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기획 칼럼 전문매체 k문화타임즈= 발행인 김경홍] 구미시 무을면과 옥성면은 25개 읍면동 중 가장 작은 규모다. 하나의 마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 옥성면은 2026년 7월 말 현재 1,577명, 무을면은 1,676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작은 면 지역에서 1948년 제1대 국회의원 임기가 시작된 이후 2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으니, 놀라운 일이다. 시골 개천 출신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한 인물이 바로 옥성면 출신 육홍균 전 의원과 무을면 출신 강명구 현 국회의원이다.
이들 정치인이 시골 개천에서 역사의 강줄기로 흘러들 수 있게 한 힘의 원천은 항일정신과 아버지의 밥상머리 교육이었다.
|
|
|
↑↑ 왼쪽부터 옥성면, 무을면 전경 [사진=chatGPT 이미지 생성]
|
|
|
|
|
|
|
↑↑ 옥성면 출신 육홍균 전 국회의원
|
구미(선산)정치의 출발을 알린 최초의 국회의원은 옥성면 주아리가 고향인 육홍균 전 의원이다. 수원고등농림고 (현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일본 니혼대학 법학과를 중퇴했다. 농민운동을 주도하던 1939년 4월 선산 경찰서에 검거돼 1년 3개월의 옥고를 치른 육 전 의원은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그의 항일운동의 정신은 정치 입문의 촉매제로 작용했다.
1948년 4월 실시한 제1대(제헌국회) 총선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제1호 구미(선산)정치인으로 거듭난 육 전 의원은 1950년 제2대 총선에서는 고아읍 출신 독립운동가인 신준원과 김태환 전 의원의 부친인 김동석 후보를 누르면서 재선의원에 당선됐다. 하지만 3대에서는 선산 출신 김우동, 5대 선거에서는 2대 선거에서 눌렀던 신준원 의원에게 패한 후 1960년 사실상 정계를 떠났다. 그리고 그는 그로부터 23년 후인 1983년 영면에 들었다.
옥성면과 함께 구미지역 25개 읍면동 중 가장 작은 행정단위인 무을면 출신 강명구 의원의 국회 입성은 1960년 육 전 의원이 정계를 떠난 64년 후인 2024년 4월 총선에서 당선되면서였다.
|
|
|
|
|
↑↑ 무을면 출신 강명구 국회의원
|
시골 개천 출신인 강 의원이 역사의 강줄기로 흘러들게 한 힘의 발원지는 아버지의 밥상머리 교육이었다. 22대 총선 일정이 막바지를 향해 가던 2024년 4월 2일, 구미시 선산읍 선산오일장의 연단에 오른 강명구 후보의 연설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저를 기른 것은 아버지셨습니다. 새벽이슬을 헤치며 밭으로 향하는 휘어진 어깨였고, 밤늦도록 들창문 틈새로 흘러나오는 잔기침 소리였습니다.”
마치, 엄상섭 시인의 시 <아버지> 중에서 “내 고향 벼 이삭은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내 유년은 들창문을 두들기던 아버지의 기침소리를 듣고 자랐다”를 떠올리게 하는 연설이었다.
그리고 그날, 강 의원은 오일장의 연설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유세가 있는 오늘 새벽에도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당당하지만 낮은 자세로 머리를 숙여라, 나보다 남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해라. 나쁜 얘기 마라, 늘 감동을 줘라.”
40대의 젊은 정치인이 당당하게 갈 수 있는 바른 정치의 원천은 ‘겸손하지만 당당한 삶, 나보다 남을 위한 삶의 가치를 가르친 아버지의 밥상머리 교육’과 받은 교육을 체질화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온 순수한 열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황혼의 길을 뚜벅뚜벅 가는 아버지와 늘 동행하는 강명구 의원의 지극한 효성이 마음을 친다.
작은 것이 강할 때가 있다. 그러나 강해지는 것은 우연히 이뤄지는 게 아니다. 육홍균 전 의원과 강명구 의원이 시골 개천 출신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물려받은 정신적 자산’을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으려는 열정의 삶이 있었다.
태생적 한계를 극복한 이들 정치인의 삶이 빈곤하고 혼곤한 현실의 벽 앞에서 좌절하는 수많은 삶에게 경종을 울릴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