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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박상희... 박정희의 형·김종필의 장인이기에 앞서 `선산 민족주의 운동의 중심인물`

김경홍 기자 siin0122@hanmail.net 기자 입력 2024.09.05 07:57 수정 2024.09.05 08:05

박상희 선생을 관심 밖으로 밀어낸 세파, 우리 모두에게 책임
1905년 9월 10일 출생, 1946년 사망(향년 41세), 어느덧 78년 세월
한때 그가 지낸 곳은 구미시 선주원남동 각산

[분석 기획 칼럼 전문매체 K문화타임즈=김경홍 기자] 민족주의 운동의 중심인물이기에 앞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형이자, 김종필 전 총리의 장인으로 더 잘 알려진 박상희 선생, 오는 9월 10일이면 출생 119년을 맞는다.
한때 구미시 선주원남동 각산에서 5명의 자녀와 함께 보릿고개를 넘으면서 선산지역 민족주의 운동에 앞장섰던 박 선생이 잠시 구미 시민들 사이에서 회자된 것은 2015년 2월이었다.

 
↑↑ 박상희 선생
[사진출처=나무위키]

그해 2월 23일 남유진 전 구미시장이 페이스북에 “2월 21일 영면에 드신 김종필 전 총리의 부인 박영옥 여사님의 빈소를 오후 7시경 조문했습니다. 박 여사님은 박상희 선생의 큰딸이셨습니다.”는 내용의 글을 올린 게 계기가 됐다. 선산지역(현 통합 구미시)민족주의 운동을 주도한 핵 심인물이기에 앞서 김종필 전 총리의 장인으로 더 잘 알려진 이상한 역사, 안타까운 사연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그녀의 영면은 잠시 구미 시민들이 박상희 선생을 떠올리게 하는 계기가 됐다. 원남동 속칭 각산에 살았던 박 여사는 고독한 젊은 시절을 보내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29년생이었던 박 여사가 아버지 박상희 선생과 이별했던 것은 1946년, 그의 나이 17세였고, 남동생 박준홍 전 대한축구협회장이 탄생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개월 후인 1947년 1월이었다. 5명의 동생을 둔 큰딸로서 어깨가 무겁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윈 박 여사는 그러나 사방팔방에서 불어오는 모진 세파를 딛고 해방 직전인 1944년 구미초등학교(24회)를 마쳤다. 이후 그녀는 숙명여대 국문학과 졸업과 동시에 모교인 구미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50년 김종필 전 총리를 처음 만났다.
중매를 선 이는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6.25 전쟁 직전인 1950년, 국수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당시 박정희 소령은 관사에서 김종필 당시 중위와 국수를 먹다가 그곳을 찾은 박영옥 여사와 처음 만나게 됐다. 그로부터 얼마 후 6.25 전쟁이 터지자, 김 전 총리가 말라리아를 앓던 박 여사에게 의사를 소개해 주는 등 완쾌하는 데 도움을 줬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박 여사가 바스켓과 빵으로 미국 야전식을 제공하면서 첫사랑의 인연이 시작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당시 박 대통령은 “박영옥을 데리고 갈 생각이 없나. 지내보긴 뭘 지내봐,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라며 결혼을 권유했고, 1년 후인 1951년 대구의 한 교회에서 백 년의 동행을 가약했다.

■박상희 선생은 구미가 낳은 독립운동가
구미 현대 정치는 보수 성향의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출발한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선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한 킹 메이커 김윤환 전 의원은 이후 박 대통령의 도움을 받아 본격적인 정계 활동의 물길 속으로 뛰어들었고, 1979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정회 의원이라는 월척을 건져 올리면서 현대정치사에 이름을 올렸다.

초대 중앙정보부장과 9선 국회의원(6~10대, 13~16대), 두 차례 국무총리,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과 '3김(金) 시대'의 한 축을 이룬 김종필 전 총리 역시 박정희 대통령과 깊은 인연이 있다. 박 대통령의 조카인 고 박영옥 여사가 김 전 총리의 부인이라는 점, 그의 부인인 박 여사가 구미 근현대 진보 정치의 한 획을 그은 독립운동가 출신의 박상희 선생의 큰딸이었다는 점은 관심 사항이 아닐 수 없다.

박정희 대통령의 형인 박상희 선생의 발자취는 좌우 이념의 대립 역사 속에서 때로는 박정희 대통령의 어깨를 무겁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상희 선생이 남긴 족적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될 대목이다.

