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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시. [사진 = 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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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2014년 구미시장 선거
▻박미진 시장은 마지막 관선 시장, 2개월 최단 임기1993년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행정의 효율화를 주창하면서 도농통합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여파가 만만치 않았다. 선산지역 도의원은 통합 반대에 사활을 걸고 삭발에 들어갔고, 일부 선산지역 주민들은 역사의 중심인 선산군의 구미시 종속은 용납될 수 없다면서 거세게 반발했지만, 정치적•시대적 기류는 선산군의 구미시 통합으로 이미 기울고 있었다.
통합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던 시절인 1994년 1월1일부터 1995년 4월 19일까지 관선 시대의 길을 걸어야 했던 이가 박병련 시장이었다. 혹한이 몰아쳐도 주머니에 손을 넣는 일을 절대 금기사항으로 여길 만큼 자기 관리에 엄격하기로 유명했던 박시장은 부하 공무원들에게도 동일한 잣대를 들이댔다.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구미시청 역사의 잔잔한 일화로 잊혀지지 않고 있다.
뒤를 이은 이가 바로 박미진 시장이었다. 민선시장 선거 열기가 한여름처럼 후끈 달아오르던 1995년 4월 20일부터 선거가 종료되던 1995년 6월 30일까지의 2개월 동안 시장직을 수행한 박시장은 새로운 시정방침을 정하지도 않았다. 임기 2개월의 박시장에게는 사실상 민선 시장 선거 업무를 무리없이 완수해야 한다는 책무가 주어져 있었다.
▻김관용 민선 초대시장 취임구미면이 읍으로, 읍이 구미시로, 구미시가 통합 구미시로서 역사적인 기록을 남기기까지 관선 시장을 거친 이는 14명이었다. 그 마지막 바톤을 이어받은 이가 바로 지금의 경북도지사인 김관용 민선시장이었다.
하지만 민선시장이 되기까지는 능선을 넘고 또 넘는 고행의 순간순간을 걸어야 했다. 고아읍 출신으로서 용산세무서장을 끝으로 새누리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 공천장을 받고 낙향한 당시 김관용 후보는 평생을 구미에서 터전을 일구며 살아온 전병억 당시 자유민주연합 전병억 후보와 일전불사의 투지를 불살라야만 했다.
김윤환, 박세직 국회의원이라는 든든한 후원군이 버티고 있었지만 선거전은 한치 앞을 내다볼수 없을 만큼의 안개 정국이었다. 사실상 일대일 구도였지만, 뒤늦게 뛰어든 무소속 강구휘, 장경환 후보의 파괴력도 만만치 않았다. 당선권에서 이들 후보가 멀어지기는 했지만 을구가 텃밭인 김관용 후보는 같은 을구 출신인 장경환 후보의 선전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었다.
역으로 갑구가 텃밭인 전병억 후보는 같은 갑구 출신의 강구휘 후보의 선전에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마치 미분법을 풀 듯 얽히고 설킨 복잡다단한 상황을 거쳐 결국 당선의 영예는 김관용 후보에게 안겼다.
개표결과 김관용 후보는 4만 6130표로 4만 4469표를 얻은 전병억 후보를 1천 661표 차로 누르고 당선됐던 것이다. 개표가 진행되던 1995년 6월 27일 늦은 밤에는 희비가 엇갈렸다. 갑구지역 개표가 진행되던 올림픽 기념관에서는 전병억후보 지지자들이 환호성을 울렸다. 개표결과 3만 5296표를 얻은 전병억 후보가 3만 2539표를 얻은 김관용 후보를 2천 757표차로 눌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을구에서는 상황이 역전됐다. 1만 3591표를 얻은 김관용후보가 9천 173표를 얻은 전병억 후보를 4천 418표차로 따돌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갑, 을구 합계결과 김 관용 후보는 1천 661표차로 신승을 거두었다.
이외에도 갑구 출신의 무소속 강구휘 후보는 15.08%인 1만9805표였고, 을구 출신의 무소속 장경환 후보는 11.73%인 1만 5404표, 무소속 강상수 후보 2천 891표, 무소속 경광수 후보는 2천 584표였다.
▻무적의 재선, 단독출마한 김관용 후보초선 임기는 3년이었다.
제2대 구미시장 선거가 1998년 6월4일로 다가오면서 1천6백여차로 분루를 삼킨 전병억 후보의 재도전 의지는 가열되기 시작했다. 1995년 선거의 후유증을 다스리기 위해 붓글씨로 3년의 세월을 억눌러 지냈던 그였지만,3년의 세월이 흐른 구미시의 정세는 상전벽해돼 있었다.
결국 주변의 간곡한 만류에 힘입어 전병억 회장은 재선 도전 의지를 가슴 깊이 들여놓아야 했고, 선거전은 김관용 후보의 단독 출마로 매듭됐다.
▻이강웅 후보와 2파전, 3선 고지 오른 김관용 후보단독출마로 재선의 벽을 쉽게 무너뜨린 김관용 후보에게 세 번째 선거는 두 번째의 단독 출마를 허용하지 않았다. 한나라당 후보 경선부터 김관용 후보는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감사원 사무관 출신의 이규건 후보가 경선도전장을 냈기 때문이었다. 경선초반부터 과연 김관용 후보가 몇 %로 차로 이기느냐는 식의 결론이 예고된 경선이었지만, 40대 초반이라는 패기와 참신함을 앞세운 이규건 후보의 도전장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박정희 체육관에서 경선결과가 발표되자마자, 체육회 사무실로 달려온 김관용 후보가 ‘몇 %로 차로 이겼는지“를 계산 하는 등 과민반응을 보였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김후보가 이처럼 예민 반응을 보였던 것은 본선전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이끌던 한국 미래연합 이강웅 후보가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본선에 오른 한나라당 김관용 후보는 고시동기이면서 친구지간으로 포항 부시장을 지낸 한국미래연합 이강웅 후보, 민노당 황준영 후보등과 3파전의 길을 가야만 했다.
2002년 6월 13일,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김관용 후보는 66.4%인 6만 6059표를 얻은 가운데 2만 1691표로 21.8%를 얻는데 그친 이 강웅 후보를 여유있게 물리치며 3선 고지에 안착했다. 민노당 황준영 후보는 11.79%인 1만1736표였다.
[다음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