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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기획‧구미 정치사·2차] 2000년 총선이 구미정치의 격변을 예고했다

김경홍 기자siin0122@hanmail.net 기자 입력 2023.01.05 02:03 수정 2023.01.06 01:29

22대 총선 D-day 14개월⇥ 총선 1대~21대, 72년 구미 정치사(政治史)


▲보도 순서
△1차 보도⇢ 시련과 극복, 극복과 시련의 구미 국회의원 (15명)
△2차 보도⇢ 시련과 극복, 그리고 시련의 구미정치 1기 (1대~10대 육홍균, 김우동, 김동석, 신준원, 김봉환) ⇢시련과 극복, 그리고 시련의 구미정치 2기 (11대~15대 김윤환, 박재홍, 박세직)
△3차 보도⇢시련과 극복, 그리고 시련의 구미정치 3기 (16대 ~19대 김성조, 김태환, 심학봉) ⇢시련과 극복, 그리고 시련과 도전의 구미정치 4기 (20대~21대 백승주, 장석춘, 구자근, 김영식)

정치 세계에는 영원한 아군과 적군이 없고, 영원한 패자와 승자가 없다.”
제헌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된 1948년부터 2020년 제21대 선거에 이르는 72년 동안 구미가 배출한 국회의원은 15명, 이들은 하나같이 낙선의 시련을 딛고 일어섰거나 권력의 영화(榮華)를 뒤로한 채 고독한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며, 권력무상 ‧ 인생무상이다. 그러므로 권력을 가졌다고 으스댈 일도, 패했다고 낙담할 일도 아니다. 피었던 꽃이 지고 다시 피어나듯 정치 세계는 이러한 자연의 섭리를 빼닮았다.

K문화타임즈가 구미총선 72년 역사를 3차에 걸쳐 들여다본다.

[편집자]



◇시련과 극복, 그리고 시련의 구미정치 1기 (1대~10대 육홍균, 김우동, 김동석, 신준원, 김봉환)
구미정치 1기는 육홍균 ‧ 신준원 ‧ 김우동 ‧ 김동석 ‧ 김봉환 의원 등 5명이 선거 때마다 서로 대결하면서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는 드라마틱한 정치사를 써 내렸다.

△제1대 선거 (1948년 5월 31일 ~ 1950년 5월 30일/ 선산군 일원)
옥성면 주아리가 고향인 육홍균 의원이 당선됐다. 수원고등농림고(현 서울대 농대) 일본대학을 중퇴했다.
농민운동을 주도하다가 1939년 4월 선산 경찰서에 검거돼 1년 3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의병운동, 독립운동가라는 별칭이 따라다닌다. 3대 선거에서 당선된 김우동 의원을 눌렀다. 대한독립촉성 국민위원회 소속으로 1만 5,903표(45.5%)를 득표했다.

△ 제2대 선거(1950년 5월 31일 ~ 1954년 5월 30일/ 선산군 일원)
재선을 겨냥한 육홍균 의원에게 신준원‧ 김동석 의원이 맞섰으나 고배를 마셨다. 대한국민당으로 말을 갈아탄 육홍균 의원은 8천 724표(22.7%)를 득표했다.

△ 제3대 (1954년 5월 31일 ~ 1958년 5월 30일 / 선산군 일원)
정치세계에 영원한 승자와 패자는 없는 법이다. 3대 선거에서는 1대 선거에서 육홍균 의원에 패했던 김우동 의원이 육 의원을 누르고 도전에 성공했다. 김동석 의원은 2대에 이어 재도전했으나 분루를 삼켰다.
선산이 고향인 김우동 의원은 선산중·고를 설립한 초대 이사장 출신이었다. 하지만 무소속으로 당선된 후 이승만 독재정권이 이끄는 자유당에 입당하면서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선산 정치사에 오점을 남겼다. 김덕 전 안기부장의 부친이다.
1만 1,499표(38.5%)를 득표했다.

