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기획 컬럼 전문매체 k문화타임즈=김경홍 기자] 고아읍 하면 흔히들 고아孤兒를 연상한다. 술 좌석에서 종종 “고아읍에 산다고 하면 부모 없는 자식이냐”는 농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구미시 고아읍高牙邑에서 태어났거나 거주한다는 게 자랑스럽고, 고아읍이 고향인 이들에겐 자존감을 불어넣을 만도 하다.
사전적 의미의 고아高牙는 “높은 곳에 깃발을 꽂은 아성”이며, 더 깊이 들어가면 고려가 후삼국 통일을 앞두고 마지막 결전을 치를 당시 왕건이 주둔하던 내성이다. 고려高麗의 고高에다 아성牙城의 아牙를 병합한 이름이 바로 고아高牙이며, 지금의 고아읍이다.
따라서 후삼국 통일의 아성인 고아읍은 역사적으로 매우 소중한 의미가 부여되는 현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시민은 손에 꼽을 정도다. 소중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보물이 방치될 수밖에 없던 이유다.
문화시장, 경제시장, 교육시장을 외쳐댄 역대 민선 구미시장들의 ‘실체 없는 메아리’가 얄밉기만 하다. 그래서 구미를 먹여 살릴 곳간으로 문화관광산업에 방점을 찍은 민선 8기 구미시에 ‘후삼국통일의 현장에 부가가치의 옷을 입혀달라’는 시민적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
⇁구미시청 전직 공무원·문화예술 단체 관계자 의견 수렴
K문화타임즈는 구미시 전직 공무원과 문화예술단체 관계자를 대상으로 고아읍의 유래와 왕건이 상주를 고향으로 둔 견훤을 물리친 후삼국을 통일한 현장이 고아·지산·신평 앞들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고, 소중한 역사적 자산을 문화관광산업의 소재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여론 수렴 결과 대다수는 문화유산의 스토리텔링화를 업그레이드해 영상물을 제작, 설치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후삼국 통일과 관련한 고아·지산·신평 앞들의 역사적 유래를 2~3분가량의 영상물을 대형 TV 크기로 10개 정도 제작해 지산샛강 연꽃 군락지와 맨발걷기 구간 곳곳에 설치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이었다.
찾는 이들에게 역사적 향기를 불어넣고 동시에 학생들에게는 소중한 교육의 현장으로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고 본 이들은 또 지산샛강축제 기간에는 후삼국통일의 역사성을 함축한 연극 공연을 선보이는 것도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후삼국통일문화축제로 나가자고도 했다.
⇁전투 과정
↑↑ 후삼국 지도
[사진 출처=네이버 블로그]
918년 궁예를 권좌에서 쫓아내고 권력을 쥔 왕건은 927년, 견훤과의 팔공산 동오수 전투 (桐藪 동수전쟁)에서 대패한 후 선산지역으로 후퇴했다. 그로부터 전열을 가다듬은 시기는 8년 후인 935년이었다. 왕건은 일선군 냉산(태조산)에 숭신산성(崇信山城)을 쌓고, 낙산동 일대에 군창( 軍倉)을 일곱 개나 지어 군량을 비축하는 등 장기전을 마무리했다. 낙산동 일대를 칠창리(七倉里)라고 불렀던 이유다.
팔공산에서 퇴각한 후 전열을 가다듬은 왕건은 935년 선산읍 생곡리 앞(지금의 일선교 근처) 속칭 어성정(禦城亭) 즉 태조방천으로 불리는 낙동강 연안에서 견훤과 후삼국 통일을 위한 싸움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결국 935년 선산 전투에서 왕건은 8년 전 분루를 삼켜야 했던 팔공산 동오수 전투의 악몽을 말끔히 씻어낼 수 있었다. 선산에서 대승을 거둔 왕건은 이듬해인 936년 여세를 몰아 견훤의 아들 신검과 고아읍 관심리 앞들에서 제1차 결전에 들어갔다. 당시 왕건이 신검을 막기 위해 주둔한 관심(官心) 평야는 어검(禦劒) 평야, 지금은 어갱이들이라고 불리고 있다. 아울러 괴평리 앞뜰에 진을 쳤던 신검의 진지를 왕건이 점령한 후부터 이곳은 점검(占劒)평야 즉 점갱이들이라고 불렸다.
936년 어검들 전투에서 패배한 신검은 지산동 앞들과 사기점(신평2동)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미리 도착해 진을 치고 있던 왕건은 신검을 사로잡고 목을 치면서 후삼국 통일을 완성했다. 그곳이 바로 지산 샛강과 강을 둘러싸고 있는 지산들(발갱이 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