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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복희 수필집· 연재] 내성천에서는 은어도 별이 된다 (3)

김미자 기자 cloverail@hanmail.net 기자 입력 2025.08.10 15:18 수정 2025.08.10 15:21

이제는 편안하신가요

명절이면 친정으로 아버지를 뵈러 갔습니다. 그런데 이번 추석에는 친정이 아니라, 선산공원묘지로 향했습니다. 달리는 차장 너머로 아버지의 얼굴이 어른거립니다. 언뜻언뜻 어머니 생전의 고운 모습도 스쳐 지나갑니다. 하늘나라에 두 분이 함께 계시니 적적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아버지께서는 코로나 백신 화이자 2차를 맞고 이튿날 쓰러지셨습니다. 방안에서 버둥거리고 계시는 아버지를 오빠가 발견하고 119구급차를 불러 병원에 도착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쓰러지셨다는 연락을 받고 무슨 정신으로 달려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운전하는 남편 옆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습니다. 퇴근길이라 차는 왜 그리도 밀리는지, 마음은 과속해서 벌써 아버지께 가 있었습니다.

중환자실에 모셔진 아버지를 바로 뵐 수가 없었습니다. 면회시간은 왜 이렇게 더디게 다가오는지, 중환자실 앞에서 예닐곱 계집애가 되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답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지만, 중환자실에는 면회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는 절차도 복잡했습니다. 신발도 갈아 신고 가운도 걸치고, 소독은 물론이고 온도 체크에 명부까지 작성해야 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라도 아버지를 빨리 뵈어야겠다는 생각뿐, 이런 절차가 성가셔서 애가 탔습니다. 오만가지 생각으로 뒤숭숭한 마음을 가다듬고 아버지 병상에 다가갔습니다.

양팔이 침대 난간에 묶인 채로 맥없이 누워 계시는 아버지 앞에 섰습니다. 평소 강건하신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 곁에 바투 다가가 손을 잡아도, 얼굴을 만져도, 말을 건네도 아무런 반응 없이 눈만 동그랗게 뜨시고 여기저기 살피고 계셨습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하염없이 흐르고 가슴이 아렸습니다. 평소 같으면 막내딸을 환한 얼굴로 반겨주시던 분께서 아무리 “아버지!”라고 불러도 대답조차 못하셨습니다. 눈을 뜨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릴 뿐, 사람을 알아보는 눈빛이 아니었습니다.

코로나19 백신의 부작용은 멀쩡한 아버지를 환자로, 중환자로 만들어놨습니다. 뇌출혈에다가 언어장애까지, 거기에다 폐렴까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알아볼 수도 없고,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른쪽 전신이 마비되셔서 소변줄에 기저귀까지 차고, 링거줄만 생명줄처럼 매달려 있었습니다. 입으로 물 한 모금, 밥 한 톨도 넘기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버텨내셔야 했습니다.

담당의사는 아버지가 워낙 고령이라서 호전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병세가 제자리걸음인데 갑자기 나빠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의사는 항상 보호자들은 대기하라는 말과 더불어 연명치료에 대해서 가족들 사인을 받아오라고 했습니다. 다섯 남매는 연명치료에 대해서 누가 먼저 말을 떼기가 힘들었습니다. 침통한 표정으로 있던 장남인 오빠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습니다.
“아버지, 더 힘들게 해드리지 말자.”
말끝을 흐리며 오빠는 더는 말을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나머지 가족들도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아버지께 가장 큰 불효를 하는 것 같아 모두가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백신 부작용 신고를 하려면 의사의 진단이 나와야 했습니다. 의사는 백신을 맞기 전부터 진행된 사항이라는 엉뚱한 말을 했습니다. 아무리 고령이라도 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하루 만에 그 많은 병에 걸린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보호자의 항의 끝에 의사는 질병관리본부에 코로나19 백신 부작용에 관한 서류를 접수해주었습니다. 자식들은 백신 부작용으로 인해 생사를 넘나들고 계신 아버지의 억울함을 어디에라도 호소하고 싶었습니다. 질병관리본부에 코로나 부작용의 사례로 신고했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다가 황당한 요구를 해왔습니다. 아버지 사망 후에 백신 부작용인가를 확인하려면 부검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자식들 관점에서 부모를 두 번 죽이는 일을 해야만 할까요.

중환자실 면회는 아침저녁으로 정해진 시간이 있는데, 보호자 한 명밖에 면회가 되지 않았습니다. 생전 아버지를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은 자식들 마음을 읽은 간호사는 눈을 감아주기도 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거칫해진 아버지는 가죽과 뼈만 남았습니다. 주사를 맞은 자리에 피멍이 들고, 욕창이 생기고, 다리는 굳어가서 똑바로 펴고 눕지도 못했습니다. 아무리 주물러드리고 펴려고 해도 뇌의 운동신경 쪽까지 이상이 생겨서 도저히 다리를 펼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병원에 다녀오는 날은 울가망하여 멍하게 허공만 바라봤습니다.

아흔이 넘도록 자전거를 타고 밭일하러 다니신 아버지께서 이제는 눈조차도 제대로 못 뜨십니다. 임종을 준비하라는 의사의 말에 아버지께서 살 수 있다는 실오라기 같은 희망조차 앗아갔습니다. 입원하신 지 50일 되는 날이었습니다. 오전에 아버지 면회를 다녀오고 착잡한 기운에 싸여 넋 놓고 있었습니다. 전화 소리에 화들짝 놀랐습니다. 몇 시간 남지 않았다고 병원에서 빨리 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가족들 모두 중환자실 아버지 병상에 둘러섰습니다. 아버지의 호흡이 빨랐다가 늦었다가 잠시 멎기를 반복했습니다. 이생의 끈을 놓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자식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서서히 눈을 감으셨습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신 지 50일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부검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장례식을 치르고 몇 달이 지났건만, 아직도 질병관리본부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고 바위가 깨질까요. 나라에서 하는 일에 일개 범인인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전 세계적인 팬데믹 상황에 내린 조치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단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다보니 어느새 산소에 도착했습니다. 상석 위에 가져온 음식을 차리고, 아버지 어머니께 절을 올렸습니다. 더는 아프지 말고 편안한 세상에서 두 분 행복하게 사시라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산소의 잔디가 깔끔하게 정리된 것을 보니 명절 즈음에 이발하고 오신 아버지의 머리처럼 보입니다. 늘 정갈하게 몸단장을 하셨던 아버지, 어머니를 더는 뵐 수 없다고 생각하니 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그래도 나란히 두 분이 함께 누우신 봉분을 보니까 한결 마음이 편안합니다.
“아버지, 엄마 곁에 계시니 편안하세요?”

어디서 나타났는지 고추잠자리 두 마리가 산소 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습니다. 마치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식들을 보러 온 것 같습니다.


⇁⇁⇁⇁이복희 작가(시인 수필가)⇁⇁⇁⇁


 

경북 김천 출신이다. 2010년 ‘문학시대’에 수필, 2022년 계간‘시’에 시가 당선되면서 한국 문단에 명함 (수필가·시인)을 내밀었다.
시집으로 ‘오래된 거미집’, 수필집으로 ‘내성천에서는 은어도 별이 된다’를 출간했다.
릴리시즘의 정수를 잘 보여준다는 평을 얻는 작가로 경북 구미와 경기 동탄을 오르내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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