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들은 차에서 내리는 민간인을 한 사람씩 물웅덩이 근처에 세워놓고 군인들은 1열 종대로 서서 명령에 따라 한 사람 한 사람씩 총살했고, 쓰러진 사람들을 물웅덩이로 떨어뜨렸다.
이것이 섯알오름 예비검속 민간인 학살이다.
→1947년 3월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장장 7년 반 동안에 3만 5,000여 명의 제주도민 학살, 이승만 정권은 친일 경찰과 군인을 앞세워 무기를 지원하고 제주 도민에게 총구를 겨누게 했다.
7년 반에 걸쳐 벌어진 대학살사, 거대한 죽음과 항쟁을 어찌 몇 편의 줄거리로 다 설명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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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라산. [출처= 한라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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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문화타임즈 = 발행인 김경홍·제주 4.3유족회 회원·김창수 기념사업회 추진위원장] 국민의 소중한 생명을 진보와 보수로 재단해선 안 됩니다. 대통령은 만인의 불행을 끌어안는 어머니의 품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제주 4.3 항쟁 76주기입니다.
다음은 제주 환경운동가이면서 k문화타임즈 송기남 논설위원이 6회에 걸쳐 본지에 연재한 ‘제주 4.3 항쟁사’ 중 주요 내용을 발췌해 실은 내용입니다.
독자와 네티즌 여러분, 과연 북한 정권 아래서 호의호식하다가 탈북한 국민의힘 태영호 의원의 망언처럼 제주 4.3 항쟁은 북한의 지령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그의 망언은 제주 도민의 가슴에 다시 한번 못질을 했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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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라산 [사진= 제주 김경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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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남 논설위원이 6회에 걸쳐 연재한 제주 4.3 항쟁사 중 주요 내용>미군정은 이승만을 내세워 북위 38℃ 선 이남에 친미정부를 세우는데 48년 5월 10일 총선거일로 결정했다. 제주에서는 북제주 지역 갑, 을 2개 선거구와 남제주 지역 1개 선거구를 포함한 3개 선거구에서 선거를 준비했다. 그 당시 전국적으로는 김구 선생을 비롯해 상해 임정에 요직을 지냈던 수많은 지도자가 남한 단독선거는 영원히 민족 분단을 가져오게 된다고 예측하며 반대했다.
이때 제주에서도 5.10 단선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확산해 나갔고, 도민 유권자들은 선거 보이콧으로 마을 사람들끼리 산으로 들로 나가 선거가 끝날 때까지 소풍놀이를 즐기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 결과 북제주군 갑, 을 2개 선거구는 투표 참여 미달로 선거무효가 되고 남제주군 선거구 1곳만 가까스로 선거를 치르게 된다. 이러한 결과는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미국의 위성국가를 거부한 것으로 간주한 미군정이 제주도민들을 더 강하게 탄압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무차별적인 양민 학살에 반대해 평화적으로 사태를 수습하려고 한 김익열 9연대장의 보직을 박탈한 미군정 딘 장군과 조병옥 경무부장, 최천 제주경찰 감찰청장, 그리고 맨스필드 군정장관 등은 회의를 통해 김익열 9연대장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다.
김익열 연대장이 5살 때 돌아가신 부친을 공산당으로 몰아 사상누명을 씌우려고 했으니,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김익열 연대장이 당시 나이로 27세였으니 5살에 부친이 사망했으면 1920년대 중반이던 일제시대 전반기가 아닌가? 이 내용은 김익열 장군 실록 유고집에 남겨진 내용이기도 하다.
유고집에는 미군정 측에서 두 번에 걸쳐 회유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나온다. 미군정 지배에 걸림돌이 되는 제주도민을 과감히 처단한다면 같은 민족을 죽였다는 비난을 피해서 미국으로 가서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자금과 집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5만 달러를 제시하고 넘어가지 않으니 두 번째는 10만 달러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지금으로부터 74년 전 10만 달러의 가치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김익열 장군은 이것을 꿋꿋이 거부했던 군인 중에 참 군인임을 오늘날 우리는 역사에 다시 한번 새김질해 봐야 할 것이다.
