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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제주 4·3 망언 태영호, 제주도민이 국민의힘과 등 돌렸다’

서일주 기자 goguma@naver.com 기자 입력 2023.05.10 18:22 수정 2023.05.10 18:27

제주도민들“최고위원직 사퇴 당치도 않다. 석고대죄하고 정치계에서 사라지라 ”

군인과 경찰들은 아이와 어른을 가리지 않았다. 노인도 여성도 죽임을 당했으며, 무서워서 숨은 것 자체도 죄가 되어야 했다. 세 살 아기도 죽이고, 네 살 아기도 죽이고, 70대 노인도 죽이고 또 죽였다.

 

[K문화타임즈 =서일주 기자] 제주도민을 분노케 해 온 국민의힘 태영호 의원이 10일 최고위원직에서 사퇴했다. 하지만 제주도민들은 석고대죄하고 정계에서 물러나라는 입장이다.
‘제주 4.3이 김일성의 지시’라는 망언 파문은 제주도민은 물론 전국 각지에 있는 출향민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사고 있다.

격앙한 도민들 중에는 “북한에서 호의호식해 그가 국론 분열의 중심에 서 있다”고 격앙해 하고 있다.

↑↑ 송기남 논설위원 제공

◇과연 김일성의 지시인가/ 다음은 제주 4.3의 비극을 단편화한 일화이다
<송기남 논설위원이 6회에 걸쳐 본지에 연재한 제주 4.3 항쟁사 중 주요 내용>

1948년 10월 하순부터는 제주 중산간 마을에 대한 군인과 경찰이 합동작전으로 대대적인 토벌 작전이 감행된다. 해안선에서부터 반경 5킬로미터 떨어진 산간 마을들을 모두 불 지르고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사살하도록 인간사냥을 허용하는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48년 10월 31일 선흘 초등학교에 주둔했던 9연대 일부 군인들은 마을 근처에서 청년들 10명을 붙잡아 끌고 가서 8명을 총살하면서 너희들도 이렇게 죽을 수 있다고 겁을 준다. 이때부터 마을 청년들은 집에 있다가는 언제든지 잡혀가서 즉결 총살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숲속으로 도피해 숨어 살게 된다.

그리고 1948년 11월 21일부터 군인들이 마을을 모두 불 질러 버린다. 일부 주민들은 아랫마을 함덕리와 조천리로 피난을 가지만 가축을 키우거나 조, 메밀 등 수확해 놓은 곡식과 가축들을 그냥 두고 떠날 수가 없어서 마을 근처 동굴 속으로 피신한다. 그 자연 동굴들이 반못굴과 도틀굴, 목시물굴, 대섭이굴, 벤뱅듸굴 등이다.

초토화 작업이 길어질 것이라고 생각을 못한 마을 주민들은 일정 기간만 숨어있으면 사태가 마무리돼 평화를 되찾을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으로 토굴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마을주민들이 굴속으로 숨어들어간 지 4일 후인 25일에는 선흘 숲을 포위해 수색하던 군인들은 잠시 동굴 밖을 나와 다니던 주민 한 사람을 생포해 살고 싶으면 일행들이 숨어있는 은신처를 안내하라고 협박한다. 평범한 농민이 총부리를 들이대는 무장 군인의 협박에는 버텨낼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도틀굴로 안내받은 군인들은 생포된 주민마저도 그 자리에서 사살해 버린다. 군인들은 굴속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쏘았고, 여러 명의 주민이 희생된다. 25명의 주민 중에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고석배, 고순봉, 고순진,고태식, 고원석, 김계원, 김기옥, 김대규, 김덕수, 김용옥, 부제휴, 부좌룡, 안석방, 오태효, 조홍륜, 조유빈, 김기수, 김기후 등 18명이다.

이곳에서 희생된 고원석은 굴속으로 숨어들면서 동생과 의논해 숨은 곳이 발각되더라도 형제 중에 한 명은 살아남아야 집안에 대를 잊는다고 해 동생 고춘석은 목시물굴에 숨어서 살아남고, 형 고원석은 도틀굴에 숨었다가 희생된다.

