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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대통령. [사진 출처= 생가 보존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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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기획 칼럼 전문매체 k문화타임즈= 김경홍 기자] 5.16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윤보선 대통령은 이어 실시된 5대, 6대 대선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대결을 벌였으나 번번이 패했다. 그러나 그는 1979년 신민당 총재 상임고문, 1970년 국민당 총재 등을 거치면서 정치권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한국 정치사의 고질병인 계파 간 정쟁이 낳은 희생양의 표본이기도 했다.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민주당의 신구파 간 갈등 속에서 속앓이를 해야 했고, 결국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이 주축이 된 군부에 의해 하야하는 운명을 맞았다.
구미 출신 박정희 대통령이 44세의 나이로 한국 정치사에 최초로 명함을 내민 것은 1961년 6월 국가최고재건회의 의장으로서였다. 이어 대통령의 직에 오른 것은 2년 후인 1963년 10월 15일 제5대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면서였다.
그해 치러진 선거는 7대1의 치열한 경쟁률을 보였다. 육군참모총장 출신의 신흥당 장이석(60세), 국방장관 출신의 자유민주당 송요찬(45세), 국가최고재건회의 의장 출신의 민주공화당 박정희(46세), 건설신문사 사장 출신의 추풍회 오재영(44세), 대통령 출신의 윤보선(66세), 국무총리 서리 출신의 국민의당 허정(67세), 국무총리 출신의 정민회 변영태(70세) 등 기라성 같은 후보들이 나선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윤보선 후보가 득표한 454만 표보다 16만 표가 많은 470만 표를 득표하면서 진땀을 흘린 끝에 당선됐다.
당시 영남권 선거에서 지역갈등 양상은 드러나지 않았다. 경북도(대구 포함) 165만 표 중 박정희 후보가 83만 7천 표를 얻었지만 윤보선 후보의 득표력도 54만 3천 표였다.
하지만 당시 선산군(지금의 구미시)은 총투표자 4만 8천 표 중 72.6%인 3만 4882표가 박정희 후보를 택했다. 반면 윤보선 후보는 7천 319표를 획득하는 데 그쳤다.
이처럼 1963년 비롯된 선산(구미)의 보수화는 윤보선과 재격돌한 6대 선거와 호남 출신의 김대중 후보와 격돌한 제7대 대선을 거치면서 급속하게 확산됐다.
1967년 5월 3일 직선제로 실시된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은 윤보선 전 대통령과 재격돌했다. 하지만 표차는 5대에 비해 상당히 벌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선거 결과 전체 투표자 1천164만 표 중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568만 표를 득표해 452만 표를 얻은 신민당 윤보선 후보를 1백1십여만 표 차로 눌렀으니 말이다. 5대 선거에서의 16만 표차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들 정도였다.
6대 대선에서는 여타 후보들이 나섰으나 정의당 이세진 9만 표, 한국 독립당 전진한 23만 표, 민중당 김준연 24만 표, 통한당 오재영은 26만 표를 얻는 데 그쳤다.
6대 대선부터는 박정희 대통령의 경북 득표율이 돋보이기 시작했고, 구미의 득표율은 80%에 육박했다. 당시 경북(대구 포함) 지역에서는 총투표자 178만 표 중 박정희 후보가 1백만 8만 표를 얻으면서 60%대의 득표율을 보였다. 반면 윤보선 후보는 44만7천 표로 24%를 얻는 데 그쳤다.
선산군(지금의 구미시)은 총 4만9천 명의 투표자 중 박정희 후보에게 3만 9천 표를 몰아주었다. 80%대에 근접한 79%의 득표율이었다. 반면 차점자인 윤보선은 4천6백 표로 9%의 득표를 하는 데 쳤다.
이목을 집중시킨 박정희 후보 vs 40대 기수론의 김대중 후보1971년 4월 27일 실시된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50대 말의 박정희 대통령은 40대 기수론을 들고 출사표를 던진 전남 목포 출신의 김대중 후보와 격돌했다. 하지만 대선 사상 최초의 동서 대결이었으나, 두 후보는 적진에서도 나름의 득표력을 보이면서 동서 간 갈등은 눈에 띄지 않았다.
민주공화당 박정희, 신민당 김대중, 국민당 박기출, 자민당 이종윤, 정의당 진복기 후보가 나선 7대 선거 결과 전체 투표자 1천2백41만 표 중 박정희 후보는 634만 표, 김대중 후보는 539만 표를 얻었다. 40대의 김대중 후보가 90여만 표차로 따라붙자, 박정희 정권으로선 충격이었다.
경북지역(대구 포함)에서는 총투표자 183만 표 중 박정희 후보가 133만 표를 얻었으며, 김대중 후보 역시 41만 표를 얻으면서 득표력을 과시했다. 또 전남에서는 149만 표 중 김대중 후보가 87만 4천 표를 얻었고, 박정희 후보 역시 47만 9천 표를 얻으면서 득표력을 과시했다.
특히 김대중 후보의 고향인 목포에서도 김대중 후보 3만 8,780표, 박정희 후보 역시 1만 889표를 득표해 동서 간 갈등이 1980년대처럼 표면화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선산군(지금의 구미시)은 90%에 가까운 민심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쏠렸다. 총투표자 4만 6,650표 중 박정희 후보는 87.4%인 3만 8,780표를 득표하면서 3천832표, 8.2%에 그친 김대중 후보를 멀찌감치 따돌렸다.
그러나 김대중 후보와의 경쟁에서 승리했으나, 서울에서는 39.95%에 그치면서 59.39%를 얻은 김대중 후보에게 패하는 결과와 직면했다. 박정희 후보로선 충격이었다.
수도권에서의 패배는 박정희 정권에게 극심한 불안감을 안겼고, 그 불안감은 이듬해인 1972년, 유신체제로 들어서는 계기로 작용했다.
유신체제가 들어서면서 1972년 12월 23일의 제8대, 1978년 7월 6일의 제9대, 1979년 12월 6일의 제10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간접선거 방식으로 대통령을 선출했다.
제8대, 9대 대통령에 당선된 박 대통령은 1979년 10월 26일 동향의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유명을 달리했다. 이어진 제10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비운의 최규하 대통령이 당선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