이후 미군정은 일본군 장교 출신 박진경을 불러다가 연대장을 맏긴다. 박진경은 일본군 장교로 태평양전쟁 결 7호작전 때 제주도에 주둔했던 친일파 군인이다. 그는 김익열 연대장의 후임으로 부임해 오자마자 미군정과 이승만의 뒷 배경을 믿는 발언을 서슴없이 한다. 자신의 부친이 친일 정치 인사들의 모임인 대정익찬회의 간부를 지냈다고 과시하면서 다닐 정도였다.
박진경은 대토벌 작전을 속전속결로 감행해 한 달도 채 안 되는 기간에 5천여 명의 주민들을 체포하고 사살한다. 그 공적을 미군정으로부터 인정받아 1948년 6월 1일 중령에서 대령으로 승진한다. 그가 대령에 승진한 기념으로 6월 17일 밤에 부대원들과 연회를 베풀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인 공으로 영광의 계급장을 받고 술에 곯아 잠이 든다. 그의 무자비한 사람 사냥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부하들이 거사를 하게 된다. 6월 18일 새벽 시간, 그를 보내는 총소리가 탕! 탕! 탕! 울린다. 민간인 살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거사에 나선 참군인들 명단은 다음과 같다.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 배경용 하사, 신상우 하사, 강승규 하사, 황주복 하사, 이정우 하사, 양회천 2등 상사, 김정도 하사’등 9명의 부하 군인들.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 등은 그해 9월 사형 언도를 받는 법정에서 재판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누가 누구를 위해 재판하는가.
여기 있는 우리도 죽어 하늘나라에 갈 것이고
재판관도 죽어 하늘나라에 갈 것이다.
우리가 죽어 하느님 앞에 다시 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정말 하느님 앞에서도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불후의 명언을 남기며 20대의 젊은 군인들은 형장에서 사라져갔다.
6월 18일 새벽에 박진경 대령이 사망하고 나서 바로 3일 후인 6월 21일부로 미군정은 다음 연대장에 최경록 중령을 임명하고, 부연대장에 송요찬 소령 일본군 준위 출신을 임명한다. 미군정 측에서는 최경록 연대장과 송요찬 부연대장의 토벌 작전을 눈여겨 보게 된다.
여기서 최경록보다 더 악랄하게 토벌에 열을 올리는 송요찬을 미군정에서는 적극 칭찬하며 토벌을 독려한다. 송요찬은 미군정장관의 칭찬에 출셋길을 택한 듯 무자비하게 토벌 작전을 벌인다. 아이와 어른을 구분 없이 학살하고, 남자와 여자도 구분없이 학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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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민들이 산속에 도피 생활을 할 당시 사용했던 놋숟가락과 유물들. (사진 제공 = 송기남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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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한 제주 양민을 학살한 이승만 정권1949년에 들어 군, 경 토벌대는 제주에서 민간인 학살이 극에 달한다. 집 밖으로 한번 끌려 나가면 그날로 칠성판을 짊어지고 저승길에 올랐다. 감옥에는 죽음의 순서대로 끌려온 사람들이 가득하다. 먼저 끌려온 사람들은 바닷가로 이동해 학살하고 비행장으로 이동해 학살하고 돌을 매달아 바다에 버려지고 학살터에서 집단 암매장당한다.
그런데도 감옥이 모자란다. 경찰서와 고구마 전분 공장 창고를 모두 채워도 수용할 공간이 모자랄 정도였다. 감옥이 넘친다고 민간인들 끌고 오는 것을 중단하거나 수용인들을 석방하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배에 태워 육지의 감옥으로 보낸다. 목포형무소, 대전형무소, 대구형무소, 서울까지 보낸다. 이분들은 지금도 돌아오지 못한 민간인들이다. 행방불명으로 처리됐거나 가족의 행적을 알 수 없어 신고조차 못한 경우도 있다. 피붙이 부모 형제 자손이 모두 학살당한 경우는 누가 대신 신고해 줄 수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군부대 긴급회의에서 6월 27일까지 전국에 요주의 인물을 모두 재수감 할 것을 명령한다. 모슬포 주둔 해병부대는 1950년 7월 16일과 8월 20일 새벽에 모슬포 송악산 섯알오름에 있는 일본군 탄약고 자리에서 대량 학살을 감행한다.