△ 4대 선거(1959년 1월3일 ~ 1960년 7월 28일/ 선산군 일원)
세 번째 도전한 김동석 의원이 김우동 의원을 누르고 설욕했다. 개표 결과 김우동 의원에게 밀려 낙선했으나 재검표 결과 당락이 뒤바뀌면서 당선됐다.
일본 도쿄 제일외국어학교를 수료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자금 송금과 비밀잡지 근우 간행 등을 통한 항일 운동을 펼쳤다.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후 자유당에 입당했다.
오상학원을 설립한 그는 김윤환‧ 김태환 의원의 부친이다. 훗날 한국 정치사에 조병옥, 김대중과 함께 삼부자 국회의원 3대 가문의 기록은 남긴 주인공이다.

△5대 선거( 1960년 7월 29일 ~ 1961년 5월 16일/ 선산군 일원)
2대 선거에서 육홍균 의원에게 패한 신준원 의원이 육홍균 의원을 누르고 무소속 간판으로 당선됐다.
선산이 고향이다. 선산보통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참가했다가 투옥되면서 중퇴했다. 출옥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 문학부를 졸업했다.
귀국한 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형인 박상희, 정치적 경쟁 관계였던 김우동 의원과 구미소비조합을 결성해 항일 운동을 이어가기도 했다. 5.16으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10개월의 임기에 그쳤다.
후보자가 난립하면서 8천 99표(19.1%)를 득표했다.

△ 6대(1963년 12월 17일~ 1967년 6월 30일 / 군위군▪·선산군 일원)
6대부터 8대까지 구미정치는 김봉환 의원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그 또한 제5대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신준원 의원에게 패하는 시련을 겪었다. 3만 8,203표(58.2%)를 획득했다.
김윤환‧ 박세직 의원의 영향력에 비견할 만큼 중앙 정치력이 강했다. 선산 출신으로 서울법대 졸업 후 조선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그는 동향의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3년 6대부터 1971년 8대까지 민주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내리 당선됐다. 6대 선거에서는 3만 8,203표(58.2%), 7대에는 5만 2,456표(67.9%), 8대에는 3만 3,985표(50.7%)를 득표했다.
이어 1973년 제9대에서는 유정회 1기로 당선됐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정치규제를 당했다가 3년 후인 1983년 해금됐다. 이후에는 변호사 업무에 전념했다.
3년 전인 2020년 5월 99세의 나이로 세상을 뒤로했으나,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 예산결산위원장, 보건사회위원장 등을 역임한 중앙정치 무대에서의 족적에도 불구하고 고향 구미는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정치 무상, 인생무상의 한 단편이었다.

△제7대 (1967년 7월 1일 ~ 1971년 6월 30일/ 군위군·▪선산군 일원)
민주공화당 김봉환 국회의원이 당선됐다. 5만 2,456표 (67.9%)를 득표했다.

△제8대 (1971년 7월 1일 ~ 1972년 10월 17일/ 군위군·▪선산군 일원)
김봉환 국회의원이 당선되면서 3선 의원이 됐다. 3만 3,985표 (50.7%)를 득표했다.

△제9대 (1973년 3월 12일~ 1979년 3월 11일/ 군위군·성주군·선산군·칠곡군)
군위와 성주를 아우르는 중대선거구제인 9대와 10대 총선에서 구미는 지역구 국회의원을 배출하지 못했다.
군위의 신현확 의원이 4만 5,330표 (28.5%), 성주의 신민당 김창환 의원이 3만 8,013표 (23.9%)를 득표하면서 당선됐다.
하지만 신현확 의원, 김창환 의원과 맞섰으나 낙선한 김윤환 의원은 10대 선거에서 유정회 소속으로 명함을 내밀면서 구미정치 2기 시대의 개막을 예고했다.

김윤환 의원은 이후 11대 전국구에 이어 13대, 14대, 15대 선거에서 내리 당선되면서 5선 의원의 이력을 남겼지만 16대 선거에서는 김성조 의원에게 패했다.
김동석 의원의 아들이자 김태환 의원의 형인 김 의원은 자신이 입당시킨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로부터 2000년 16대 선거를 앞두고 낙천이라는 정치적 사형 언도를 받았다. 이후 한나라당을 탈당해 이기택, 김광일, 조순, 이수성, 박찬종 전 의원 등 내로라하는 이들과 함께 창당한 민주국민당 간판을 내걸고 김성조 한나라당 후보와 맞섰으나 역부족이었다. 2년 후인 2002년 ‘정치허무, 인생허무’의 과거사를 남기고 빈 배로 떠났다.

