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기획 칼럼 전문매체 k문화타임즈= 발행인(시인 소설가) 김경홍] 태평성대를 이룬 요임금이 어느 날 민정 시찰에 나섰다.
나라를 잘 다스린다고 칭찬이 자자하자, 그 실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요임금이 논두렁을 따라 걸어가자, 어느 노인이 신나게 노래(격앙가)를 부르고 있었다.
“해 뜨면 들에 나가 일하고/ 해지면 집에 들어와 쉰다/ 우물을 퍼마시고/ 밭을 갈아 배를 채우니/ 내 살아가는 데 임금의 힘이 있으나 마나일세/
다가선 임금이 노인에게 물었다.
”이 나라의 임금 이름을 아시오“
”걱정없이 살아가는데 그걸 알아서 뭘 하오“
임금은 ‘허허’ 웃으며 발길을 돌렸다.
삶이 행복하기 때문에 임금의 이름을 굳이 알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다.
요임금은 초가집에서 살았다. 음식도 쌀과 채소가 전부였다. 겨울철에는 녹비(사슴의 가죽) 한 장으로 추위를 견뎠고, 의복이 너덜너덜해지지 않으면 새웃으로 갈아입지 않았다. 한 명의 백성이라도 기아에 허덕이거나 죄를 범한 사람이 있으면 그것을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고 여겼다.
사기史記는 요임금의 사람됨을 “어짊은 하늘과 같았고, 그의 지혜는 신과 같았다. 백성들은 그를 해처럼 따랐고, 구름처럼 올려다보았다. 부귀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았고, 사람을 깔보지 않았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탄핵정국을 헤쳐나가는 많은 국민은 탄핵 찬반으로 갈라서서 삿대를 치켜들고 있다. 한쪽에서는 대통령을 증오하고, 다른 한쪽에선 추앙한다. 이러다 보니 태아까지도 대통령의 이름을 달달 외울 정도다.
누가, ”해 뜨면 들이 나가 일하고/ 해지면 집에 돌아와 쉬어야 할“ 민생들을 “해 뜨면 집회장으로 나가 울부짖고/ 해져도 집회장에서 밤을 지세게”“하고 있나.
누가 그 순진무구한 국민을 그곳으로 불러들였나. ”국민을 걱정없이 살아가도록 하겠다“고 공약한 대통령과 위정자들의 배신이 개탄스럽다.
태평성대를 이룬 요임금의 불렀다는 격앙가의 구절이 새삼스럽기만 하다.
”내 살아가는 데 임금의 힘이 있으나 마나일세“
요임금은 초가집에서 살았지만, 이 땅의 위정자들의 삶은 어떤가. 요임금은 사슴 가죽 한 장으로 추위를 견뎠지만, 고급 아파트를 소유한 위정자들은 왜 이리도 많은가. 요임금은 의복이 너덜너덜해지 않으면 새옷으로 갈아입지 않았지만, 어째서 위정자들이 타고 다니는 차량은 고급 일색이며, 고급옷만 걸쳐 입는가.
요임금은 한 명의 백성이라고 기아에 허덕이거나 죄를 범한 사람이 있으면 그것을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고 여겼지만, 왜 이 나라의 법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만 강한가. 왜 법망은 대통령이나 위정자, 그들의 식솔들에겐 어리광을 부리고, 힘없고 빽없는 국민들에겐 철망으로 둔갑해 손발을 꽁꽁 묶어대는가.
대통령이나 위정자들이 위임한 권력을 자신의 안위를 위한 도구나 사익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한 책임은 비단 대통령이나 위정자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마치 짐승의 무리처럼 몰려다니며 이용만 당하는 군중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러니 늘 그들은 ‘잔치가 끝나면 빈손으로 쓸쓸하게 귀가하는 배고픈 존재’로 전락한다.
그러므로 이성으로 거듭 깨어난 민중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래야만 대통령이나 위정자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닌 존중받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게 아닌가.
탄핵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 “나라의 주인은 대통령이나 위정자가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깨닫지 못하면 늘 머슴일 수밖에 없다.
군중이 아닌 민중의 이름으로 거듭나야 “걱정없이 살아가는데 임금의 이름을 알아서 뭘 하오”라고 말하는 시대를 살 수 있다. 그래야만 대통령이나 위정자들이 “의복이 너덜너덜해지지 않으면 새 옷으로 갈아입지 않고, 한 명의 백성이라도 기아에 허덕이거나 죄를 범한 사람이 있으면 이것이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고 여기는 시대”를 살 수 있다.
국민이 현명하고 지혜로와야 현명한 지도자를 만날 수 있다. 짐승의 무리처럼 물려 다니는 탈脫자아적 삶을 산다면 폭군을 만날 수밖에 없다. 곰곰 자신을 들여다보자.
“오늘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은 나의 길인가. 아니면 남의 길인가”