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기획 칼럼 전문매체 K문화타임즈= 김경홍 기자] 구미시 관선 시장부터 8대 민선시장까지의 선거 과정과 희비의 일화를 2회에 걸쳐 보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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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6월 4일 구미코에서 진행된 대선 개표 현장. [사진 k문화타임즈. 재판매 및 DB 금지. 2025.87.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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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진 시장은 마지막 관선시장, 2개월 최단 임기1993년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행정의 효율화를 주창하면서 도농통합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여파가 만만치 않았다. 선산지역 임효수 도의원 등은 통합에 반대해 삭발에 들어갔고, 선산지역 주민들은 역사의 중심인 선산군의 구미시 종속은 용납될 수 없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하지만 정치적•시대적 기류는 선산군의 구미시 통합으로 이미 기울고 있었다.
‘조선인재 반이 영남이요, 영남인재 반이 선산’이라던 택리지의 역사적 기록은 기록에 불과할 뿐이었다.
통합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던 1994년 1월1일부터 1995년 4월 19일까지 관선 시대의 길을 걸어간 이가 박병련 시장이었다. 혹한이 몰아쳐도 주머니에 손을 넣는 일을 금기사항으로 여길 만큼 자기 관리에 엄격하기로 유명했던 박 시장은 부하 공무원들에게도 동일한 잣대를 들이댔다. 그에 대한 평가가 구미시청 역사의 잔잔한 일화로 잊히지 않는 까닭이다.
뒤를 이은 이가 바로 박미진 시장이었다. 민선시장 선거 열기가 후끈 달아오르던 1995년 4월 20일부터 선거가 종료된 1995년 6월 30일까지의 2개월 동안 시장직을 수행한 박 시장은 새로운 시정방침도 정하지 않았다. 임기 2개월의 박 시장에게는 사실상 민선 시장 선거 업무를 무리 없이 완수해야 한다는 정치적 책무가 주어져 있을 뿐이었다.
▻김관용 민선 초대시장 취임
구미면이 읍으로, 읍이 구미시로, 구미시가 통합 구미시로 걸어오는 동안 관선 시장을 거친 이는 14명이었다. 그 마지막 바통을 이어받은 이가 바로 김관용 민선시장이다.
하지만 민선시장이 되기까지는 가파른 능선을 타고 넘는 고비의 순간을 걸어야 했다. 고아읍 출신으로서 용산세무서장을 끝으로 새누리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 공천장을 받고 낙향한 당시 김관용 후보는 평생을 구미에서 터전을 일구며 살아온 자유민주연합 전병억 후보와 일전불사의 투지를 불살라야 했다.
김윤환, 박세직 국회의원이라는 든든한 후원군이 버티고 있었지만, 선거전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정국이었다. 사실상 일대일 구도였지만, 뒤늦게 뛰어든 무소속 강구휘, 장경환 후보의 파괴력도 만만치 않았다. 당선권에서 이들 후보가 멀어지기는 했지만, 을구가 텃밭인 김관용 후보는 같은 을구 출신인 장경환 후보의 선전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역으로 갑구가 텃밭인 전병억 후보는 같은 갑구 출신의 강구휘 후보의 선전에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마치 미분법을 풀 듯 얽히고설킨 복잡다단한 상황을 거쳐 결국 당선의 영예는 김관용 후보에게 안겼다.
개표 결과 김관용 후보가 4만 6,130표로 4만 4,469표를 얻은 전병억 후보를 1천 661표 차로 누르고 당선된 것이다. 개표가 진행된 1995년 6월 27일 늦은 밤에는 희비가 엇갈렸다. 갑구지역 개표가 진행된 올림픽 기념관에서는 전병억 후보 지지자들이 환호성을 울렸다. 개표 결과 3만 5,296표를 얻은 전병억 후보가 3만 2,539표를 얻은 김관용 후보를 2천 757표 차로 눌러서였다.
