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6월 10일 국가에서 같이 기념해야 할 날을 맞았습니다.
그 하나는 2020년 12월 8일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6·10 만세운동입니다. 그러니까 1919년 3.1운동에 일제의 교묘한 술책으로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원조가 소극적이고 국내외적으로 독립운동의 흐름이나 방식에서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을 때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일(인산일)을 기해 학생중심의 만세시위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날의 운동은 순종의 장례 행열이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지날 때, 중앙고보생 300여 명이 “조선독립만세”를, 이어 연희전문학생 50여 명이,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한국 YMCA연맹전신) 박두종 외 2명이, 『시대일보』 배달부 김낙환과 청년 2명이, 동묘 부근에서 중앙고보 생 박용철·이동환, 중동학교 생 곽대형·황정환 등이 하루종일 시간을 다르게 독립만세를 부르며 격문을 살포하는 등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국의 독립을 외치고 더러는 잡혀서 몇 년의 옥고와 고문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특히 사전에 탄로나서 불발된 노총계(勞總系, 사회주의자 권오설 중심), 사직동계(社稷洞系 연희전문학교 문과 2년생 박하균 중심), 통동계(通洞系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중심)의 세 개의 계열이 조직적으로 준비, 진행했던 점에서 조선독립운동의 흐름을 읽을 수 있으면서, 오로지 학생들의 순수한 조국 독립에 대한 열정이란 점은 반드시 기억되어야할 운동사입니다.
비록 처음은 서울에 국한되어 일어났으나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고창·순창·정주·울산·군산·평양·홍성·공주,당진·강경·전주·하동·이원 등)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통해 일제에 항거한 점 등은 3.1운동과 같은 맥을 보여주면서 이후 꾸준히 다져온 결사·동맹휴학·계몽 활동 등의 학생들의 결집된 소산으로 나타난 항일운동으로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연결되는 등 민족 독립운동사의 꺼지지 않는 하나의 큰 횃불이 되었다고 역사는 기록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지금 살아있는 60대말 ~ 70대는 누구나 겪은 6월 민주항쟁입니다.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대한민국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정부 시위입니다.
전두환 정권 아래 4·13 호헌 조치와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민주화 시위가 발생하였고, 이 항쟁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최루탄이 터지며 시발이 되어 전 국민을, 학생들의 분노를 누르려고 했지만 결국은 군사독재가 종언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일 정도의 함성과 분노는 서울 뿐 아니라 전국의 모든 대학교, 시민, 중고등학생, 심지어 대학교수까지 나서서 ‘제자들의 피의 입을 닫고 있을 수 없다’는 절규로 민주화를 외쳤습니다.
결국 6월 29일 노태우의 수습안 발표로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지고 1987년 12월 16일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우리나라 시민 사회 운동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이에 따라 지난 2007년에는 이날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6.10 민주항쟁이 일어난지 36년이 되는 금년 2023년 6월10일도 기념식에 예정된 날이었는데요. 그런데 매년 열리던 민주항쟁 기념식에 정부 측이 돌연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주관 단체가 정권 비판 행사에 이름을 올렸다는 이유였습니다. 예정됐던 차관의 기념사도 취소됐습니다.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후 15년만에 처음 있는 ‘정부의 옹졸함’(이재명 더불어민주단 대표)이 그대로 들어났고 오늘의 정부가 존재하는 근거 자체를 망각하는 결과였다는 지적입니다.
일제에 항거하면서 민족의 제단에 몸을 던진 학생들의 피와 함성이 있는 날, 민주화를 위한 함성과 외침, 즉 지금의 정부가 존재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든 학생들의 피가 뭉쳐진 이날의 아픔을 기억하는 것은 후손들의 당연한 행위이겠지요.
현 정권과 사이가 좋지않고 껄끄러운 말을 하는 단체가 주관한다고 그 이념마져 탈색시키려는 행동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좁쌀영감의 패악질로 밖에 보이지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