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기획 칼럼 전문매체 k문화타임즈 =발행인(시인 소설가) 김경홍]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것 기억해 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라는 걸/(서른, 잔치는 끝났다 中에서) ”
30대의 청춘을 마감하고 40대의 문턱을 넘어서야 하는 ‘고달픈 인생사’를 함축하고 있는 시. 얼핏 릴리시즘(서정주의)적이면서 한편으론 참여주의적 냄새를 솔솔 피워올리는 최영미 시인의 노을녘같기도 한 시이다.
대선을 불과 4~5일 앞둔 5월 말, 울담에 내걸린 벽보가 산간의 바람결에 달랑대는 도로변을 가는 이 늦은 봄날, 문득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시구가 가슴 깊이 밀물지는 이유는 뭘까.
며칠 후면 누군가는, 000을 연호하며 목소리를 돋우던 그 누군가는 저물어가는 노을 속으로 저 홀로 외롭게 걸어 들어갈지도, 저 홀로 무릎 속에 깊은 눈물을 지그시 억누르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한편의 시를 써 이렇게 내릴는지도 모를 일이다.
“선거는 끝났다/ 해 저물고, 연호하던 이들은 하나둘 자리를 털고 갔지만/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 갔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유세장에 홀로 남아 / 후보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것을 기억해 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늘 그래왔다. 5년에 한 번, 혹은 안타깝게도 3년에 한 번 치루는 대선, 승자와 그 측근 그룹은 선거가 끝나면 마지막 인사를 가볍게 남긴 채, 그를 따르고 응원하던 국민을 뒤로한 채 그들의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하여 저희만의 세계 안에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상대의 목에 번득이는 칼날을 들이댔다.
그랬으므로, 승자와 측근들이 혈투의 목장에서 싸움질을 하는 동안 벼랑 끝에 내몰린 민생은 “승자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것을 기억해 내며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지 않은가”
사마천의 사기는 군자보구 십년불만 (君子報仇 十年不晩)이라는 속담을 담고 있다.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지나도 늦지 않는다는 의미다. 하지만 사기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공격적이다. 완벽한 복수를 위해서는 오랜 세월이 지나가도 개의치 않는다는 의미로 복수를 하려면 제대로 하라는, 바람직하지 못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군자보구 십년불만 (君子報仇 十年不晩)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해 낸 이는 노자와 공자이다.
노자는 “원수를 덕으로 갚아라”고 했고, 공자도 “올곧음으로 원수를 갚아라”고 가르치고 있다. 복수보다는 용서를 택해야 한다는 말이다. 복수란 또 다른 복수를 낳는 비극임을 체득했기 때문이리라.
대선의 승자는 사마천의 사기보다 노자와 공자가 가르치는 길을 가야 한다. 복수의 칼날을 갈 시간에 민생을 돌아보아야 한다. 양손에 복수의 칼을 쥘 게 아니라 민생과 통합의 촛불을 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만 “유세장에 홀로 남아 / 후보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것을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는” 국민과 함께 삶의 비탈길을 오를 수 있는 일이 아니던가.
그래야만 임기 내내 정적의 멱살을 부여잡고, 바른 말을 하는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던 시대, 민생을 외면하고 앉아 호의호식하던 그들만의 시대를 청산할 수 있잖은가.
그래야만 축 처진 출근길의 어깨를 다독이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장바구니에 햇살을 담아낼 수 있잖은가.
이 환장할 봄날, 저 홀로 방안에 갇혀 눈물을 길게 쏟아내는 젊은이들에게 손수건을 내밀고, 동구밖에 노을을 마주하고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노인들을 품어안을 수 있잖은가.
굳게 닫힌 상가가 문을 열고, 먹장구름에 갇힌 공장 굴뚝이 연기를 뿜어낼 수 있잖은가.
그래야만 한다. 승자는 패자의 아픔까지도 담아내는 큰 그릇. 어떤 강물도 거역하지 않는 해불양수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