김 의원은 동생 김태환 의원에게 ‘나를 위해 살려거든 정치를 하지 말고, 나라와 민족, 지역을 위하려거든 정치를 하라.“는 어록을 남겼다. 3명의 대통령을 탄생시킨 킹메이커의 정치적 말년은 외롭고 쓸쓸했다.

△ 제10대(1979년 3월 12일~ 1979년 12월 12일/ 구미시·군위군·성주군·선산군·칠곡군 일원)
군위의 무소속 김현규 의원과 군위의 민주공화당 신현확 의원이 당선됐다.
신현확 의원은 5만 6,645표(31%), 김현규 의원은 4만 9,001표(26.8%)를 득표했다.

◇시련과 극복, 그리고 시련의 구미정치 2기 (11대~15대 김윤환, 박재홍, 박세직)
김윤환 ‧ 박재홍 ‧ 박세직 의원 등 3명이 구미정치 2기의 역사를 써 내렸다. 민정당 공천에서 낙천한 박재홍 의원은 자민련 후보로 박세직 의원에 맞섰으나 역부족이었다.

△ 제11대 (1981년 4월 11일 ~ 1985년 4월 10일 / 구미시·군위군·선산군·칠곡군 일원)
민주한국당 군위의 김현규 의원, 민주정의당 박재홍 의원, 전국구로 김윤환 의원이 당선됐다. 박재홍 의원은 8만 6,204표 (52.6%), 김현규 의원은 4만 7,722표(27.3%)를 득표했다.

김윤환 의원과 함께 구미정치 2기의 주역인 박재홍 의원이 명함을 내민 선거였다.
박정희 대통령 큰형 박동희의 아들인 박 의원은 고대법대 졸업했다. 1981년 11대와 1985년 12대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출마해 내리 당선됐다.

△ 제12대 ( 1985년 4월 11일~ 1988년 5월 29일 / 구미시·군위군·선산군·칠곡군 일원)
군위의 무소속 김현규 의원, 민주정의당 박재홍 의원이 당선됐다. 민정당 소속의 박재홍 의원은 7만 9,679표 (47%), 무소속 김현규 의원은 5만 9,813표( 35.3%)를 득표했다.
하지만 1992년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박세직 의원에게 밀려 공천받지 못하자, 신한국당을 탈당해 자민련 후보로 나섰으나 박세직 후보에게 패했다. 육사를 졸업한 박세직 의원은 영어 실력이 유창했다. 노태우 이어 제9대 수도경비사령관, 1986년 체육부 장관, 제24회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을 역임했다. 2009년 지병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제13대 (1988년 5월 30일 ~ 1992년 5월 29일/ 구미시 일원 )
민주정의당 소속의 박재홍 의원과 김윤환 의원이 당선됐다. 박재홍 의원은 3만 1,481표(45.3%), 김윤환 의원은 5만 692표(76.2%)를 득표했다.

△제14대((1992년 5월 30일 ~ 1996년 5월 29일/구미시 일원, 선산·군위군 )
민자당 김윤환 의원, 박세직 의원과 비례대표로 박재홍 의원이 당선됐다.
박세직 의원은 5만 9,098표(72.9%), 선산·군위군 선거구에 출마한 김윤환 의원은 3만 6,607표 (61.5%)를 득표했다.

△제15대 (1996년 5월 30일 ~ 2000년 5월 29일
⇢구미갑 송정동, 형곡1동, 형곡2동, 신평1동, 신평2동, 비산동, 공단1동, 공단2동, 광평동, 사곡동, 상모동, 임오동, 인동동, 진미동, 양포동
⇢구미을 선산읍, 무을면, 옥성면, 도개면, 해평면, 산동면, 장천면, 고아면, 원평1동, 원평2동, 원평3동, 지산동, 도량동, 선주동, 원남동)
갑선거구에 출마한 신한국당 박세직 의원이 3만 415표(45.5%), 을선거구에서는 신한국당 김윤환 의원이 3만 7,306표 (55.7%)를 득표했다.

이어 3차 보도⇢시련과 극복, 그리고 시련의 구미정치 3기 (16대 ~19대 김성조, 김태환, 심학봉) ⇢시련과 극복, 그리고 시련과 도전의 구미정치 4기 (20대~21대 백승주, 장석춘, 구자근, 김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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