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기형도의 안개 中에서>”
[분석 기획 칼럼 전문매체 k문화타임즈/ 발행인(시인 소설가)김경홍] 얼음판 위를 걸어가듯 아슬아슬 딛고 살아가는 구미는 멀고도 가까운 관계다. 마치 일 년에 한두 번 대면하는 그립고도 어색한 형제처럼.
1994년 겨울에는 유난히도 많은 눈이 내렸다. 서울에서 구미로 이주하던 그해 1월 새벽이 열리자, 공단 굴뚝은 희고 검붉은 연기를 쏘아 올렸다. 그것들이 머리를 풀어 헤치며 지상에 불시착하자, 도시는 온통 자욱했다. 마치 거대한 안개의 강처럼.
그로부터 30년 세월 동안 인식한 구미는 안개의 도시였다. 첫날부터 그랬던 것들은 그 이후에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들이 뇌리 안에서 난리법석을 떨 때마다 걸어 다니는 거리는, 만나는 관계는 마치 안개 속 같았다. 명쾌하지가 않았다.
한때 혹은 지금도(?) 보수의 중심지라고도 일컫는 구미는, 모질게 불어닥친 탄핵바람이 정치 지형을 지우고 또 그려낼 때면 더욱 그랬다. 기회주의자처럼 이왕이면 입을 다물어야 한다고 곱씹었을 만큼 구미에서의 삶의 조건은 혼란과 친숙해지는 것이었고, 침묵의 습관화였다.
2012년부터는 더욱 그랬다. 구미 출신 박정희 대통령의 딸, 박근혜와 문재인이 맞붙은 대선 정국이 전개되자, 많은 구미시민은 박근혜 후보를 구미의 딸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열화熱化는 박근혜 후보를 당선시킨 원군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가 열리자, 많은 시민은 친박이라는 명찰을 달았다. 그랬으므로 2016년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가결과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에 이은 구속 수감은 친박 명찰을 매단 많은 시민을 울렸다.
안개의 도시 구미, 그들은 쓸쓸한 낙엽처럼 길고 긴... 어둠 깊고 고독 깊은 방죽에 앉아 45년을 구형하고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게 한 윤석열 국정농단 특검팀 수사팀장과 권성동 박근혜 탄핵소추단장을 증오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2024년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이 발단이 된 탄핵바람이 불어닥치자, 그들은 또 마치 엊그제의 일처럼 박근혜 전 대통령을 안쓰럽게 추억했다.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과 최순실의 국정농단...돌아보면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당할 일도 아니었어.”
안타까움을 쏟아내는 많은 구미시민은 쓸쓸한 낙엽처럼 다시 어둠 깊은 방죽에 오래오래 걸터앉아 타들어 가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2025년 1월 26일 검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본부 박세현 본부장(고검장)은 윤석열 대통령을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기소 했다. 또한 윤석열 검찰총장 시절 감찰을 주도하며 내부 갈등을 일으킨 게 발단이 돼 검찰을 떠나야 했던 조국혁신당 박은정 의원은 1월 23일에도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란 수괴’ 혐의 윤석열 대통령이 깔끔한 머리 모양으로 헌법재판소에 출석한 데 대해 “안전상 문제도 아니고 내란 수괴의 머리 손질을 우리 국민들께서 어떻게 바라봐야 하느냐”며, 불만을 표시하는 등 저격수로서의 공격을 이어갔다.
이들의 존재를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박세현 본부장은 봉곡동에서 태어나 선주초등학교를 졸업한 박순용 전 검찰총장의 아들이며, 윤석열 대통령의 대표적 저격수인 박은정 의원은 도량동이 고향이다.
박근혜-윤석열-박세현-박은정...이들을 추억하거나 바라보는 많은 구미시민의 심정이 궁금하다. 그래서 문득 기형도의 시 ‘안개’를 다시 읽고 싶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역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