동생 고춘석은 며칠 후 형님의 시신을 수습하러 가보니 누군가는 와서 형님 고원석의 시신을 인근 숲속에다가 흙과 돌로 임시 가매장해 놓고 50센치미터 정도의 나무를 깎아 명패를 새겨 꽂아놓은 걸 보았다고 훗날 증언했다.

도틀굴에 숨어있던 주민 25명 가운데 18명을 현장에서 사살한 군인들은 나머지 일부 주민들을 함덕리에 있는 대대본부로 끌고 서 다른 곳에 은신처는 어디에 있는지를 대라며 밤새도록 고문을 했다. 지독한 고문을 감당하지 못한 한두 람이 도틀굴에서 약 1킬로미터 떨어진 목시물굴에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자백받아 낸다.
그리고 11월 26일 아침 함덕리 주둔 9연대 토벌군들은 간밤에 밤새도록 고문해 자백을 받아낸 주민을 길잡이로 세우고 목시물굴 토벌에 나선다. 굴속에 숨어있던 주민들은 전날 도틀골에 숨어있던 주민들은 26일 아침에야 알아차리고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준비에 나선다, 일부 주민들은 식사 준비를 하면서 분주하게 움직일 때 토벌군인들은 박격포를 쏘며 들이닥친다. 그러나 주민들은 도틀굴에서 일부 주민이 잡혀간 것을 모르고 있었고, 목시물굴을 알고 온 줄도 모르는 상황이어서 대부분의 사람이 굴속으로 숨어들게 되고 일부는 멀리 숲속으로 달아났다.

목시물굴은 도틀굴보다 공간은 작지만 굴 안에는 200여 명 이상의 선흘리 주민들이 피신해 있던 곳이다. 토벌대는 굴 안으로 수류탄을 투척하며 나올 것을 종용하지만 사람을 쉽게 죽이는 것을 잘 아는 주민들은 나가도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버티기로 한다.
고춘석씨의 증언에 따르면 목시물굴 안에 있는 청년들은 토벌군과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여러 시간을 대치했다고 한다. 굴 안에 있는 주민들은 어린아이들만이라도 살려보자고 합의를 보게 된다.

젖먹이 아기를 안고 나가면 차마 죽이지는 않겠지 하고 나갔으나 모두 총살해 버린다. 채 100일도 안 된 아기도 엄마도 모두 사정없이 사살했다. 그리고 전날 도틀굴에 잡혀가 밤새도록 고문당한 끝에 목시물굴을 자백했던 한 아무개 씨도 토끼사냥이 끝난 사냥개를 삶아 먹듯 무자비하게 죽여버린다.

그날 숲속으로 도망쳐 목숨을 건진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멀리 높은 동산에 숨어서 내려다보니 아침부터 들이닥친 군인들이 낮까지 총 쏘는 소리와 함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커멓게 그을렸다고 한다. 토벌군인들은 시신 위에 기름을 붓고 불로 태우기까지 했다. 기름을 부어 불로 태운 시민들은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목시물굴에서도 전날 도틀굴과 마찬가지로 몇몇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놓고 주민들이 동굴 근처에 보관해 둔 식량들을 짊어지고 옮기게 했다. 그 무거운 짐들을 차가 있는 곳인 반못굴까지 옮겨서 차에 싣자마자 그 자리에서 사살해 버렸다고도 한다.
여기에서도 일부 주민들은 함덕 대대본부로 끌고 가서 전날처럼 고문 끝에 대섭이굴과 벤뱅듸굴을 알아낸다.
고문은 남자들에게 제한되지 않았다. 여자들도 고문당하고 희롱을 당해야 했고, 결국에는 학살까지 했다. 고문 끝에 길잡이로 세운 11월 27일 벤뱅듸굴을 덮친다. 그리고 목시물굴에서 잡아다가 고문 끝에 길 안내까지 받아놓고는 그 자리에서 또 사살하기도 했다.

군인과 경찰들은 아이와 어른을 가리지 않았다. 노인도 여성도 죽임을 당했으며, 무서워서 숨은 것 자체도 죄가 되어야 했다. 세 살 아기도 죽이고, 네 살 아기도 죽이고, 70대 노인도 죽이고 또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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