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문화

단독/ 금오산 정상 미군기지 터 콘크리트에 파묻힌 고산 황기로 선생 후망대 복원 서둘러야 ...구미문화원 홍인수 사무국장, 백종목 시민 촬영한 음각(陰刻)사진 제보

김경홍 기자 siin0122@hanmail.net 기자 입력 2023.08.28 11:01 수정 2023.08.28 11:15

2003년 김경홍 기자, 미군 통신기지 내 폐시설물 철거 후 미사용 부지 반환 통해 출입 통제된 금오산 정상을 시민의 품으로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내용 단독 보도

이후 구미경실련이 합세하면서 국방부와 미8군으로 구성된 한•미합동현장 실사반이 현지 점검 등의 절차를 거친 후 2013년 미군기지 내의 철조망과 건물을 철거, 2014년 구미시가 자체 복원을 통해 금오산 정상 구미시민의 품으로 돌아와

2013년 4월, 김경홍 기자 금오산 정상 미군기지 내 콘크리트에 파묻힌 음각 후망대 확인⇥ 구미시 2014년 복원 약속 불구 2023년 현재까지 방치

구미 고아읍 출산 고산 황기로는 성인 칭호 받는 3인 중 한 사람⇥ 신라시대 김생 서성書聖, 조선시대 황기로 초성草聖, 이순신 성웅聖雄


구미문화원 발간 구미 인물지⇥‘금오산 최정상에 묻혀 있는 후망대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군사들이 왜군들의 동태를 살피던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고, 황기로 선생은 애틋한 심정으로 400여 년 전 금오산 정상에 올라 후망대에 ’후망대候望臺‘를 음각했다’

 

↑↑ 후망대 음각 서체로 추정되는 사진
[사진 제공 = 시민 백종목]

[k문화타임즈 = 김경홍 기자] 2013년 4월 본 기자는 금오산 정상 미군기지 내 콘크리트에 파묻힌 음각 후망대를 확인하고 2014년 구미시로부터 복원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하지만 2023년 현재까지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 구미문화원 홍인수 사무국장
[사진 =구미문화원]
이런 가운데 8월 28일 구미문화원 홍인수 사무국장이 백종목 시민이 촬영한 후망대(候望臺) 음각(陰刻) 서체 사진을 본지에 제보했다.
홍 국장은 후망대 (候望臺) 중 망(望)은 초서체로 음각한 게 확실하다며, 문화재청의 도움을 받아 서둘러 복원작업에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 후망대 음각 서체로 추정되는 사진
[사진 제공 = 시민 백종목]

↑↑ 홍인수 국장이 제공한 초서체 望 자

금오산 정상이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기까지
기자는 2003년, 방치된 미군 통신기지 내 폐시설물을 철거하고 미사용 부지 반환을 통해 출입이 통제된 금오산 정상을 시민의 품으로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단독 보도했다. 이어 구미경실련이 합세하면서 국방부와 미8군으로 구성된 한•미합동현장 실사반이 현지 점검 등의 절차를 거친 후 2013년 미군기지 내의 철조망과 건물을 철거했다. 이어 2014년 구미시가 자체 복원을 통해 금오산 정상이 구미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게 됐다.

같은 시기인 2013년 4월 기자는 구미 출신으로 우리나라 3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인 황기로 선생이 금오산 정상의 큰 바위에 초서채로 음각한 후망대(候望臺)가 미군기지 건설 과정에서 파묻힌 사실을 단독 보도했다.
당시 시는 보물적 가치가 높은 후망대를 보전하기 위해 콘크리트 해체 등 옛 미군기지 터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원형이 훼손되지 않도록 발굴하겠다고 밝혔으나, 2023년 현재까지도 후망대가 방치된 것으로 확인됐다.

↑↑ 후망대 음각 서체로 추정되는 사진
[사진 제공 = 시민 백종목]


구미가 낳은 황기로 선생의 걸작품 후망대
조선 중종 16년(1521년) 지금의 고아읍 대망리 속칭 망장에서 태어난 고산 황기로 선생(1521년~1567년)은 유구한 우리나라의 역사를 통해 성인 칭호를 받는 3인 중의 한 사람이다. 문인으로 신라시대 김생은 서성書聖, 조선시대 황기로는 초성草聖, 무인으로 이순신 장군이 성웅聖雄 칭호를 받았다. 그만큼 황기로 선생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인물 중의 한 명으로 평가받은 인물이다.

특히 황기로 선생은 사신단으로 중국을 방문했을 때 황제 앞에 글씨를 써넣었고, 이를 본 황제는 황기로 선생을 해동초성 海東草聖이라고 칭했다. 왕휘지 이후 일인자라는 의미였다. 이 때문에 중국 사신단이 우리나라를 방문하면 황기로 선생의 글씨를 받아 가는 것을 최고의 선물로 여겼고, 금오산 정상에 올라 후망대를 바라보면서 감탄했다고 한다. 그만큼 황기로 선생은 중국에서도 성인의 예를 받던 인물이었다.