2010년 7월 15일 오전 11시, 박상희 선생 추모식 제막식에서 당시 박준홍 유가족 대표는 하염없이 눈시울을 붉혔다.
“63년 전 돌아가신 아버님은 동분서주하시면서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수많은 옥고를 치르셨고, 돌아가시던 1946년 10월 5일에도 시위대에 둘러싸인 경찰관이 위태롭다는 전언을 듣고 경찰관을 구하러 가셨다가 변을 당하셨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아버님은 좌익이니, 우익이니, 공산 활동을 했느니 하는 부당한 평가에 시달리며 지금까지 지내왔다. 별세하신 지 60년이 지나도록 묘비 하나 없이 싸늘한 땅에 누워계셨다.”

당시 박 대표는 이어 “18년 전인 지난 1992년 11월 19일, 이곳으로 이장할 때도 비석을 세울 것을 신중하게 고려했으나, 가족들이 간단하게 세우는 그런 비석은 6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더욱 초라할 뿐이라는 생각 때문에 나날을 보내왔다”고 술회하면서 “몇몇 분들이 아버님의 공적을 인정하고, 국가에 서훈을 제청할 움직임과 함께 뜻있는 시민들의 모금을 해서라도 비석 하나 없이 쓸쓸하게 묻힌 아버님의 추모비를 세워야 한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비로소 추모비 제막식을 하게 됐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박상희 선생을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1905년 8월 약목면에서 태어나 1914년 상모동으로 이사 온 후 구미에서 독립운동을 한 박 선생은 특히 20대 초반, 선산 청년 동맹을 결성, 선산지역의 청년운동을 주도하는 등 민족주의 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특히 항일 좌우 합작 신간회 선산지회 결성과 또 다른 독립운동을 한 이유로 수차례 옥고를 치룬 선생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지국장 등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도 박 선생은 민족주의 민족전선 선산군 지부를 결성, 분단 없는 민족국가 건설에 매진했는가 하면, 미군정의 강재 공출로 국민들이 굶주림에 항거하면서 대구에서 시작된 1946년 10월의 민중항쟁이 구미로 확산되는 과정에서도 경찰을 보호하고 평화 협상 노선을 견지했다.

2010년 7월 15일 추모비 제막식에서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1946년 10월 5일, 경찰과 주민 간의 중재를 마치고 귀가 중 경찰의 오인 총격으로 향년 마흔둘에 세상을 떠났다”면서 “흔히 선생을 좌익 독립운동가로 오인하지만, 선생은 1931년 개량주의 사회 운동인 구미소비조합 이사로 활동하셨고, 부인인 조귀분 여사도 여성단체인 근우회 김천지회장 경 중앙 부회장으로서 야학 학교 교사를 하셨다”고 설명했다.

또 “호방한 성품의 선생은 특정한 노선이나 특정 단체에 편향됨이 없이 폭넓게 활동했다는 점에서 이론 편향적이 아니었던 분으로 평가된다”면서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았느냐는 조봉암 선생의 묘비명에 쓰인 것처럼 선생의 일념 또한 이러한 민족 독립에 있다고 본다”고 평했다.

이들의 평처럼 박정희 대통령의 형이면서 김종필 전 총리의 장인인 박상희 선생은 이처럼 민주주의와 지역 사랑의 외길 인생, 독립운동가로서 재조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 2010년 7월 15일 오전 11시, 박상희 선생 추모식 제막식에서 당시 박준홍 유가족 대표는 하염없이 눈시울을 붉혔다. [사진 = 김경홍 기자]

▶아들 박준홍 전 대한축구협회장
박상희 선생의 유일한 아들이면서 박영옥 여사의 동생인 박준홍 전 대한축구협회장은 구미 지역 정치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1996년 실시한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는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당시 상대는 사촌 형인 다섯 살 위의 박재홍 전 의원이었다. 그러나 당시 선거에서 박 전 회장은 42%의 득표율에 머물며 2위로 낙선해야 했다.

이어 제1회 지방선거 경북지사 선거에 자민련 후보로 출마했으나 3위인 27.7%로 낙선했으며, 2004년 제17대 구미 총선에도 자민련 후보로 출마했으나 12.4%를 획득하며 4위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2010년 구미 지방선거를 앞두고 미래희망연대와 함께 친박연합을 창당한 박 전 회장은 구미에서 4명의 시의원을 당선시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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