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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새벽칼럼]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

김미자 기자 cloverail@hanmail.net 기자 입력 2025.03.21 00:25 수정 2025.03.21 07:14

⇁사람이 정치를 하도록 해야 한다

[분석 기획 칼럼 전문매체 K문화타임즈 발행인 (시인 겸 소설가) 김경홍] 어린시절 산촌은 가을마다 노란 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던 과수원 동네였다. 혹한의 바람이 물러설 즈음이면 봄 햇살이 얼굴을 들이미는 과수원에서 어른들은 전정가위(전지가위)를 귤나무에 들이밀곤 했다.

 

아버지도 그랬다.
하지만 나뭇가지에다 전정가위를 들이민 일손은 더뎠고, 표정은 늘 신중했다. 왜 전정가위를 든 아버지가 귤나무 앞에만 서면 머뭇대곤 했을까.

궁금증이 풀린 것은 청년기로 들어설 무렵이었다.
“병이 들었다며 무턱대고 가지를 쳐내고, 바람길을 막아선다고 가지를 쳐내고, 햇빛을 가린다는 이유로 가지를 쳐내기만 한다면 귤나무가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 튼실한 과일이 열리기는커녕 말라 죽지 않겠느냐. 그러니 조심할 수밖에...”
그 말씀을 남긴 늙은 아버지는 전정가위를 내게 물려주셨다.

‘정치라는 나무’도 그렇다. 이런저런 이유로 가지를 쳐내기만 한다면 과연 그 나무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며, 튼실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는가.

요즘 우리의 정치가 그렇다. 사람의 몸짓이 아닌 짐승의 몸짓으로 멱살잡이를 한다. 듣기만 해도 민망한 짐승의 언어로 상대의 인격을 짓밟고, 짐승의 눈빛으로 상대를 저격한다. 짐승의 걸음걸이로 사법기관을 들락거린다.
‘송사 많은 집안치고 흥한 집안 못 보았다’는 속담은 요즘, 우리의 못된 정치 풍토를 타이르는 회초리만 같다.

나무가 잘 자라도록 보듬어 주기는 켜녕 이런저런 이유를 들이밀며 가지를 쳐내기만 하고 있으니, ‘정치라는 나무’가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국민에게 쥐어 줄 과일은커녕 한여름의 무더위를 식힐 그늘마저 안겨드릴 수 있겠는가.

어찌하여 전정가위를 들고 귤나무 앞에선 그 신중한 농부의 표정을 요즘 우리의 정치에서는 읽을 수 없는 것일까.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기를 포기한 이들이 정치를 하기 때문이다. 인본주의를 내팽개친 이기주의, 휴머니스트이기를 포기한 폭력주의, 인간이기를 포기한 인면수심이 정치를 하기 때문이다.

생명의 존귀함을 가볍게 보는 무력주의, 세치의 혀를 함부로 휘둘러대는 야만주의, 거짓을 밥먹 듯 하는 비양심주의가 정치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정치를 해야 한다. ‘정치라는 나무’로부터 싱싱한 과일을 따 먹고 무더운 날 그늘이라도 삼으려면 사람이 ‘정치라는 나무’를 가꾸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정치를 할 수 없도록 한 우리들 역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다.

태평성대를 이룬 요임금은 초가집에서 살았다. 음식도 쌀과 채소가 전부였다. 겨울철에는 녹비(사슴의 가죽) 한 장으로 추위를 견뎠고, 의복이 너덜너덜해지지 않으면 새웃으로 갈아입지 않았다. 한 명의 백성이라도 기아에 허덕이거나 죄를 범한 사람이 있으면 그것을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고 여겼다.
상대의 잘못이 있어도 마음으로 다가서서 충고를 했고, 부하가 죄를 지으면 상대를 탓하기에 앞서 자신을 탓하며 밤을 지새웠다.
임금의 자리도 자기의 아들보다 인덕이 뛰어난 신하에게 물려줬다.

사기史記는 요임금의 사람됨을 “어짊은 하늘과 같았고, 그의 지혜는 신과 같았다. 백성들은 그를 해처럼 따랐고, 구름처럼 올려다보았다. 부귀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았고, 사람을 깔보지 않았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사람이 정치를 했기 때문에 ‘정치라는 나무가’가 태평성대의 풍요로움을 이뤘고, 사람이 정치를 하도록 했기 때문에 ‘정치라는 나무’의 그늘에서 백성들은 늘 편안하고 행복했다.

탄핵정국은 증거물이며, 자업자득의 산물이다. 사람이 정치를 하도록 지혜를 발휘하지 못한 우리들에게 내려진 형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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