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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새벽칼럼] 육영수 여사는 늘 ‘약자의 편’이었다.. .나환자의 뭉그러진 손 부여잡던 사랑

김미자 기자 cloverail@hanmail.net 기자 입력 2024.08.12 15:55 수정 2024.08.15 08:57

202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50주기
나환자의 둥지, 소록도를 안방 드나들 듯... 대통령 부인의 참모습 보여 준 삶

[[분석·기획·칼럼 전문 매체/ k문화타임즈 = 발행인 김경홍]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낯선 친구를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중략)/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가도 가도 천 리 먼 전라도길(후략)
(나환자 한하운 시인의 전라도길)

 

↑↑ 육영수 여사
[사진 캡처 =블로그 내일도 맑음]

한하운 시인의 시, ‘전라도길’의 배경은 ‘자고 나면 발가락이 하나씩 잘려 나가는’ 곳, 애환의 나환자가 모여 사는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도이다. 그곳에서 한 맺힌 삶을 살다 간 나환자들은 늘 육영수 여사를 그리워했다.
왜 그들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수평선’ 넘어 육 여사를 애달프게 부르곤 했을까.

소록도와 전북 익산군 상지촌을 비롯한 전국 77개의 나환자촌은 정부가 나병(문둥병)을 검역할 목적으로 환자들을 격리해 살게 한 곳이다. 당시만 해도 일반인들이 이들과 접촉하는 것은 불문율이었다. 나병이 전염병의 일종으로 분류되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육 여사는 가장 천대받던 나환자 촌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특히 전북 익산군 상지와 소록도 나환자촌을 찾아 뭉그러진 손을 덥석 어루만지며 함박웃음을 짓던 육영수 여사. 그 지고지순한 사랑이 나환자들을 울린 일화는 유명하다.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거 때마다 진보 성향이 강한 호남 특유의 투표 성향과는 달리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는 유달리 보수 후보에게 더 많은 표를 몰아주곤 했다.

흐르고 흘러도 돌아보면 그날의 족적은 엊그제만 같다. 유명을 달리한 세월이 어느덧 50년이다. 그래서 끈끈한 연을 맺은 구미시민들에게 육영수 여사는 밀물지는 그리움이다. 마치 자식을 타지로 떠나보내는 동구 밖 노모의 가슴처럼.
구미가 고향인 박정희 대통령에게 육영수 여사는 후견인(後見人)이기도 했고, 때로는 경제 재건의 현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박정희 대통령의 휘어진 어깨를 다독인 모정이기도 했다.

육 여사는 살아생전 그늘진 곳으로 걸어 들어가는 ‘낮은 곳으로부터의 사랑’이었다. 민주화 운동이 눈발처럼 흩날리던 시절, ‘박정희 정권에게 함성을 질러댄 젊은 청춘들도 육영수 여사 앞에선 침묵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육영수 여사를 떠나보낸 국민들이 이념을 뒤로 밀어둔 채 애절한 가슴을 발현(發現)케 한 발원지는 ’나환자 사랑‘이었다.
나환자가 병을 전염시키지 않는다는 과학적 근거가 빈약했던 1960년대 당시만 해도 그들은 일반인들의 기피 대상이었다. ‘나병 환자들이 우물을 오염시켜 자신들의 병을 퍼뜨린다거나 병을 고치기 위해 인명을 해치고 피를 흡혈한다’는 악성 루머가 만연했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금수저 출신이지만 흑수저와 함께 한 삶
육영수(1925년 11월 8일- 1974년 8월 15일) 여사의 친정은 충청북도 옥천군, 알아주던 지역유지 겸 전형적인 대지주 집안이었다. 아버지 육종관은 99칸의 대저택에서 수십 명의 하인을 거느리고 살았던 옥천의 2대 부호로 알려져 있다. 육 여사는 요즘으로 치면 금수저 출신인 셈이다. 하지만 그녀가 역사적인 평가의 논쟁으로부터 한결 자유로운 까닭은‘ 나환자의 뭉그러진 손을 어루만지는 사랑’으로 출발한 삶이 늘 ‘위로보다는 아래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사진 캡처 =블로그 내일도 맑음]

육 여사는 육영사업, 적십자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사회 활동도 적극적이어서 양지회 활동과 함께 각 시군에 여성회관을 건립하는 등 여성의 사회 참여를 선도하기도 했다. 여성의 사회참여 운동을 가시화시킨 선구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여성에 대한 관심은 각별했다. 아울러 자연보호 운동, 식생활 개선, 의류 혁신, 문화사업 지원, 자원봉사 활동, 적십자 활동, 양지 진료소의 개설, 불우이웃 돕기, 윤락여성의 자활 운동, 양로원, 고아원 위문, 전몰군경 미망인 자활 운동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통해 국민 의식 개혁에 앞장선 육 여사는 특히 희망의 등불이라는 농어촌 여성 계몽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도 각별했다. 청소년들을 위해 경로효친 사상을 불어넣었고, 어린이 대공원 조성, 1969년 4월 14일에는 육영재단 설립과 어린이 회관을 짓고,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 <꿈나무> < 보물섬> 등을 발간했다. 아울러 청소년들에게 직업교육을 시킬 목적으로 정수직업훈련소를 개설하기도 했다.
그랬던 여사가 1974년 8월 15일 광복 제29주년 기념식장에서 재일교포 문세광의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장례식이 있던 그해 8월 19일, 국민의 애도 속에서 육 여사는 우리 곁을 떠나 국립묘지에서 영면에 들었다.


↑↑ 어르신들을 자주 만나곤 했던 육영수 여사
[사진 캡처 =블로그 내일도 맑음]

1974년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세상을 떠나자, 1974년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유학을 떠난 박근혜 대통령은 급히 귀국했다. 이후 어머니가 사망한 1974년부터 아버지가 사망한 1979년 10월까지 박 대통령은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을 대신했다. 그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어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새마을운동의 일환인 새마음운동을 주도했고, 1982년 육영재단, 1994년 정수장학회 등을 물려받아 운영했다. 이후 박근혜 전 대통령은 1998년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 달성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세상과 결별한 지 20년 만의 일이다.

2008년 3월 27일 구미 순천향병원에 마련된 고 김재학 박정희 대통령 생가보존회 회장(피습을 당함)의 빈소에서 애도한 당시의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 물끄러미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구미의 한 시민은 이렇게 표현했다.
“구미의 딸이 저렇게 외롭기만 할까?’, 하지만 아직도 그 외로운 삶이 지속되고 있으니, 구미시민들로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74년 조총련계인 문세광에게 총탄을 맞아 유명을 달리한 육영수 여사, 1979년 10월 26일 비운을 맞은 박정희 전 대통령, 2017년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2017년부터 2022년까지 세상과 벽을 쌓은 철창 속에서 5년을 보낸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운의 세월.
2024년 8월 15일 50주기를 맞은 육영수 여사, ‘아래로부터의 삶’을 살다 간 육 여사의 생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밀물지는 까닭을 문형(文型)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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