= 발행인 김경홍]낡은 코트를 껴입고 상가 골목을 휘청거리던 사내가 쇼윈도 앞에서 걸음을 멈춰 세웠다. 진열대에는 쌀이 가득 쌓여 있었다.
허공으로 뿜어내는 담배 연기가 짙은 어둠 속을 배회했다.

“진열대에는 쌀이 가득 쌓여있는데 왜, 뒷골목 곳곳에는 굶주린 가난이 아우성일까.”
그 사내가 바로 마르크스와 함께 과학적 공산주의 이론을 써 내린 변증법적‧사적 유물론의 창시자인 독일의 사회주의자 엥겔스 (Friedrich Engels)였다.

그의 이론은 소위, 진열대에 가득 쌓인 쌀을 굶주린 이들과 공평하게 나눠 갖자는 게 핵심이었다. 부를 분배하자는 그의 이론은 훗날 소련 및 동유럽으로 흘러들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태동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평범한 국민에겐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 이론은 오히려 공산독재를 유지하게 하는 수단으로 악용됐다. 모두를 잘살게 하자는 사회주의 이론이 공산 독재주의자를 태생시킨 무기로 전락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북한이다. 모두를 잘살게 하자는 이론이 김정은과 소수의 인민을 호의호식하게 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으니, 참담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그 엥겔스 이론은 1%가 부를 독점하고 있는 자본주의로 흘러들어, 부와 권력은 그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수반해야 한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탄생시키는 씨앗이 됐다. 그 중심에 350억 달러를 기부한 세계 최고의 부자 빌 게이츠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선진 대한민국과 경북 구미, 왜 우리의 삶의 현장에는 제2, 제3의 빌 게이츠 형型 부의 분배주의가 태어나지 않는 것일까. 더 큰 불행은 이 나라 국민 대부분, 특히 우리 시대의 기형아, MZ 세대들이 1%의 부의 독점시대를 증오하고 저주하면서도 편승하고 있다는 데 있다.
1%의 부의 독점을 증오하면서도 그 기류에 편승하는 이 나라의 슬픈 자화상, 자아실현을 위한 학과 선택보다 억만장자가 되기 위해 의예과에 목을 매달고, 고액 연봉을 준다면 신념과 가치관을 실현할 수 있는 양질의 토양을 탈출하는 시대, 박봉의 공무원이 싫다며 고액 연봉을 좇아 소중한 가치를 집어던지는 시대.

그 이단아적인 세태가 순수이성을 회복하지 않는 한 언제든 그들 중 누군가는 1% 앞에서 좌절하고, 언젠가는 1% 시대의 희생양이 될는지 모른다.
진열대에 가득 쌓인 쌀을 절망스럽게 지켜보던 엥겔스가 다시 우리네 삶의 현장에 살아올지 두렵기만 하다.

사례 둘⇥ 0.1%를 증오하면서 0.1%에 편승하는 구미 자치주민 시대
무명의 들풀 잎을 밑거름 삼아 나무는 잎을 틔우고, 꽃잎을 풀어올린다. 그래서 만발한 꽃은 만인이 누리는 즐거움이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주민자치 시대의 이력도 그렇다.

70~80년대, 0.1%의 독재 권력과 맞선 무명의 젊음들은 최루탄 가스를 뿜어내는 막다른 벼랑의 자락을 부여잡고 민주를 외쳤다. 그 젊음들이 떨궈낸 희생을 밑거름 삼아 주민자치 시대가 잎을 틔우고 권력분배라는 꽃잎을 풀어올렸다. 그리하여 만발한 꽃은 자치시대의 주민에게 권력 향유의 희망을 안겼다.
이름 없는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하지 않았다면 주민자치 시대는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1%가 부를 독점하고, 0.1%가 권력을 독점하는 시대의 구미자치 주민들은 자치의 현장에서 0.1%를 추방하기 위한 용기있는 삶을 지향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결론은 ‘아니다’이다.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주민의 삶을 갈망하면서도 구미자치의 주민들은 0.1%에 편승하고 있다. 총선 때마다 0.1%의 권력은 구미자치 현장에 그들의 입김에 맞는 특정인을 투입하는 낙하산 공천을 일삼았고, 구미자치 주민들은 0.1%의 권력이 낙점한 전략공천 인사에게 압승이라는 월계관을 씌었다.
주민에 의한 주민자치를 통해 0.1%의 권력 독점 시대를 극복해야 한다고 외치지만, 정작 그들은 0.1%의 권력 독점에 편승하는 이율배반의 길을 걸어왔고, 가고 있는 것이다. 그 이단의 세태 속에서 자치주민의 가치는 존중될 수도, 존재할 수 없다.

제22대 총선을 11개월여 앞둔 3월의 구미정치 현장이 또 오류를 답습하고 있다. 총선에 뜻을 둔 출마 예정자들은 만인이 주인인 주민자치의 가치를 존중한다면서도 0.1%의 권력에 줄을 대기 위해 경부선 열차에 몸을 싣는다. 몸은 주민과 함께 있으면서도 마음은 구미를 떠나 0.1%의 권력 앞에 고개를 조아린다. 수십 번의 통화 시도 끝에 0.1%의 권력과 연결이라도 될라치면 공천은 떼어놓은 당상이라며, 호들갑을 떨며 고개를 뻣뻣하게 추켜세운다.

문제는 그 0.1%의 권력으로부터 공천을 받은 낙하산에게 주민들이 총선 압승이라는 과거의 전력으로부터 자유로울수 있느냐는 점이다.

내년 4월, 제22대 총선에서는 만인이 주인이어야 할 주민자치의 가치를 스스로 부정하는 ‘바보 자치주민’의 오명을 벗어던져야 한다. 0.1%의 권력을 극복해야 할 자치주민들이 0.1%에 편승하는 이율배반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만 0.1%가 주민의 존재를 두려워하는 진정한 자치시대, 권력 독점을 해체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작은, 0.1%의 권력에 아부하는 출마예정자들, 머릿속에 주민은 없고 0.1%만이 있는 그 이단아를 총선을 통해 주민자치 현장으로부터 추방하는 것이다.
주민이 현명해야 유망한 지도자를 낳는 법이다. 동물처럼 떼 지어 몰려다니는 군중이 아닌 자신의 판단에 따라 권리를 행사하는 민중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게 0.1%를 극복하고 만인이 행복한 주민자치 시대, 0.1%의 권력이 만인에게 골고루 분배되는 자치시대를 여는 길이다.
막다른 독재 권력의 벼랑 끝에서 민주를 외치며 산화해간 젊은 청춘들의 희생 앞에 숙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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