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 K문화타임즈 논설주간·구미 대구 YMCA 전 사무총장] 19c 말~20c 초 러시아 차르 시대 때 ‘유대인 장로들이 세계를 지배하려는 비밀 계획을 세웠다’는 내용의 ‘시온장로 의서’(Protocols of the Elders of Zion) 라는 문서가 나타났습니다.
좀 허왕되지만 ‘유대인 지도자들이 비밀회의를 통해 언론 장악, 금융 지배, 혁명 조장, 정부 통제 등을 통해 세계를 지배한다’는 회의록 형식의 글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는 완전한 위조문서임이 확인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Nazi) 독일이 홀로코스트 이전 반유대주의 선전에 활용되는 끔찍한 일의 시초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내용은 1903년 러시아 신문에 처음 등장하였는데, 상당 부분이 1864년 프랑스 정치 풍자서 『마키아벨리와 몽테스키외의 지옥에서의 대화』를 표절한 것이고, 러시아 비밀경찰 오흐라나(Ochrana)가 반유대주의 선동을 위해 만든 것으로 추정되었지요. 1921년 영국 The Times 조사로 표절 문서임이 확인되었고, 학계에서는 100% 위조문서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가짜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즉 유럽과 러시아에서 반유대주의 선동에, 나치 독일이 유대인 탄압 선전에 활용되었고 인종·종교 혐오를 확산시킨 대표적 음모였지요. 이런 말도 되지 않은 거짓(가짜)을 정권 유지와 독재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모습은 한두 번이 아니었고, 지금도 버젓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진실이라며 역사와 만인을 호도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끊이지 않는 부정선거론입니다.
국무총리와 대통령 대행을 지냈던 사람, 아나운서 출신의 전 국회의원, 이름난 PD, 몇십만의 구독자를 가진 유튜버 등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지난번 선거는 부정이며 현 국회의원은 부당한 방법으로 당선된 사람들이라 욕하고 다닙니다.
급기야 이런 음모는 2024년 12월 3일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언함에 그 한 이유가 되어 군대 병력을 국회와 선거관리 위원회로 보내어 조사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선거관리 위원회를 군인들이 점령하고 서버를 확인하면서 중앙 선거관리 위원회 직원들에게 자백을 강요했다는 것입니다. 일 년이 지나고 계엄이 무산되었고, 그 내용은 거짓임이 백일하에 드러났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거리 곳곳 현수막에는 ‘부정선거’를 운운하는 내용의 붉은 글씨는 사람마다 짜증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부정 선거론자들이 제시하는 대표적인 주장의 첫째는 ‘사전투표 득표율 이상’입니다. 즉 ‘사전투표와 본 투표의 정당 득표율 차이가 비정상적’으로 크고, ‘특정 정당이 전국적으로 비슷한 비율로 높게 나오는 것’은 통계적으로 자연스럽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서 사전투표는 연령·직업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투표 성향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는 통계학자들의 판단과 대법원의 선언이 있지만 음모론자들은 ‘아니라’고 ‘부정선거의 흔적’이라 주장합니다.
둘째는 ‘전자개표기 조작 가능성 주장’입니다. 즉 개표는 투표지 분류기(전자 장비)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 장비가 해킹이나 프로그램 조작으로 결과를 바꿀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우리나라의 개표방식은 수 계표라는 사실을, 개표장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면 반드시 아는 일인데...그 외 ‘투표지의 접힌 흔적이 없는 것’이나 ‘인쇄 형태가 동일한 투표지’, 일부 투표지의 ‘도장 위치 문제’ 등 ‘투표지 형태 이상 주장’하거나 ‘투표지 보관 및 관리 문제 제기’하고 일부 유튜버 주장하는 ‘득표율 분포가 정규분포와 다르다’는 베네포드 법칙(Benford's Law)을 말하지만, 선거 데이터는 이를 법적으로 적용하기 어렵다는 것인데도 거듭거듭 선거 무효 내지는 음모를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부정선거 음모론이 전 국민을 아프게하고 우리나라의 신인도를 일시적으로 급격하게 추락시킨 계엄의 단초가 되었다는 사실은 전술한 시온장로 의정서와 닮았습니다.
가짜이야기를 근거로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한 것처럼 잘못된 선거부정 음모론으로 계엄을 벌렸다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음모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고, 나아가 정치학·사회학에서 정치적 불신이 높을 때 증가하는 음모론적 사고(conspiracy thinking)와 맥을 같이합니다. 19세기 이야기를 21세기에도 같이 붙이는 어리석음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일부 음모론에 앞장선 유투버들의 장난기 어린 행위를 참이라 믿는 위정자들이 불쌍하지만, 이번 지방선거에 참패가 분명한 야당이 또다시 부정선거라고 떠들지 않을지 염려됩니다.
통일교 신자. 신천지 교인 등 음모에 빠진 자들이 얼마나 횡횡할지 우리는 두 눈을 부릅뜨고 살피고, 이를 지적하며, 잘못을 혁파하는 일 역시 선거감시, 바른 선거운동의 중요한 부분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