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칼럼

[새벽칼럼] 더 큰 세상을 꿈꾸는 정치인들, 그들은 칭기즈칸의 어머니 호에륜을 두고 있나

김미자 기자 cloverail@hanmail.net 기자 입력 2022.08.22 01:04 수정 2022.08.23 00:48

“아군을 적군으로 만들면 자리가 위태롭고, 아군의 세상에 안주하면 간신히 자리를 지키며, 적군을 아군으로 만들면 더 넓은 세상을 얻게 되는 법이다.”

[새벽칼럼 = k문화타임즈 발행인 김경홍] 8월의 세월이 기우는 셋째 주 주말이다. 오늘 간만에 산에 올랐다. 구미 시내가 한 폭의 그림처럼 카메라 안으로 들어온다. 공원 벤치에 앉아 이 생각 저 생각하던 노을 녘, 어디론가 걸어가던 일거미들의 행렬을 보는 것 같다.

저 작은 세상에서 ‘죽이느니, 살리느니’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으니, 산정의 나무들을 대할 면목이 없다.
그 작은 세상 속에서 삶들은 규정과 원칙을 만든다. 법을 만들고 죄와 벌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순간이다. 존재 혹은 가치의 영원함은 생명일 뿐이다.

구미 시내가 아주 작게 내려다보이는 산정을 걷는다. 세월을 훑고 간 시대의 잔재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마치 녹슨 파편처럼.
그 속에서 역사서에 나오는 신라와 고려, 몽골, 조선의 세월을 읽어낸다. 들여다보니 수억 년, 수천 년도 아닌 순간의 세월이다. 그 짧은 세월 속에서 살생과 용서, 관용의 가치들에게 영원한 진리는 존재하는 것일까.

문득 한때 세상을 호령하던 칭기즈칸이 읽힌다. 800여 년 전 유라시아 대륙을 호령한 그는 18세에 동갑내기 친구인 볼테와 결혼을 했다. 하지만 아내는 주둔지를 기습한 300여 명의 메르킷 부족의 포로로 잡혀갔다. 얼마 후 메르킷 부족을 무찌른 칭기즈칸은 아내를 되찾았지만 이미 그녀의 몸속은 적의 피가 흐르는 만삭이었다. 분노와 증오를 다스릴 수가 없던 칭기즈칸이 칼을 빼 들었다.

그때 어머니 호에륜이 타일렀다.
“아내와 적군도 포용하지 못하면서 어찌 세상을 얻겠느냐?. 세상을 얻으려면 세상을 덮을 마음부터 가꿔라.”
칭기즈칸은 빼어 든 칼을 들여놓았다.
적은 내 안에 있는 법이다. 자신을 극복함으로써 칭기즈칸은 더 큰 것을 얻었다. 그 세상이 바로 당시로선 전 세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유라시아 대륙이었다.

 

 



올해 상반기 정치 일정은 대선과 지방선거였다. 그 과정 속에서 각 캠프는 본의 아니게 수많은 적군을 만들어 냈다. 안타까운 일이다. 승자인 윤석열 정부 역시 이전 정부와 마찬가지로 적을 아군으로 끌어안으려고 하기보다는 적의 목을 치려고 안달을 내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에게 칭기즈칸의 어머니 호에륜은 없는 것일까. 과장일런지 모르지만

만삭이 되어 돌아온 윤석열의 정치적 아내(?), 이준석을 끌어안으라는 호에륜의 호소를, 윤 대통령은 귀닫고 있는 것일까.
어머니 호에륜이 곁에 없거나 호에륜이 있어도 귀를 닫는다면 유라시아를 정복하는 ‘칭기즈칸 윤석열’은 기대할 없다.

대구취수원 문제로 구미와 공방전을 벌이는 홍준표 대구시장도 마찬가지다. 그에게 진정한 칭기즈칸의 어머니 호에륜이 없거나 호에륜을 무시하기 때문에 대선 때마다 ‘낙선의 눈물’이다. 더 크게 가슴을 열고 그 가슴 속으로 흘러들어온 이 나라 백성들의 가슴과 함께해야 할 홍 시장이 이웃 형제인 구미시와 아웅다웅하고 있으니, 국민들이 훗날 이 나라의 명운을 위탁하려고 하겠는가.

김장호 구미시장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민선 구미시대 출범 직후의 일이다.
당시 사회단체장이었던 A씨는 선거 당시 낙선 후보를 지지했다. 뒤끝은 쓰라렸다. 인사를 하기 위해 도열해 있던 행사장에서 신임 시장은 A씨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스쳐 지나갔다. 요즘에도 그는 당시의 악몽을 되씹으며 증오의 불씨를 끄지 않고 있다.

더 넓은 세상을 얻으려면 그 주변에 ‘칭기즈칸의 어머니 호에륜’이 있어야 하고, 없으면 찾아야 한다.
아군을 적군으로 만들기 시작하면 운신할 자리를 잃게 되고, 아군의 세상에 안주하면 간신히 자신의 세상을 꾸려가게 되며, 적군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면 더 넓은 세상을 얻게 되는 법이다.
이게 정치의 법칙이다.

8월의 세월이 기우는 셋째 주 주말, 오후 들면서 가을 냄새가 가슴 안으로 밀려들어 온다. 다시 셔터를 눌렀다. 구미 시내가 한 폭의 그림처럼 들어온다. 그 안에서 ‘죽이느니, 살리느니’ 삿대질을 하고 있으니, 그 식솔인 필자 또한 부끄럽다.

정치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 됨이다.
정치인들은 그 역할을 해야 한다. 그 길을 헤쳐 나가기 위해선 적을 치기보다 품어 안아야 한다. 그래야 오순도순 걸어가는 숲길이 된다.



저작권자 K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