하지만 을구에서는 상황이 역전됐다. 1만 3,591표를 얻은 김관용 후보가 9천 173표를 얻은 전병억 후보를 4천 418표 차로 따돌렸기 때문이다. 결국 갑·을구 합계 결과 김관용 후보가 1천 661표 차로 신승을 거뒀다.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고아읍 민심이 승기를 가른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외에도 갑구 출신의 무소속 강구휘 후보는 15.08%·1만 9,805표, 을구 출신의 무소속 장경환 후보는 11.73%·1만 5,404표, 무소속 강상수 후보 2천 891표, 무소속 경광수 후보는 2천 584표의 득표력을 보였다.
▻무적의 재선, 단독 출마한 김관용 후보초선 임기는 3년이었다.
제2대 구미시장 선거가 1998년 6월 4일로 다가오면서 1천6백여 차로 분루를 삼킨 전병억 후보의 재도전 의지는 가열되기 시작했다. 1995년 선거의 후유증을 다스리기 위해 붓글씨로 3년의 세월을 억눌려 지냈던 그였다. 하지만 3년의 세월이 흐른 구미정치는 상전벽해돼 있었다. 결국 주변의 간곡한 만류로 전병억 회장은 재선 도전 의지를 가슴 깊이 들여놓아야 했고, 선거전은 김관용 후보의 단독 출마로 매듭됐다.
총투표수 10만 2,789표 중 9만 3,063표·90%의 쾌거였다.
▻이강웅 후보와 2파전, 3선 고지 오른 김관용 후보
단독 출마로 재선의 벽을 쉽게 무너뜨린 김관용 후보에게 세 번째 선거는 두 번째의 단독 출마를 허용하지 않았다. 한나라당 후보 경선부터 김관용 후보는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 중심에 감사원 사무관 출신의 이규건 후보의 경선 도전장이 있었다. 경선 초반부터 과연 김관용 후보가 몇 %로 차로 이기느냐일 정도로 결론이 예상됐지만 40대 초반이라는 패기와 참신함을 앞세운 이규건 후보의 도전장은 만만치 않았다.
박정희 체육관에서 경선 결과가 발표되자마자, 체육회 사무실로 달려온 김관용 후보가 ‘몇 %로 차로 이겼는지“를 계산 하는 등 과민반응을 보였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김 후보의 예민 반응의 이면에는 본선전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이끌던 한국 미래연합 이강웅 후보가 대기하고 있어서였다.
결국 본선에 오른 한나라당 김관용 후보는 고시 동기이면서 친구 간으로 포항 부시장을 지낸 한국미래연합 이강웅 후보, 민노당 황준영 후보 등과 3파전의 길을 갔다. 2002년 6월 13일,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김관용 후보가 66.4%· 6만 6,059표의 득표력으로 2만 1,691표· 21.8%를 얻는 데 그친 이 강웅 후보를 여유있게 물리치며 3선 고지에 안착했다. 민노당 황준영 후보는 11.79%·1만 1,736표였다.
▻치열했던 4대 민선시장 선거전제4대 구미시장 선거를 앞둔 2006년의 구미정가는 급변기였다. 2005년 10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수도권 규제완화 방침을 천명하고 나서면서 였다. 엘지 기업의 파주 이전설 등으로 곤욕을 치르던 김관용 시장은 좌불안석이었다. 수도권 규제완화는 구미에 치명타로 다가올 잠재적 요인이었다.
그러잖아도 경상북도 도지사를 겨냥하고 있던 김 시장으로선 한나라당 후보 경선에서 정장식 포항시장, 김광원 국회의원이라는 거물의 벽을 넘어야 할 판국이었다. 하지만 김관용 당시 시장의 대응은 남달랐다. 2005년 11월 7일, 김 시장이 정부와 여당의 수도권 규제 완화 조치에 반발한 구미시민과 도민들을 공단운동장에 집결토록 해 대규모 궐기 대회를 개최하도록 하는 병가의 전술은 성공적이었다.
수도권 규제완화 방침 발표로 구미정국이 요동치던 2006년 5월 31일의 제4대 구미시장 선거는 과열전으로 치달았다. 남유진 국가청렴위원회 홍보협력국장, 윤영길 구미시의회 의장, 김진태 변호사, 김석호 전 경북도의회 의원, 채동익 구미시 경제통상국장 등 5파전으로 전개된 한나라당 후보 경선의 열기는 소위 폭염을 방불케 했다.