고아읍에 있는 접성산의 유래 역시 황기로 선생이 서재로 사용하던 매학정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성인이 태어나고 도를 닦는 매학정과 접해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접할 接자에 성인 성聖자를 써서 접성산 接聖山이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 후망대 음각 서체로 추정되는 사진
[사진 제공 = 시민 백종목]

⇥후망대候望臺에 얽힌 역사

구미문화원이 발간한 구미인물지에는 ‘금오산 최정상에 후망대候望臺라고 음각되어 있는 글자가 있으니, 이것도 고산 황기로 선생의 걸작 중의 하나”라고 소개하고 있다.
또 독립 큐레이터 이택용 선생이 소개한 금오산 기행문에도 후망대에 얽힌 역사가 자세히 소개돼 있다.

금오산 기행문은 260년 전 칠곡 벽진이씨 청백리인 인동현감 이등림(李鄧林), 선산부사 이언영(李彦英)의 후손인 조선 후기 여행가 명암(冥菴) 선생이 쓴 책이다.
관련 기행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후망대(候望臺)를 가서 그 높이를 헤아려보니 3리나 5리는 되어 보이고 올라가기 어려움에 겁이 나고 다리를 쉬고 싶었다. 또 되갚을 생각을 하면서 하루를 머물렀다. (중략) 아름다운 곳에 위치한 정자와 누각은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았고 후망대(候望臺)에 올라 하나하나 도맡아 관장하고 싶었다. 남쪽으로 시야를 돌리니 약사전(藥師殿)이 있었는데 높은 바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바위와 후망대(候望臺)는 서로 마주하고 있었고 두 개의 틈 사이의 공간은 겨우 한 사람이 지날 정도였다. 다리를 매고 10여 개의 계단을 올라 아래를 보니 작고 보잘것없어 이름이 없는 한 개의 돌부처가 모셔져 있었는데 유독 영험하다고 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이 다투어 왔다

(중략) 나는 먼저 이 바위를 보고 뒤에 후망대(候望臺)에 오르고 싶었다. 정(鄭)과 육(陸) 두 서생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오르내리면서 곧바로 성(城)의 오래된 곳을 벗어나려고 하였다. 곧바로 두 서생은 따라 보봉(普峯)의 옆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
나는 돌아서 바위를 따라 아래로 내려와 후망대(候望臺)를 보려고 하였다. 물이 있었는데 바위틈에서 졸졸 흘러 내려와 표주박을 가지고 물을 마시니 달고 이가 시렸다.

이어 수십 개의 계단을 올라 대(臺)에 오르고 난 뒤에 아래를 굽어보니 앞에는 두 개의 바위가 또한 수백 길이나 되니 대개 성(城)이 산에서 가장 높은 곳인 듯하였고, 대(臺) 또한 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듯하였다. 그 때문에 밖에서 일어나는 변을 살피기에 반드시 이 대(臺)에서 한 것이니 대(臺)의 이름이 후망대(候望臺)라고 한 것이 이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고서에는 후망대라고 유래된 역사적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조선조 선조 때 이 고장이 배출한 명필 고산 황기로의 글씨로 후망대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구전이 있으나 문헌이 기록된 바 없고 또 미 군영 내에 위치하여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어 확인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하여튼 후망대란 높은데 올라서서 저 멀리 조망하는 곳이니 고려 말 국력이 쇠잔하던 틈을 타서 왜구의 해적선이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면서 강 양안의 마을을 덮쳐 분탕하고 노략질이 극심하여 그때마다 남부여대하여 금오산에 들어와 성을 쌓고 난을 피하면서 고대로 현월봉에 올라서서 멀리 왜구들의 동태를 살피고 망을 보다 왜구들이 떠나가면 다시 마을로 내려와 불탄 집을 손질하고 농사를 짓는 등 생업을 영위했으리라. 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는 군사들이 왜군들의 동태를 살피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처럼 금오산 최정상에 묻혀 있는 후망대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군사들이 왜군들의 동태를 살피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고, 황기로 선생은 애틋한 심정으로 400여 년 전 금오산 정상에 올라 후망대에 ‘후망대候望臺’를 음각했다.

하지만 나라와 민족, 고향 구미를 근심하면서 쓴 음각 후망대는 분단의 역사가 낳은 미군기지 건설 과정에서 콘크리트에 묻혔다. 결국 나라와 민족, 고향을 돌아보며 써 내린 황기로 선생의 넋은 분단이라는 슬픈 역사 속에 아직도 파묻혀 있다.






저작권자 K문화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