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치에 혼자 앉아 있는 박카스 한 병
가까이 가보니 속을 비웠구나
웬만한 바람에도 흔들림이 없다
지친 누군가에게 힘이 되었을
용각산, 안티푸라민, 노루모산에 이어
할머니 만병통치약 반열에 오른 묘약
탑골 공원 노인들에게도 힘이 되었을 박카스
초등학교 운동회 날,
할머니 허리춤에 감춘 노란 색깔 그것
남들 보기 전에 몰래 손녀딸 입으로 들이밀던
벡 미터 달리기 일등으로 꼴인 시킨 박카스 한 병
병문안 다녀간 뒤
알게 모르게 혈색 돌게 한 노란 오줌물 같은
집 안 뜰 어딘가 굴러다닐 빈 박카스 병
아버지 들이켜고 난 병을 단물처럼 쪽쪽 빨아내던
시큼해서 살갗 오스스 돋아나게 한
카페인 한계치를 알려준 바쿠스*
그 한병의 내공이
내 앞에 신神처럼 앉아 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술의 신
시인 이복희 →→→
↑↑ 이복희 시인
[사진 제공 =작가]
경북 김천 출신으로 구미에 터를 잡았다. 2010년 ‘문학시대’에 수필, 2022년 계간‘시’에 시가 당선되면서 한국 문단에 명함 (수필가·시인)을 내밀었다.
‘오래된 거미집’은 이복희 시인의 첫 시집이다.
릴리시즘의 정수를 잘 보여준다는 평을 얻는 시인의 작품‘ 오래된 거미집’을 연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