치열하게 전개된 경선 본선에서 남유진 시장은 김석호 전 도의원, 김진태 변호사, 윤영길 의장을 누르고 한나라당 후보에 지명됐다. 후보별 자성론도 적지 않았다. 구미시 역사상 최장수 8년 의장을 지내면서 탄탄한 입지를 다진 윤영길 의장은 뒤늦게 경선에 뛰어들면서 기대 이상의 결과물을 도출시키지 못했다며, 내내 아쉬워했다.
본선 결과는 남유진 후보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안겨주었다. 매일 아침 박정희 대통령 생가를 참배할 정도로 박정희 정신을 추앙하던 한나라당 남 후보는 75.89%·9만 8,758표를 획득했다. 하지만 무소속으로 나선 채동익 후보도 1만 5,391표·11.82%를 얻으면서 이변을 낳았다. 이 외에 민노당 최근성 후보 1만 3,265표·10.19%, 무소속 신수식 후보 2천 719표 등이었다. 특히 한나라당의 정서가 절대적이던 당시 선거에서 채동익 후보의 득표력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된다.
▻무경선 한나라당 남유진 후보, 김석호 후보 선전
2010년 6월 27일 실시된 제5대 구미시장 선거에서 남유진 시장은 경선 없이 지명을 통해 한나라당 후보의 명찰을 달았다.
하지만 쉽게 한나라당 후보가 됐으나 남 후보는 갈수록 거세게 추격해 오는 친박연합 김석호 후보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이명박 정부시절, 친이계에 냉랭했던 구미의 친박 민심이 선거를 앞두고 급하게 창당한 친박연합에 이유 없는 사랑을 보냈기 때문이다. 친박 정서가 군중 심리를 보이던 시기였다.
그러나 승기는 남유진 후보에게 돌아갔다. 개표 결과 남유진 후보는 53.09%·7만 1,719표, 친박연합 김석호 후보는 33.51%·4만 5,263표, 무소속 구민회 후보는 13.39%·1만 8,091표였다.
▻예상을 뒤엎은 50%대 당선, 남유진 시장의 입지 강화3선을 겨냥한 남유진 시장은 새누리당 경선 당시부터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초선 당시부터 줄기차게 도전장을 내 온 채동익 전 구미시 경제통상국장과 재선 당시 출마를 결심했다가 뜻을 접은 이재웅 전 경상북도지사 비서실장에 이어 김용창 구미상의 회장이 출사표를 냈기 때문이다.
경선 시기와 방법도 논쟁거리였다. 여기에다 세월호 참사까지 겹치면서 경선 일정이 연기되었는가 하면 여론조사와 대의원 선거 방식으로부터 여론조사 방식으로 경선 방식이 뒤바뀐 경선전은 혼란의 극치였다. 이 과정에서 확인되지 않는 설이 급속하게 확산되면서 정치권은 반목과 갈등으로 빠져들었다.
이 과정에서 이재웅 후보에 이어 채동욱 후보가 경선에 불참키로 하면서 경선은 남유진 시장과 김용창 구미상의회장 등 2파전 양상으로 모양새가 잡혔다.
하지만 김용창 후보가 8년 시장 관록의 남유진 후보의 벽을 뛰어넘는 것은 한계였다. 여론조사에 의한 경선 결과 남유진 후보는 45.3%였다. 27.3%를 얻으면서 선전한 김용창 후보도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았다.
이어진 본선에서도 곳곳에 암초가 도사리면서 선거전이 긴박하게 돌아갔다. 그 중심에 선 이슈가 이재웅 후보와 김석호 후보의 단일화 논의였다. 하지만 새정치민주연합이 후보를 내고, 단일화 논의가 불발되면서 행운의 여신은 남 시장에게 날아들었다.
선거 결과 남유진 후보는 40%대 후반에 머물 것이라는 당초 예상을 뒤엎고 전체 투표수 16만 250명 중 과반을 웃도는 52.59%·8만 2,905표를 얻었다. 이어 이재웅 후보로 17.45%·2만 7,250표였고, 김석호 후보 15.91%·2만 5,904표, 새정치민주연합 구민회 후보가 14.01% ·2만 2,111표를 얻었다.
<계속-7대·8대 선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