해병대 모슬포 부대에서 차출한 대원들이 섯알오름 일본군 탄약고가 해방 후 미군에 의해 폭파돼 물웅덩이가 된 이곳으로 출동시킨다. 중대장과 소대장이 미리 현장에 대기하고 있다가 해병대 대원들에게 실탄을 나눠주면서 한 사람이 민간인 한 사람씩 총살하도록 명령한다. 이어 민간인을 잔뜩 실은 트럭이 탄약고 터에 도착한다. 차에서 내리는 민간인을 한 사람씩 물웅덩이 근처에 세워놓고 군인들은 1열 종대로 서서 명령에 따라 한 사람 한 사람씩 총살한다. 그리고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들을 물웅덩이로 떨어뜨린다. 이것이 섯알오름 예비검속 민간인 학살이다.
이때 모슬포 감옥에서 새벽에 끌려 나오게 된 민간인들은 공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동이 트기 전 캄캄한 새벽에 석방이 아닌 어디론가 트럭에 실려 이동해가는 걸 보고 불안했다. 날이 밝으면 가족들이 먹을 것을 챙겨 감옥으로 면회라도 오는데,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죽어 묻히면 가족들이 찾아 헤맬 것을 생각해 섯알오름으로 실려 가며 신고 있던 검정 고무신을 한 짝씩 한 짝씩 중간중간 벗어 던지면서 간다.
학살이 끝나고 검은 고무신을 추적하며 찾아가 시신을 꺼내다가 군인들에게 들켜 혼이 나고서야 남편의 시신을 포기하겠다고 사정하며 목숨만 살려달라고 사정했던 주민도 있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학살과 감시로 아무도 가족의 시신조차 수습해 장례 치를 엄두를 못 낸다.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협정에 들어가고 1954년 9월 21일 자로 한라산에 자유 통행이 가능해지는 금족령 해제가 되어도 학살자 가족들의 유골수습 진정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후로 끊임없이 진정서를 올리면서 1956년에야 허락을 받는다. 1956년 3월 29일 한림, 한경 지역 주민 시신 62구가 수습돼 금악리 지역 만벵듸 묘역을 조성해 옮겨간다.
그리고 동년 5월 18일 149구의 시신을 수습했으나 한꺼번에 몰살해 한구덩이에 6년 째 방치된 시신들이 얽힌 채로 썩어 각자의 신분을 확인은 불가능했다.
요즘처럼 유전자 검사가 안 되던 시절이므로 대충 머리뼈 하나에 두 개의 팔 뼈와 두 개의 다리 뼈를 맞춰 수습하고 한곳에 묘지를 조성해 함께 장례를 치른다. 이것이 100명의 조상의 한 자손으로 명명된 백조 일손 지지. 묘역이다.
제주에서 일어났던 4·3항쟁은 일제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조국 건설의 깃발을 세우는 과정에 미군정의 간섭과 일제에 부역했던 친일 경찰들과 이들의 후원부대 노릇을 하던 서북청년단들의 역공으로 인해 씻을 수 없는 희생을 치르게 된다.
1947년 28주년 3·1절 행사에 미군정 제주 경찰이 제주 도민에게 실탄 사격은 누구의 명령에 충성했는가?
1947년 3월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장장 7년 반 동안에 3만 5,000여 명이 학살되는 동안 미군은 몇 명이나 죽었는가? 친일 경찰들을 골라서 쓰고 무기를 지원하고 지휘권을 가졌음에도 그들은 단 한 명도 죽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공식적인 사과 한번 없었다. 7년 반에 걸쳐 일어났던 이 거대한 죽음과 항쟁의 어찌 몇 편의 줄거리로 다 설명하리오.
화해와 상생 평화를 위해 비극을 몰고 온 미국과 이승만 일당의 후예들은 반드시 사죄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사죄가 있으므로 해서 희생된 유죄들이 ‘ 당신들이 속죄하므로 우리도 용서한다’라는 화답이 있을 때 비로소 화해와 상생 평화는 이 땅에 아픔을 딛고 꽃이 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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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라산 [사진= 제주 김경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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