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출처=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 |
구미 사람들은 3·1운동이 1919년 3월부터 약 3개월가량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며, 200만 이상이 참여한 비폭력운동이고 일제의 폭력적 진압과정에서 7,500여명이 죽고 1만 5천여 명이 다쳤으며 5만 명 이상이 검거된 거족적 항일투쟁이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일지 못하고 있고 2005년 발간된 구미시지에도 정확한 내용이 나타나지 않아 안타깝다.
더구나 최근 일제 강점기의 치욕을 엉뚱, 괴상망측한 논리로 제2의 매국노가 나타나는 일이 벌어지는 현실에서 우리 지역에서 있었던 일을 밝혀 진실을 거짓으로 만들려고 획책하는 무리들에게 분명하게 이를 밝히고자 한다.
구미·선산 지역에서의 삼일운동은 지금 구미 시내 두 지역과 선산 지역 두 군데에서 각각 전개되었다. 물론 산발적인 시위의 형식이다. 관련 기록이 많지 않아서 <구미향토문화대전>과 3·1운동으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이들의 공훈록(국가보훈처)을 참고하여 이를 재구성했다. [편집자]
↑↑ [사진 출처=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 |
◇해평 독립 만세 운동(주재소로 행진하여 격렬하게 충돌)
해평의 독립 만세 운동은 구미·선산에서 펼쳐진 만세 운동 가운데 가장 격렬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 이유는 진평동과 임은동의 그것이 마을 뒷산을 무대로 펼쳐졌지만, 해평에서는 시위대가 일제 식민지통치의 물리적 폭압 기구인 경찰 주재소로 행진해 갔기 때문인 듯하다. 해평면 산양동 교회의 전도사 최재화(1892~1962)는 이웃 인동면의 기독교도 박진오와 함께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4월 3일 밤 11시 30분께 최재화는 산양동·송곡동·금호동에서 나온 70여 명의 시위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해평의 경찰 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일본 경찰이 무력을 행사하자 최재화는 시위군중과 함께 투석으로 맞섰다. 시위대는 70여 명에 불과했지만, 기세에 놀란 일본 경찰은 공포를 쏘아대며 선산경찰서와 군대에 지원을 요청했다. 선산에서 경찰부장 이하 6명, 대구의 일본 헌병이 오장 이
하 3명, 상주의 일본군 수비대 11명이 달려왔지만, 군중들은 해산한 뒤였다.
이튿날, 일본 경찰은 만세 운동에 참여한 동민들 가운데 55명을 체포하였다. 최재화(1990 애족장)는 피신했으나 궐석재판으로 1차에서 징역 3년, 2차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고, 다른 24명은 각각 태형 80대를 받았다.
최재화는 이후에도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벌였다. 만세 운동 후 피신한 그는 5월, 대담하게 경상북도 내의 조선인 관공리(官公吏)에게 사직을 권고하는 인쇄물을 만들어 배포하고, 대구 시내의 조선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폐점할 것을 요구하는 격문을 배포하기도 했다. 6월에는 애국청년을 모집하여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게 하고, 또한 청년 지식인 여러 명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파견하여 독립운동에 참여시키는 등,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1920년 7월, 그는 인근 상주에서 체포되었지만, 대구로 호
송되는 중에 탈주하였다.
일제는 궐석재판에서 중형을 선고한 그를 체포하기에 혈안이 되었으나 최재화는 7월, 일본을 거쳐 중국 베이징으로 탈출하였다. 그는 은사 김규식의 천거로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김구 휘하에서 베이징의 임정 자금 모금책을 맡기도 했으며 임시
정부 최고정치 회의에 최연소자(27세)로 참가하기도 했다.
1926년 그는 화북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국내 여러 교회의 담임을 맡아 사역했다. 그는 1955년 개교한 계명기독대학(현재 계명대학교)의 설립자 세 사람 중 한 사람이다. 그의 고향인 산양리 마을 앞에는 1963년 ‘애국지사 백은 최재화 목사 기념비’가 세워졌다.
◇임은동 독립 만세 운동
<임은동 시위 관련 일제고등경찰 기록> 4월 8일 오후 10시경 300여 명의 동민들과 더 이상 재판기록 남지 않아 2005년 발간된 구미시지의 이 부분이 없다. 따라서 이들에 관한 재판 기록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임은동은 왕산(1855~1908) 선생의 항일의 기풍이 강한 곳으로, 지방 유지인 강용준·유시동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를 모의하고, 불어 임은동 뒷산에서 밤늦도록 ‘독립 만세’를 외쳤다. 다음날 즉 4월 9일 이 소식을 들은 순사부장 이하 4명, 일군 수비병 5명, 인동 주재 일군 헌병 2명이 임은동으로 왔으나 동민들은 마을 뒷산으로 은신하여 의거에 참여하였던 군중을 검거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 후 4월 15일 다시 일본의 군경이 임은동에 갑자기 들어와 만세 주모자들을 모두 검거해 갔다. 이곳 만세 주모자들의 판결문이 전하지 않아 이후 구체적으로 전개된 내용은 알 수 없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구미지역의 만세사건에 있어서 첫 봉기를 촉발한 것은 학생층이었으나 3월 중·하순으로 가면서 차츰 군내의 면(面)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구체적으로는 선산장터 독립만세운동을 통해 지방의 지식인과 장터 상인을 중심으로 항일 저항의 저변이 확대된 점이 다른 지역과의 운동의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만세운동에 앞장선 선각자들 중 해평의 최재화 목사는 대구 계명대학의 설립자 3인 중 1인이었고, 이영식(구미 만세운동의 첫 시발지, 진평동)은 대구대학을 세운 교육자들이어서 학문을 통해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원대한 정치이념을 실현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