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김경홍 기자 금오산 정상 미군기지 내 콘크리트에 파묻힌 음각 후망대 확인⇥ 구미시 2014년 복원 약속 불구 2023년 현재까지 방치
구미 고아읍 출산 고산 황기로는 성인 칭호 받는 3인 중 한 사람⇥ 신라시대 김생 서성書聖, 조선시대 황기로 초성草聖, 이순신 성웅聖雄
구미문화원 발간 구미 인물지⇥‘금오산 최정상에 묻혀 있는 후망대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군사들이 왜군들의 동태를 살피던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고, 황기로 선생은 애틋한 심정으로 400여 년 전 금오산 정상에 올라 후망대에 ’후망대候望臺‘를 음각했다’
↑↑ 후망대 음각 서체로 추정되는 사진 [사진 제공 = 시민 백종목] |
↑↑ 구미문화원 홍인수 사무국장 [사진 =구미문화원] |
↑↑ 후망대 음각 서체로 추정되는 사진 [사진 제공 = 시민 백종목] |
↑↑ 홍인수 국장이 제공한 초서체 望 자 |
↑↑ 후망대 음각 서체로 추정되는 사진 [사진 제공 = 시민 백종목] |
↑↑ 후망대 음각 서체로 추정되는 사진
[사진 제공 = 시민 백종목]
⇥후망대候望臺에 얽힌 역사
구미문화원이 발간한 구미인물지에는 ‘금오산 최정상에 후망대候望臺라고 음각되어 있는 글자가 있으니, 이것도 고산 황기로 선생의 걸작 중의 하나”라고 소개하고 있다.
또 독립 큐레이터 이택용 선생이 소개한 금오산 기행문에도 후망대에 얽힌 역사가 자세히 소개돼 있다.
금오산 기행문은 260년 전 칠곡 벽진이씨 청백리인 인동현감 이등림(李鄧林), 선산부사 이언영(李彦英)의 후손인 조선 후기 여행가 명암(冥菴) 선생이 쓴 책이다.
관련 기행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후망대(候望臺)를 가서 그 높이를 헤아려보니 3리나 5리는 되어 보이고 올라가기 어려움에 겁이 나고 다리를 쉬고 싶었다. 또 되갚을 생각을 하면서 하루를 머물렀다. (중략) 아름다운 곳에 위치한 정자와 누각은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았고 후망대(候望臺)에 올라 하나하나 도맡아 관장하고 싶었다. 남쪽으로 시야를 돌리니 약사전(藥師殿)이 있었는데 높은 바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바위와 후망대(候望臺)는 서로 마주하고 있었고 두 개의 틈 사이의 공간은 겨우 한 사람이 지날 정도였다. 다리를 매고 10여 개의 계단을 올라 아래를 보니 작고 보잘것없어 이름이 없는 한 개의 돌부처가 모셔져 있었는데 유독 영험하다고 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이 다투어 왔다
(중략) 나는 먼저 이 바위를 보고 뒤에 후망대(候望臺)에 오르고 싶었다. 정(鄭)과 육(陸) 두 서생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오르내리면서 곧바로 성(城)의 오래된 곳을 벗어나려고 하였다. 곧바로 두 서생은 따라 보봉(普峯)의 옆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
나는 돌아서 바위를 따라 아래로 내려와 후망대(候望臺)를 보려고 하였다. 물이 있었는데 바위틈에서 졸졸 흘러 내려와 표주박을 가지고 물을 마시니 달고 이가 시렸다.
이어 수십 개의 계단을 올라 대(臺)에 오르고 난 뒤에 아래를 굽어보니 앞에는 두 개의 바위가 또한 수백 길이나 되니 대개 성(城)이 산에서 가장 높은 곳인 듯하였고, 대(臺) 또한 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듯하였다. 그 때문에 밖에서 일어나는 변을 살피기에 반드시 이 대(臺)에서 한 것이니 대(臺)의 이름이 후망대(候望臺)라고 한 것이 이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고서에는 후망대라고 유래된 역사적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조선조 선조 때 이 고장이 배출한 명필 고산 황기로의 글씨로 후망대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구전이 있으나 문헌이 기록된 바 없고 또 미 군영 내에 위치하여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어 확인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하여튼 후망대란 높은데 올라서서 저 멀리 조망하는 곳이니 고려 말 국력이 쇠잔하던 틈을 타서 왜구의 해적선이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면서 강 양안의 마을을 덮쳐 분탕하고 노략질이 극심하여 그때마다 남부여대하여 금오산에 들어와 성을 쌓고 난을 피하면서 고대로 현월봉에 올라서서 멀리 왜구들의 동태를 살피고 망을 보다 왜구들이 떠나가면 다시 마을로 내려와 불탄 집을 손질하고 농사를 짓는 등 생업을 영위했으리라. 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는 군사들이 왜군들의 동태를 살피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처럼 금오산 최정상에 묻혀 있는 후망대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군사들이 왜군들의 동태를 살피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고, 황기로 선생은 애틋한 심정으로 400여 년 전 금오산 정상에 올라 후망대에 ‘후망대候望臺’를 음각했다.
하지만 나라와 민족, 고향 구미를 근심하면서 쓴 음각 후망대는 분단의 역사가 낳은 미군기지 건설 과정에서 콘크리트에 묻혔다. 결국 나라와 민족, 고향을 돌아보며 써 내린 황기로 선생의 넋은 분단이라는 슬픈 역사 속에 아직도 파묻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